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에 쌓여있던 눈이 윤슬처럼 반짝거리며 창처럼 매달려있던 고드름 끝의 물이 방울방울 처마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꽁꽁 언 손으로 고드름을 붙잡고 칼싸움하던 남자애들을 쳐다보며 난 처마밑에 쭈그리고 앉아 손바닥에 낙숫물을 받곤 했다. 손바닥에 들어온 시원한 물은 어찌나 맛있었지. 손바닥이 벌게지도록 받아 마시며 동네 한쪽에 있던 떡방앗간으로 가래떡을 뽑으러 간 엄마를 기다리며 설을 맞이했던 것 같다. 가래떡을 뽑아 2,3일을 집에 뒀다가 떡국떡을 썰곤 했는데 그럼 설이 거의 다 왔다는 것이었다. 일 년에 몇 번 새 옷을 사주던 시절이었지만 설 때만큼은 새 옷을 사주곤 했다. 때때옷을 입을 수 있는 그날이 얼마나 좋았는지. 치맛자락 나풀거리며 동네에 세배하려 다니던 그때가 딱 요즘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의 기억들이 지금도 선명하게 나는지.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외손녀한테 선물로 뭘 사줄까 했더니 혼자 이것저것을 말하다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그런다. 가방도 받았고, 학용품도 받았고. 등등. 늦게 말한 할머니한테는 선물해 줄 순번도 없었다. 이번에 결혼한 외숙모가 키즈워치폰을 선물해줬다 한다. 화상통화도 되고 GPS도 되어 맞벌이 부모들이 어린아이들 손목에 채워 준다는 것이다. 이 비싼걸 차고 다녀도 되냐고 했는데 다들 그런다고 하니 할 말은 없다. 없는 게 없어서 어떻게 하냐고 하니까 손녀가' 현금으로 주세요' 한다. '뭐 하게?' 하니까 '친구들과 뭐 사게요'한다. 아무리 없는 걸 생각해도 없으니 현금으로 달라고 하자 괜히 가슴이 쿵한다. 설날이면 때때옷 한벌 사주면 어찌나 좋아했던 그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색도 못하고 혼자 소심하게 '라때는~'하고 만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세상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꼭 옛 시골 마을 어귀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다. 마을을 지키는 당산목도 있었겠지만 플라타너스 나무도 많았었다. 이때쯤이면 잎도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이 남아 꼭대기에 새집이 하나씩 올라와 있는 것이 보였다. 까치들의 집이다. 명절이 되면 일가친척들이 다들 큰집으로 모이게 되는데 친척분들은 대개가 명절 전날 오시기 마련이다. 커다란 나무 위 새집 안에서 멀리서 오는 낯선 손님을 발견한 까치는 침입자라고 생각하고 짖기 시작한다. 그러면 일하다 말고 손님이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안 집안사람들은 반가운 맘에 동네 어귀로 마중 나가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 설날 새벽 가장 먼저 까치소리를 들으면 그해 운수대통한다고 했다. 그렇게 까치는 길조가 되었고 까치의 설날은 명절 전날이 되었다.
플라타너스
메타세콰이어
까치는 까마귀과에 속하는 조류이다. 까마귀는 흉조이고, 까치는 길조로 여기며 살아왔다. 까치는 鵲(작)이라고 한다. 칠월칠석날 까치가 하늘로 올라가 견우직녀의 만남을 도움 준 烏鵲橋를 놓았다는 말처럼 좋은 의미로 묘사되었다. 가장 높은 나무 위에 둥지를 지어두고 살아가는 텃새이다. 해마다 집을 수리해서 또 사용하기 때문에 오래된 둥지는 커지기 마련이다. 봄에 알을 낳아 키우며 주로 잡식성이라 쥐 같은 작은 동물부터 해충, 곤충, 곡물등 닥치는 대로 먹고 살아간다. 지능도 어린아이 수준이어서 사람 얼굴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이다. 쫓아다니며 한 사람 머리를 쪼아서 그 길을 피해 다닌다는 TV프로도 본 적이 있다. 그 사람 옷이 까치의 눈에 거슬려 맘에 안 들어서 그런다고 했던 것 같다.
텃새 중에서 가장 사납고 거칠어 하늘의 조폭이라고 한다. 떼 지어 다니면 맹금류도 쫓겨 다니고 새들은 꼼짝없이 당하는 생태계의 최상위급이다. 마냥 길조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거칠다. 길 고양이들의 밥을
뺏어먹는 것은 기본이다. 어느 날인가 아파트에 산책하고 있는데 까치가 나타나더니 길 고양이의 머리를 쪼고 달아난다. 화가 난 고양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면 또 와서 머리를 콕 쪼고 달아나며 약을 올리는 걸 쳐다보니 얄미운 까치라는 생각이 든다. 긴 꼬리를 까딱거리며 거만을 피운다. 어깨와 배. 허리는 흰색이지만 머리에서 등까지는 금속성 광택이 나는 검은색을 입고 있는 멋쟁이이기도 하다. 베란다에 침입해서 귀찮은 비둘기를 쫓아내는 방법도 까치를 유인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까치가 터를 잡으면 비둘기는 두말도 못하고 쫓겨난다. 요즘은 직박구리도 제법 사나워져 까치의 경쟁 상대가 되어가니 두고 볼 일이다. 시끄럽기는 매한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