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고성에서

코로나시절 술과 고성이야기

by 서희구

고등학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비행도 안 하는데 고성 와서 설거지도 하고 수영도 하고 그래.” 고성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의 전화였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11년 차 승무원이었고 경주마처럼 일만 해서 매우 지쳐 있던 상태였다. 벗아웃이 오려는 그즈음, 때마침 코로나로 인해 대부분의 비행 스케줄이 잠정 중단되었다.


비행을 안 하니 행복하면서도 막상 나머지 시간 동안 한국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친구 카페 일도 도와주고 바다에서 수영, 서핑도 하며 저녁에는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다니. 자유가 주는 해방감은 술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나는 당장 강원도 고성으로 향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렌피딕 위스키 한 병을 들고.


해외에서 유명하다는 현지 전통주, 칵테일, 생맥주 등을 수도 없이 마셔 봤지만 마트에서 파는 와인이 이토록 맛이 좋았나? 회 한 접시와 화이트 와인의 조합은 파도가 치는 가진 해변에 보랏빛 노을만큼이나 강렬했다. 가격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마음이 기꺼이 그 분위기와 술을 담는다면 가장 충만한 값어치였다. 일 년에 서너 번, 한 달 스케줄이 있는 비행 때는 위스키를 사 왔다. 면세품 판매 저조로 떨이식 위스키를 절반 가격으로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었다. 그 맛이 또 얼마나 기품 있고 향긋하든지 친구 한두 명 혹은 연인과 단둘이 나눠 마셨던 위스키가 바이러스까지 잠식시켜 버리듯 목과 혀를 휘감았다.


값비싼 와인만이 분위기를 압도한다고 착각했다. 이름 모를 해변가에 돗자리를 무심히 툭 깔고 싸구려 와인 한 병과 젤라토를 사서 마시는 그 맛은 위스키와 초콜릿 궁합만큼 환상적이었다. 합리적인 가격의 와인도 꽤나 풍미가 있다고 몸소 알게 되었다. 요즘 성수동에 와아(와인과 아이스크림)를 페어링하는 것이 유행이던데 나는 강원도에서 이미 경험해 보았다.


여행지와 술, 이 두 가지는 매우 비슷한 접점을 가지고 있다. 생각만 해도 설레고 기분 좋아지며 고단한 하루 끝에 씁쓸하지만 달큼해서 그리워지는 술맛이 여행을 떠나고 싶은 감정과 매우 흡사한 것처럼.

여행은 나에게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한국은 최고의 여행지가 분명하다. 그게 어느 곳이든 맛있는 음식과 술이 주는 행복감, 그리고 애정하는 사람의 안온함만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술은 언제나 나에게 다정하고 너그러웠다. 고성의 여름밤은 더더욱.


마스크 착용으로 답답했고 비도 숱하게 내려 흐린 날도 많았지만 화창한 날은 유독 싱그러웠던 그해 여름을 잊지 못한다. 다양한 나라를 다니며 경이로운 풍경과 마주한 적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나는 고성에서의 여름밤 와인 마시던 기억이 인생의 순간에서 가장 찬란하게 느껴진다. 생경하지 않고 익숙한 동해가 나를 위로해 주었고 와인 한 모금이 지친 나를 충분히 쉬게 해 주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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