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에 관한 뜬금없는 사색
최근 몇 년 새 동물 반려에 대한 내 인식은 확연히 달라졌다. 우리 사회가 시나브로 성숙해진 덕도 있지만 나는 몇 년 전부터 반려동물을 진정 끔찍이 위하는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위하냐면, 출퇴근 시간 반려견을 동반한 사람들이 학교나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려다주는 부모만큼 흔하고, 길거리에 발자취처럼 남겨진 반려의 용변에도 행인들은 별 불만이 없으며, 목줄 없이 산책하는 거구의 반려견(舊 사냥견)이 다가와 다리에 코를 킁킁대도 웃음 짓는 이가 대다수이다.
다리에 코를 킁킁대는 돌발적인 상황에 반사적으로 겁먹는 사람은 당최 나 하나뿐인 것 같은 이 나라에서 개 사랑의 끝판왕은 지난 2년간의 혹독한 방역 정책 시행에도 개에게만큼은 예외를 둔 것이었다. 지난겨울에 이어 올겨울에도 정부는 바이러스의 확산 방지를 위해 통금을 시행했다. 저녁 8시가 되면 인적없는 창밖에는 경찰차의 사이렌만이 숨죽인 채 번뜩였다. 단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은 예외였다. 혹여 퇴근이 늦은 주인을 둔 반려견도 있을 테니. 반려견의 신체적·정신적 건강 유지는 중요하니까. 솔직히, 혹독한 봉쇄령이 내려진 그 겨울에 나도 모르게 반려견에 질투하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변화된 환경과 성숙한 배려 수준에 맞게 좀 더 쿨한 반려를 소개하면 좋았으련만,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이 얘기를 꺼낸다. 짐작하시겠지만 나는 반려동물은 없고 알로에 선인장 등의 반려식물만 있다. 나는 차분하고 조용한 이 반려들을 애정함에도, 이들과는 구구절절 풀어놓을 만큼의 지대한 사연이 쌓여있지 않다. 함께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얽힌 게 적은 심플한 관계 덕일까. 나는 식물들에게 지극히 편안한 감정을 느낀다. 별 주장도 요구도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그 자리를 지키는 알로에와 선인장 일동에게 이 글을 계기로 고마움을 전한다.
그렇다면 이제 썰을 풀 존재는 그이뿐이다.
연애 시절을 포함해서 16년째 함께하고 있는 그이.
식물과 달리 자기주장이 강한 그이.
얽힌 것도 많고 심플하지도 않은 그이와의 관계.
그이는 푸들이나 요크셔테리어처럼 털이 있다. 얼굴 하관에 수북하게 기른 반곱슬의 수염이 있다. 내 반려는 스스로 수염을 손질할 능력이 되지만, 그렇게 자르라고 해도 자르지 않는다. 여기는 추운 나라임으로 수염에 방한 효과가 있다는 주장이다. 겪어보니 주장은 사실이다. 매섭게 추운 날 그이를 산책시킬 때면 수북한 수염 위로 허연 성에가 끼고 작은 얼음 알갱이가 맺힌다. 칼바람이 내 밋밋한 피부를 훑는 순간이면 나도 모르게 그 수북한 털을 부러워하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하여 나는 겨울에만은 긴 수염을 묵과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겨울이 길다는 것이다. 3월 중순이 접어든 지금도 밖에는 하얗게 눈이 쌓여있고 기온은 영하에 머물고 있다. 이번 주에도 역시 폭설이 예정돼 있다. 설령 이런 나날이 4월 말까지 이어진다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일본산 벚꽃이 6월 초에야 몽우리를 피는 곳이니까. 벚꽃이 핀 봄이 되면 현지인들은 드디어 여름이 왔다며 옷을 벗어 재끼는 곳이니까. 이곳에서의 첫봄엔 싸늘한 기운에 맞지 않게 한여름 삼복더위 차림을 한 사람들이 생경했지만, 두어 해가 지나자 나도 어느새 봄이 오면 여름옷을 입고 있다. 봄은 곧 6월, 여름이었다.
나의 반려자인 그이는 나를 이런 곳으로 데리고 왔다. 나에게는 일본 홋가이도에서 온 친구가 있는데, 3월쯤이 되면 그녀도 현지의 긴 겨울이 지겹다고 불만했다. 내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네 고향 홋가이도도 여기만큼 춥고 눈이 많은 데잖아!?”하니 그녀는 정색하며 홋가이도의 벚꽃은 5월에 핀다고 답했다. 홋가이도 친구도 나도 반려자를 따라 이 추운 나라로 살러 온 사람이다. 반려자가 아니었다면 한국어가 유창하며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내 홋가이도 친구는 한국에 살았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다. 반려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4월 중순 이전에 벚꽃이 피는 내 고향 서울에 살았을 것이다.
나와 그녀는 반려자를 따라 타국으로 이주한 결혼이민자다. 반려자 하나 믿고 내 가족과 내 친구, 내 언어와 내 문화를 떠나 이곳에 잔뿌리를 내리고 있다. 나는 종종 도박 같은 일을 저지른 거였어,라고 되뇐다. 좀 더 신중했다면 좋았으련만, 문득문득 후회가 드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이면 반려의 하관에 수북하게 자란 반곱슬의 수염이 참으로 보기 싫다. 저런 수염을 보겠다고 이런 데 와 사는 건지........
사람 사는 일이 참 그렇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수두룩하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별것 아닌 것에 트집을 잡게 된다. 거슬리지 않았던 것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 와 내 수가 틀어졌다고 해서, 후회한다고 해서 살아온 시간을 번복할 수는 없다. 그것을 일컬어 나는 <시간의 무번 복성>이라고 명명했다. 시간의 무번복성으로 인해 우리는 과거로부터의 유산인 현재의 삶에 착근해 있다. 그 돌이킬 수 없음에 안타까움이 고개를 쳐들면 마음의 파고를 진정시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단은 그를 피해 밖으로 나간다. 먼 곳에 눈을 두고 걷는다. 그리고 다시금 상기한다. 나의 반려자를 한결같이 애정하기 위해서는 노오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학업을 위해 노오력하고 취업을 위해 노오력했듯 지금의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수염을 기른 반려를 사랑하려 노오력해야 한다는 것을. 이런 노오력의 순간순간이 모여 동거동락한 지난 14년을 이루었다. 함께 한 16년 중 2년의 연애 기간 중에는 노오력 없이도 그이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렇다. 그의 수염까지도 사랑했던 압도적인 시간도 있었다.
그 시절의 추억을 회상한다. 솔직히 지금은 별 아련한 감이 없다. 그러나 이것도 노오력을 해보자. 이 김에, 그러니까 나의 ‘반려’ 얘기를 꺼내는 김에 나는 우리가 밀도 있게 사랑하던 시절의 알흠다운 추억을 소가 여물을 씹듯 곰곰이 또 곰곰이 되새김질해 본다. 당시의 나를 압도했던 감정을, 여기까지 오게 된 선택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 본다.
역시 노오력을 하니 불현듯 다시금 그때의 추억이 조금은 아련해지는 것도 같다.
아! 이 아련한 듯한! 느낌,
느낌이 와서 천만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