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존재인 인간의 이성
다름 아니라 악은 "무사고", "생각 없음",
곧 생각 없이 하는 행동(thoughtlessness)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관찰입니다.
Insight통찰
요즘처럼 기독교가 사회적 비난을 받는 시대가 있을까 싶다. '개독'이란 말이 등장한지는 오래되었지만 최근 극우 교회 물결을 타고 교회는 이제 혐오의 대상으로까지 불리고 있다. 이는 권력과 물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교회가 정치의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가? 왜 일부 정치선동 목사들에게 휘둘리는가?
그러나 오랜 시간 교회에서 생각하지 말라고 믿으라는 신앙관에 익숙한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 교리와 설교가 하나님 말씀 자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한다는 것>의 저자 강영안은 이런 현실에 빗대 신앙은 생각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의심하는 믿음이 죄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음'과 '무식'이 신앙의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강영안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상식적인 사고와 행동이다. 세상에서 오랫동안 통용되는 인류 공통의 선에 기초한 생각을 신앙에 적용해야 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은 인류 공통의 가르침이다. 여기에 기초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책 말미에 나오는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에 기초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람들은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세상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이며 하나님 나라의 실천이다. 세상에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이바지해야 한다. 맹목적인 믿음과 신앙적 무지가 지금 얼마나 큰 피해를 가져오고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본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믿음과 생각(이성)은 연결되어 있다. 믿음은 존재론이다. 무엇이 존재한다는 믿음이다. 믿음으로 세상이 존재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믿음은 시작이며 창조이다. 반면에 생각은 인식론이다. 생각은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을 이해하고 믿음과 연결해 준다. 세계의 합리적인 질서와 연결을 만들어준다. 믿음은 신앙의 시작이고 생각은 믿음을 세상과 연결시켜준다. 이것은 함께 해야만 한다.
본 필자가 '메타모더니즘'과 '사이존재'를 연구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믿음과 생각은 연결되어야 한다. 믿음과 합리적 사고가 연결되어 신앙이 발전해 나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며 구원을 얻는다. 또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 신앙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니다. 생각은 신앙의 성장이다.
Spirit영성발견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요한복음17:17,18)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었고 이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성을 받았으나 세속에 속해 있기에 세상의 방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성을 도구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이성을 함께 사용하는 것이 사이존재인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Summary주요구절
아이히만은 자기에게 부과된 임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수행했습니다. 그 결과는 수많은 유대인의 죽음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렌트는 그의 관찰의 두 번째 중요한 점을 드러냅니다. 다름 아니라 악은 "무사고", "생각 없음", 곧 생각 없이 하는 행동(thoughtlessness)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관찰입니다. 43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향해서, 무엇에 대해서, 그것을 대상으로 삼아 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만일 이 '무엇', 다시 말해 그것이 어떤 주장이건 사람이건 문제이건 아니면 어떤 근원적 사태이건 간에, 이 '무엇'이 없이는 생각이라는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행위는 결코 단지 주관적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생각한다는 것은 마음과 세계 사이, 마음과 세계가 이 '사이'공간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71
생각한다는 것도 비록 대상이 다양하고 과정이 복잡하다 하더라도 '생각하는 사람'(a thinker)을 통해서 하나로 통합된 행위로 드러납니다. 74
사물의 '어떠함', '어떻게'에 관심을 두는 것은 교육에 실제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창의적 사고를 위해서는 학문이나 예술, 종교 등에서 이미 활용하고 있는 규칙들에 대한 이해가 우선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학에 대한 훈련이 없는 사람에게 그 분야의 혁신을 기대할 수 없듯이, 예술의 문외한에게 예술 분야의 혁신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창의적 사고는 자신이 관여하는 분야에서 충분히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103
이러한 공동체적 사고 능력은 단지 지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고 어떤 사물과 사태에 대해 미적으로, 심미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임을 칸트는 강조합니다. 남과 더불어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판단 능력은 미적 판단이니 주관성에 머물지 않고 객관성을 소유할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따라서 아름답고 의미 있는 삶의 공동체를 타인과 더불어 만들어 가는 데는 이러한 지적, 미적 공통 지각 능력, 곧 공동체적 사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111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이때 믿음이 우리가 골똘히 생각하고 탐구해서 얻을 결과인가요? 다시 말해, 믿음이 지적 추구의 결과인가요?...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과정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일률적인 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요즘 저의 생각입니다. 166
요한복음 17장 말씀을 통하여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존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세상'과 관련해서 네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2.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3. 우리는 그럼에도 여전히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다.
4. 우리는 이 세상으로 보냄 받았다.
사랑이 그리스도의 생각과 행동의 동기이며 존재 근거이고 존재 목적이듯이,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행동의 동기이며 존재 근거이며 존재 목적입니다. 237
악마 스크루테이프의 논리는 명료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것도, 어떤 다른 것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각각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타자는 자기의 존재에 걸림돌이고 방해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의 관계는 먹느냐, 먹히느냐의 관계입니다.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