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색 노을을 봤으니, 내일도 좋은 날일 거야

사진첩 #3

by 나만의 뜨락




2023/06/13

Kauri Point Wharf, Tahawai, New Zealand





뉴질랜드 북섬의 타우랑가에서 북쪽으로 약 1시간쯤 차로 이동하면

타하와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그 마을에는 바닷가로 쭉 뻗은 작지만 긴(?) 부둣가가 있다.


딱히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쉬는 날에 낚시를 할 곳을 찾던 나에게는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하지만 애시당초 계획에 없었기에 느즈막히 출발해서

해가 지기 조금 전에야 도착했다.




해질녘에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라 그런지

단 한 사람만이 낚시를 하고 있었고,

그 사람조차도 채비를 정리하고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센 바람을 뚫고 낚시를 하는 도중에

여태 받아본 적 없는 강력한 입질을 받았다.


하지만 그리 큰 물고기를 잡을만한 채비가 아니었던지라 바늘이 작았고,

몇 번이고 수면으로 튀어오르던 물코기는

결국 작은 바늘을 뱉어내고는 도망가고 말았다.




날도 늦었고 낚싯대를 정리한 뒤 집에 가려던 찰나,

믿지못할 풍경이 펼쳐졌다.


2023/06/13

Tuapiro Reserved, Tahawai, New Zealand



그 당시의 지식으로는 주변에 불빛이 완전 없는 깜깜한 곳까지 가야만

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은하수가

바로 바다 위로 떡하니 보이는 것이 아닌가.


가로등 아래에서도 은하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며

그렇게 이곳과의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돌아갔다.




이후 3주쯤 지나서 다시 낚시를 하러 갔을 때의 야이기이다.

전보다는 조금 이르게, 해가 지기 2시간쯤 전부터 낚시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에 왔을 때와는 달리, 물고기가 거의 없었다.


주변에 낚시를 하는 5명의 낚시꾼들이 더 있었지만,

손바닥만한 물고기가 한 마리 낚였을 뿐.




그러던 중 한 낚시꾼의 아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올해 9살이라는 이 아이는 이런저런 얘기를 조잘대면서 말을 걸어왔다.


본인이 사모아인은 아닌데 사모아어를 조금 할 줄 안다면서 선보이기도 하고,

몇 년동안 갈고 닦은 손으로 호루라기 부는 법이라면서 불어주기도 했다.

어설펐지만 몇 번 하더니 성공하고 뿌듯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 때부터는 낚시는 뒷전이었고,

그냥 뉴질랜드 초딩하고 얘기하는 게 재밌어서 계속 대화만 나눴다.



휘슬을 보여주기에 나도 이에 질세라,

어릴 적에 몇 달간 갈고 닦았던 손으로 방귀뀌기를 보여주었다.


언제나 아이들이 그렇듯이 방귀 소리에 자지러지기 시작하고,

사부님 모시듯이 알려달라며 쫓아다녔다.


영어가 원어민 수준이 안 되다보니 상세히 알려주지는 못 했지만

1년쯤 꾸준히 연습하면 될 거라고 말해주고 왔다.

(사실 그 정도까지 걸리진 않는다.)




2023/07/12

Kauri Point Wharf, Tahawai, New Zealand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는 지고 있었다.


내가 먼저 주황빛으로 물든 노을을 보며 멋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오렌지색 노을을 봤으니, 내일도 좋은 날일 거야

당연히 과학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아무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냥 일반적인 어른이 한 말이었다면

그의 감성을 비웃거나 폄하하지는 않겠지만,

그저 "이 사람 꽤나 낭만적인 사람이구나?"

정도의 생각만 했을 것이다.


그냥 으레 하는 말이 아니라, 어린 아이의 순수한 믿음이 담겨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던 것 같다.




나는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아서

스스로 굉장히 감성이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해왔다.


근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감성이 부족한 거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싸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지난 1년 정도를 되돌아보면

이 이후에 확실히 주변의 소중한 일상의 아름다움을 많이 포착하게 된 것 같다.

많은 시간동안 주변에 널려있던 아름다움을 놓치고 살아왔던 것 같아 아쉬움이 들 때도 있다.




그 아이는 여전히 주황색 노을을 보며 좋은 내일을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어쩌면 감성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그저 잊고 살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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