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통하지 않아도 밥은 통하더라-
띵동!
코로나 여파로 지금은 종영을 했지만 <한끼줍쇼>에서는 식구(食口)가 되기 위해 이 집 저 집 초인종을 누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연예인이 평범한 가정을 방문해 한 끼를 얻어먹는다는 컨셉이 신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식구는 커녕! 첫회부터 편의점 컵라면 신세를 지는 이경규님의 처량한 모습을 보며 '이 프로그램은 곧 없어지겠다' 싶었다.
그런데 의외로 회를 거듭할수록 상승세를 탔고, 이효리, BTS 등 탑급 연예인들도 출연을 하며 관심을 더하는 프로가 되더라. 아마 밥상을 마주하고 정을 나누는 이야기들이 펼쳐지면서 진성성이 통한 것이리라.
우리는 한끼줍쇼처럼 작정하고 초인종을 누른 건 아니지만, 정말 예상치 못하게 밥을 얻어먹은 적이 있다. 그것도 낯선땅 미얀마 현지에서.
허접한 이방인의 최후
미얀마 바간을 둘러보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바로 E-바이크를 타는 것이다. E-바이크는 우리에겐 생소하지만 이곳에선 우리의 지하철만큼이나 대중화된 교통수단이다. 한여름의 미얀마는 대체로 햇빛이 매우 따가워 걸어다니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런곳에서 이 허접한 이방인들은 바이크만 빌리면 다인 줄 알았던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 뭐야, 이거 갑자기 왜 이래?
하루 렌탈 비용이 겨우 4천 원 밖에 안 한다며, 신나게 도로를 달리던 날. 작동법에 익숙해지니 속도가 붙어 따라오는 바람과 햇빛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달렸을까. 저절로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바로 바이크의 배터리가 다 한 것.
아무것도 없는 허허 망망한 도로에서 당황스러운 찰나, 다행히 멀리 가게 하나가 있기에 바이크를 끌고 갔다. 그 흔한 간판도 없던 가게는 반갑게도 주유소! 주유소라면 연료가 떨어진 바이크를 채워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E-바이크의 충전은 주유소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E-바이크는 조그마한 오토바이로 기름 대신 전기 충전으로 작동하는 것이거늘...
절망스러운 우리의 꼴을 보고도 호탕하게 맞아준 주유소 아주머니의 웃음을 잊을 수가 없다. 비록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눈치로 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휴대폰 충전기를 가리키며 “이걸로 바이크 충전해줄까?” 하며 장난칠 줄 아는 익살 넘치는 아주머니였다. 그런 그녀의 귀여운 장난에 피식 웃음이 났고,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아주머니는 지나가는 나그네의 목부터 축여주시고, 앉던 의자까지 내어주셨다. 그리곤 바이크에 적혀있는 업체에 연락해 유창한 현지어로 상황 중계를 해주셨다. 아휴 감사해라. 입에 안 붙는 생경한 언어라 배우길 포기했는데 겨우 몇 개 외워둔 나 자신이 기특했다.
"째주바!!!!! (감사합니다)"
업체에서 돌아온 대답은 딱 하나. 견인차를 불러야 한단다.
그것도 최소 30분~1시간 이상 기다려야 견인차를 보내줄 수 있단다.
헉. 해외에서 견인차라니 큰 일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우리는 사실 상상 못 할 더위와 허기짐에 매우 지쳐있었다. 덥고 배고픈 건 최악인데, 거기에 플러스로 무작정 기다려야 견인차가 온다는 건 '최최악'인 셈.
아마 해외여행 중에 부부가 다툰다면 이런 상황이리라. 너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니지만 두 사람 모두 날카로운 차가운 이 공기. 평소 즐겨마시지도 않는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이 절실했다.
여행이 뜻대로 흘러갈 리 없겠지만
돌이켜보면 여행은 뜻대로 흘러간 적이 별로 없다.
회사일에 치여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던 휴가에선 비행기를 놓쳐 하루 뒤에 떠났어야 했고, 친구들과 겨우 일정을 맞춰 떠난 동남아에서는 3박 4일 내내 비가 왔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항공편이 결항된 적도 있다.
애처로운 상황을 미화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아도 그것을 보상해주는 다른 경험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날카로운 공기를 사르르 녹여준 것은 다름 아닌 '밥'이었다.
주유소에서 견인차를 기다리며 죽치고 있기엔 영업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근심스러워하던 찰나, 안쪽으로 들어간 아주머니가 그릇을 내오시는 게 아닌가.
손사래를 치며 괜찮아요,라고 했지만 눈 앞에는 금세 밥이 차려지고 있었다. 그것도 밥을 크게 한 바가지를 퍼오시곤 연이어 달걀 볶음을 비롯한 몇 가지 반찬을 내오신다.
갓 볶은 계란의 고소한 향이 코를 찌른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상황에 따스한 밥을 대접받다니. 유독 밥을 좋아해 데이트할 때도 파스타보다는 국밥을 찾던 우리에게 낯선 땅에서 한식 비스무리한 밥은 감동이다. 바이크고 뭐고 일단 나부터 충전해야겠다.
전 인류에게 밥 한 그릇처럼 따뜻한 것이 또 있을까. 낯선이에게 조심스러운 순간에도 밥그릇을 나누면 경계가 사라진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던 것이 무색하게 밥그릇을 비워내자 아주머니는 다시 한번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미얀마식 떡도 꺼내와 아기새에게 모이 주듯 입에 직접 넣어주시기까지! 어쩜 전 세계 어머니들 마음은 다 똑같은가 보다.
그러고 보면 초대받아서 먹는 밥과 얻어먹는 밥은 엄연히 다르다. 초대받아 먹는 밥과 달리 얻어먹는 밥은 그 가정의 밥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속으로 무얼 내놓아야 할까 고민을 하며 우당탕탕 차려 내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끼줍쇼 속에서도 나왔던 단골 멘트는 '갑자기 오셔서 차린게 별로 없어요'였던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안다. 있는 가운데서 최선을 다해 차려준 것임을. 그렇기에 맛있을 수밖에 없다. 아니 맛이 없어도 맛이 있는 것이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아도 밥은 통했다.
시원찮은 영어로 손짓과 발짓을 섞어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견인차가 도착했다. 미얀마식 떡이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들르라는 아주머니. 그 날 내주신 밥 한 그릇은 아주머니의 온기를 대변하고 있었다.
요즘 마음 아픈 소식이 자주 들려오는 미얀마.
이국적인 풍경도 물론 한몫 하지만, 사실은 따뜻했던 사람들 덕분에 그곳에 대한 그리움은 늘 마음 한켠에 자리 잡고 있다. 40도를 넘는 땡볕에도 호탕한 아주머니의 웃음은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시원했는데, 혹시 지금은 그 웃음을 잃으신 건 아닐지.
그 날 이방인인 우리에게 따뜻한 밥 한 끼 건넨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