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뱀, 점잖은 짐승.
난 용보다는 뱀이 좋더라. 새끼뱀도 예쁘고 굵다란 구리빛 구렁이도 예쁘더라.
취학 전이던가? 암튼, 시골 외가에 1년 반 남짓 맡겨진 어린 나는 아무 시름 모르고 산으로 들로 쏘다녔었다.
비 온 후, 봄 숲에는 진분홍빛 독버섯이 예저기 솟아 있었다. 미끄럽고 윤기 흐르는 배암이 수풀로 스며드는 게 보였고 마른 덤불엔 뱀이 빠져나온 흰 허물이 보였다.
한번은 혼자 길을 가다가 커다란 뱀을 만났다.
어른 팔뚝 굵기만한 구렁이였는데 기다랗게 길을 가로질러 꿈쩍도 안 하고 있었다.
어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배암 옆에 쪼그려앉아 머릴 길가 수풀에 감추고 멈춘 듯 느릿하게 물결짓는 배암을 굽어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배암의 꼬리가 스르르 수풀 속으로 사라지고나서야 나는 무심히 일어나 가던 길을 갔다.
그랬다. 아무도 나에게 뱀은 우험하다고 일러준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무심할 수 있었다.
지금 그때의 고요한 무심을 떠올리니, 뱀과 어린 나 사이에 어떤 알 수 없는 경건함이 떠돈다.
어린 날의 인상 때문인지 나에게 뱀은 여전히 고요하고 점잖한 짐승으로 남아있다.
D.H. 로렌스는 그의 시, '뱀'에서 신성을 보기도 했다. 인간의 편견이 고요하게 머물어 존재의 충일을 즐기는 뱀의 신성을 깨뜨린 일에 대한 후회를 고백했다. 실제로는 물 마시고 고갤 들어 우아하게 주위를 돌아보는 뱀을 향해 막대기를 던졌었다.
"뱀 한 마리가 내 물통으로 왔다
(중략)
그러나 내가 고백해야 하나, 얼마나 그놈을 내가 좋아했는지,
그가 손님처럼 조용히 내 물통에 물 마시러 와서,
목을 축이고 나서 감사의 말도 없이 유유히
이 대지의 뜨거운 내부로 떠나가는 것에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하략)"
0102. 인.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2-천경자, 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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