24년 4월, 어느 날의 기록
감정은 세금 고지서와 같다. 세금 납부를 미루어도, 언젠가는 세금을 내야 한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감정을 제때 느끼지 못하면, 과거 사건은 끝났지만, 그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감정은 여전히 생생할 것이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감정은 회피하고자 한다. 많은 사람이 내게,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단순히 잊으라고 하였다. 상처받은 경험과 그로 인해 파생된 감정은, 본인의 의지로 잊을 수 없다. 감정을 회피하는 것은 결국 본인에게 더 큰 화로 돌아올 수 있다.
나는 지난 수년간부터 현재까지 과거 상처, 트라우마가 떠오르는 현상으로 인해 괴로워해 왔다. 과거 상처는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기되었다. 이는 내가 하는 일들을 방해하였으며,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렸다. 학업에 집중하려 할 때, 지인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길을 걸을 때, 독서를 할 때 등 시도 때도 없이 과거 겪었던 사건 및 그것에서 파생된 괴로운 감정들이 떠올랐다. 당시 별사건이 없더라도, 나도 모르게 화가 나 있거나 기분이 안 좋은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어느 순간에, 무슨 이유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등 감정에 대한 메타 인지 능력이 매우 떨어져 있던 상태였다.
최근 들어서야 심리, 정신 건강, 에세이 등 여러 서적을 읽었다. 이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한 글을 쓰면서 내 감정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사건들을 ‘글’의 형태로, 가시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에 따라 내가 어느 순간, 무슨 이유로,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대해 파악하는 메타 인지 능력이 좋아지고 있다. 혼란스럽던 나의 감정이 과거에 비해서는 정리되는 중이다.
이렇게 나의 감정에 직면하고 이를 들여다보는 노력을 현재는 적극적으로 하고 있지만, 과거의 나는 안타깝게도 내 감정을 등한시하였다. 과거의 나는,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존중해 주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특정한 나의 모습을 상정하고 그 모습을 향해 나아갔다. 문제는 이 둘 사이의 괴리가 컸음에도 스스로 당시 모습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거의 없었다. 내가 원하는 모습에 닿지 못하는 나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즉, 나의 감정, 정서 같은 ‘나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되어야 하는 나’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과거 스스로와 주변 환경으로부터 돌봄 받지 못한 감정, 상처들이 최근 들어서야 상기가 되어, 현재 나를 괴롭히고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감정을 억압하고 회피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기억에 남는 시기는 중고등학교 때다. 그 시기, 나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상급 학교 진학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거의 매 쉬는 시간마다 수학 문제를 풀었고, 시험 기간에는 새벽 5시에 기상해 공부하곤 하였다. 나 자신을 공부하는 ‘기계’라고 여겼고, 일부러 감정이 없는 척했다. 한순간도 공부를 안 하고 있으면 혹은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자신을 스스로 비난하고 한탄하기에 바빴고 그 속에서 조그마한 여유조차도 없었다. 이렇게 공부해도 힘들지 않은 척하였고, 목표를 위해 나의 감정과 원하는 욕구를 참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아니, 나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나머지, 내가 원하는 욕구조차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학교, 이거면 충분했다. 그동안 목표를 위해 지나치게 고생하고 자신을 혹사했던 과거의 내가 생각이 나서 슬프고 분하다.
목표만 쫓았다. 나의 감정을 누르면서까지, 나를 망쳐가면서까지 말이다. 대단하거나 혹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그 어떤 목표라도, 나의 감정을 망가뜨리면서까지 그리고 상처받으면서까지 이뤄야 할 목표는 없다. 나 자신보다 목표가 중요해지기 시작했고, 목표를 위해서라면 나의 희생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맹목적 간절함은 결국 나를 갉아먹었다. 이 시기 외면받았던 나의 감정들이,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현재의 내게 소리친다. 그 외침은 현재 내게 분노, 슬픔, 억울함 등의 형태로 불쑥 올라온다.
목표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것 자체는 스스로 박수받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의 감정은 철저히 무시한 채 달려왔었고, 지금 회피했던 감정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 같다. 과거의 내게 미안하다. 그 시절의 내가 안쓰럽고,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스스로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그리고 버텨줘서 고맙다고 안아주고 싶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원인 중 하나는, 감정 표현 자체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사회 및 학교 분위기였다. 특히 남학생에게, 감정 표현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프레임을 씌우는 몇몇 학교 교사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한 교사는 내게
“왜 울어. 남자가 울면 안 되지.”
고등학교 2학년 때 한 교사는, 날 겨냥해 반 동급생들에게
“야, 남자가 돼 가지고 장난 안 받아주는 거 진짜 쪼잔하지 않냐?”
