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이슬 친 논두렁 길

by 공존

유년 시절 아버지의 잦은 주사와 가정 폭력으로 어린 소년의 마음에는 늘 그늘이 져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는 곳에 작은 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가끔은 그 가게 앞에 아버지가 술에 취해 쓰러져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누가 볼까 두려워, 황급히 다른 길로 뛰어 학교에 가곤 했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 있은 후, 소년은 그 가게 앞 큰길로 다니지 못하고 논두렁을 가로지르는 오솔길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시골의 아침 논두렁길이 다 그러하듯, 새벽에 내린 이슬은 부끄러운 가정사를 숨기고 싶은 꼬마의 신발을 이내 축축하게 적셔버렸습니다. 학교에 도착하면 신발과 양말은 엉망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부끄러움이 많고 자존심이 강했던 소년은 더러워진 양말을 보이기 싫어 양말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학교에 도착해서야 몰래 꺼내 신곤 했습니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자신을 한없이 사랑해 주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배움이 없어 자기 이름 석 자도 삐뚤빼뚤 쓰는 무학의 촌부였지만, 소년의 재능을 누구보다 인정하고 늘 칭찬해 주셨습니다.


소년은 나이가 들어 고등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도저히 망나니 같은 아버지의 주사를 견디면서 시골집에서 학교를 다닐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대전이라는 도시로 떠나 학교를 다니기로 결심했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소년은 빠듯한 하숙비와 용돈에 힘들어했고, 가끔은 고등학교 등록금을 내지 못해 교무실에 불려 다니며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하숙비를 받으러 시골집에 가는 일은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농사를 지어 작물을 팔아 돈을 버는 어머니에게 매달 하숙비와 용돈을 줄 만한 돈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소년은 늘 애가 탔습니다. 그런 소년의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소년의 어머니는 그저 밭에 나가 일을 하실 뿐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소년은 밭에서 일하는 어머니에게 하숙비며 용돈이며 학교 등록금에 필요한 것들을 겨우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입고 계신 몸빼 주머니에서 몇 푼을 꺼내 보셨지만 늘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러고는 이제 제법 장성한 아들의 손을 잡고 '창고'라고 부르던 버스정류장 가게 아주머니에게 돈을 꾸러 가셨습니다.


"우리 아들이 대전에 가야 하는데 돈이 좀 부족하네. 이것저것 팔고 돈 생기면 바로 갚아줄게."


이제 소년의 손에는 간신히 모자란 얼마의 돈이 쥐어졌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버스를 타고 오면서 소년은 몇 번을 울었는지 모릅니다.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저 이를 악물고 공부하는 수밖에. 그렇게 소년은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과 희생을 저당(빚) 삼아서 말입니다.


그 시절, 소년의 어머니는 또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쯤 일 겁니다. 소년이 고향 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리저리 알아보니 아버지의 폭력에 견디다 못해 결국 가출을 하신 겁니다. 소년은 서울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가 예산에 있는 작은 병원에 계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핸드폰도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무작정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작은 방 한 칸을 얻어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고 계셨습니다.


소년은 어머니의 아픔과 걱정보다 당장 자신의 처지를 더 걱정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학교는 무슨 수로 다닐 것이며, 그동안 공부한 것이 다 쓸모없는 짓이 될까' 하는 생각에 불안했습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이때쯤 소년은 학교 영어 선생님의 권유로 같은 학년의 유복한 동창 집에서 지내며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공부 못하는 그 집 아들의 과외 선생 겸 친구 명목으로 무료 숙식을 하게 된 겁니다. 그 집은 대전 신도시에서도 가장 크고 좋은 아파트였고, 그랜저에 카폰까지 달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부잣집이었습니다.


소년은 잠시 행복했지만 그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부잣집 아들은 늘 말썽을 피웠고, 성적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점심 도시락을 싸주지 않아서 학교 매점에서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웠습니다. 저녁 야간 자율 학습이 있으니 저녁도 컵라면으로 때웠습니다. 이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3학년 1학기 때는 결국 그 집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다행히 인심 좋은 다른 하숙집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소년은 이때 육군사관학교에 가기로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모교로 육사 홍보를 온 회색 제복을 입은 선배가 한없이 멋있고 당당해 보였습니다. '저 제복을 입을 수만 있다면 소년의 힘겹고 아픈 인생도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멋진 제복이 소년의 상처 난 마음을 든든하게 감싸줄 갑옷이 되어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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