나의 초중고 시기에는, 사회가 설정해 놓은 ‘남자다움’에 갇혀 사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테두리에서 벗어난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사회가 원하는 남자다움으로부터 벗어나 있던 나는, 내 모습을 부정하고 나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그 틀 안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고도 했었다.
위 예시의 사람들은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감정을 잘 느끼는 남학생에게, 그들이 설정한 ‘남자다움’에 벗어났다는 낙인을 찍었다. 그리고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열등한 것이라고 여겼다.
또 다른 사례로는, 청소년 시기 한 친구 A와의 대화다. A와 같이 자주 시간을 보내고 내 이야기를 하곤 했다. 대화하는 과정에서 생각 차이가 크게 느껴졌고, A는 나를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했다. 또한 나의 상처의 크기와 정도를 본인의 잣대로 평가할 때가 많았다. 나는 당시 친구라 생각하고 마음을 열었던 사람이, 내 얘기를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내 상처의 정도와 크기를 함부로 평가하는 점에 상처받았다.
A와 대화하는 순간들이 힘들었고 부담이 될 때가 많았다. 편하게 얘기할 수 없고, 긴장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내 고민을 말하면, A는 그것이 논리적인지 혹은 명확한 근거가 있는지 등을 고려하고 따졌기 때문이다. 당시 이는 내게 반박이라 느껴져서 편하게 얘기하지 못했다. 친구와의 대화임에도 불구하고 출처나 명확한 기억 등의 근거를 준비해서 말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또 감정적으로 힘들어하고 있던 내게, 나의 이야기를 평가하고 이에 본인의 생각을 토대로 조언을 주려고 하였다.
A가 내 얘기를 듣고 자주 보인 반응으로는, “아 그래서 그게 기분 나빴다?”라고 말하며 내가 기분 나쁜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넌 신경 안 써도 되는 일을 신경 쓴다.”라고 하며 나의 걱정과 고민의 중요도를 낮추는 말도 하였다. 많은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힘든 이야기를 꺼냈지만, A는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했고 나의 고민을 쉽게 생각하였다.
나는 남들에 비해 상처받는 역치가 낮다. 남들보다 민감하고 섬세한 편이다.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A도 그들 중 한 명이다. 여러 번의 대화 이후, A는 내 상처가 논리적으로 증명 가능하거나 납득할 만하지 않으면 비정상이라 치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의 민감함과 섬세함, 내가 느끼는 감정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였고 나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많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나를 이해하거나 공감해 주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타인은 다르니까. 하지만 나의 상처의 크기와 정도를 함부로 평가하는 것은, 타협의 여지없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에 상처를 굉장히 많이 받았다.
나의 감정이 거절당하고 함부로 취급당했던 경험들로 인해, 감정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것이 논리적이지 않으면 또 거절당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하지만 감정은 논리와 결부시킬 수 없다. 내가 기분이 나빴으면 기분이 나쁜 거고, 화가 난 거면 화가 난 거다. 감정에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고, 근거를 가지고 설명할 수도 없다.
위 예시를 포함해 감정에 무감각하고 무지한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았던 경험들이 많다.
이에 따라 나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 졌다. 화가 나는 것도, 슬픈 것도 누군가의 생각을 들어보고
‘아, 이게 내가 화나도 되는 상황이구나’
‘아, 이게 내가 슬퍼도 되는 상황이구나’
하고 생각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그에 따라 감정을 느끼려 한 적이 많았다. 제삼자가 보았을 때도, 그 감정을 느끼기에 적당하다는 판단이 들면, 그제야 나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표현한 기억이 많다.
하지만 감정은 논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않다. 감정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나의 감정을 소중히 다루지 않고 억압하고 왜곡하려 했던, 못된 사람들로부터 당한 경험들이 많다. 그래서 나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더 나아가 내가 느낀 감정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사람들은 과거 기억 및 그로부터 파생된 감정들은 잊고 다시 출발하라고 말한다. 과거의 나는 부정하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그래서 나도 ‘잘 가, 과거의 나야.’라는 가사를 인상 깊게 느끼고 내 모토로 삼기도 했다.
근데 현재의 나는, 과거 나의 축적된 모습이다. 또 과거 상처들로 인해 난 글쓰기를 시작했다. 과거 상처 때문에, 글쓰기라는 좋은 습관이 들여졌다. 지속해서 글을 쓰다 보니, 글쓰기 실력은 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에 스스로 보람을 느끼고 있다.
힘이 약해서, 반항할 힘이 없어서, 대처할 방법을 몰라서.
타인의 폭력을 그대로 흡수하는 걸 넘어서 스스로 2차 가해를 하고, 친하다 생각했던 이들에게 3차 가해를 입었던 지난날들.
안 좋은 기억과 그로 인한 감정들,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할 거다.
과거 상처들, 모두 자양분으로 삼아 ‘글’이라는 ‘예술’로 풀어갈 거고, 결국 난 과거 상처를 이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