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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과 관련된 트라우마 및 자살, 자해 관련 이야기가 나오니 읽기 전에 유의해주기 바랍니다.*
중학교 1학년 때의 나는 생각보다 더 바보 같았다.
낯선 곳에 혼자 있기가 싫어서 6학년 때 날 싫어했던 여자애 무리들 중 한 명,
그것도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그 아이와 가장 친했으며 은근히 날 따돌리는데 따랐던
그 여자아이와 친하게 지냈으니까.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내게 다가와준 C라는 아이가 너무나도 좋아서 그 애의 말이라면 다 따랐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시작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C는 내게 그 아이처럼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중학생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어린 나이였던 우리들이었기에
서로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도 여럿 있었을 것이다.
그럴 때,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풀고, 함께 맞춰나가며 사회성을 기르겠지만
내게는 애초에 사회성 자체가 없던 탓일까, 난 모두의 입맛에 맞춰 웃어주었다.
두꺼운 가면을 쓰고, 나를 숨겼다.
하나둘씩 친해진 아이들에게 나는 잠자코 그들의 말대로 해주었다.
그래도 그냥저냥 시간을 보내는 듯싶었다.
남들과 엇비슷하게라도 학창 시절을 갖게 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내 속은 이미 썩을 대로 썩어가고 있었지만 난 모른 체했다.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웃었고, 남들의 험담도 이제는 익숙해져 안 들리는 척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기억 상으로는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밤 12시 즈음에 뒤늦게 자려고 누웠는데, 선잠이 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톡 알람음이 계속해서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C를 통해 친해진 D라는 아이였다.
D에게는 약간의 콤플렉스가 있었다. 물론 나와 C,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그건 전혀 거리낌 없었다.
외적으로 다른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평소에 콤플렉스에 찌들어 살던 D는 그 늦은 밤에 연락을 해왔다.
그것도 온통 나는 물론이고, 같은 무리에 있는 다른 아이들을 향한 날 선 말들이었다.
대부분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하는 말들이었고, 난 일단 D를 달랬다.
그러면서 내가 다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사실상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음에도 난 D가 자신이 다른 이들로부터 얻은 상처를
모두 내 탓이라고 전가했다.
그걸 난 또 다 흡수하며 친구를 잃을까 봐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었다.
결국 그날은 한숨도 못 잔 채 학교를 가야만 했다.
그런데 어이가 없던 건, 학교에서 보여준 D의 모습이었다.
내가 좀 괜찮아졌냐고 묻자 D는 어제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냐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내가 계속 캐물으니까 그제야 자신이 학원 선생님께 보낼 것을 잘못 보낸 것이라고 뻔뻔하게 대꾸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러냐며 그냥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고, 난 그런 말도 한 적이 없고, 난 정말로 너를 친구로 보고 아껴왔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고, 내가 왜 그렇게도 미웠냐고 묻고 싶었다.
객관적으로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으며 문제도 없었는데
그런 연락들로 나를 밤새 죄책감에 떨게 만들어놓고, 또다시 친구를 잃을까 봐 날 울게 만들어놓고
잘못 보낸 것이라 얼버무리는 그 미소가 싫었다.
사과도 없었다.
그래도 난 묵묵히 참고 넘어갔다.
나만 참으면 그럭저럭 그대로 친구 사이는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 난 D의 눈치를 보게 되었고, 그것 말고는 그나마 어영부영 평탄한 2학년이 흘러갔다.
photograph by Luie
문제는 그다음 해였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던 시기, 난 홀로 다른 반에 떨어지고 말았다.
다른 친구들은 두 명씩이라도 짝지어져서 같은 반이 되었는데, 난 혼자 3반이었다.
이미 3년 내내 같이 지내며 친해질 애들은 다 친해진 뒤였다.
특히나 여자애들이라면 더더욱. 그게 여자애들의 세계였다.
난 그 탓에 반에서 낄 만한 무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조금 친해지고 싶었던 아이는 있었다. 그러나 나에 비해 훨씬 활달하고, 재능도 많아서
늘 주위에 사람들이 북적였다.
그리고 난 용기 내어 그 무리에 조금씩 비집고 들어가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옆 반을 찾아가서 원래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과 있는다 하더라도 반에서 보내는 시간과
조별 활동을 위해서라도 반에서도 친한 아이들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나름의 생존 전략이었다.
내가 친해지고 싶어 했던 아이는 굉장히 착한 아이였다.
나중에 내가 내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손목을 그었을 때, 밴드가 덕지덕지 붙은 손목을 보고
날 위해서 울어주었던 아이였을 정도로.
하지만 그때의 나는 이미 지쳐가고 있던 것일 지도 모른다.
실제 나와는 전혀 다른 페르소나를 연기해야만 했던 나는
진짜 나는 잃어가는 와중에 속에선 피고름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게 다가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쉽게 사람에게 다가갔다가 이 아이에게도 똑같이 연기를 하면서
나 스스로가 더 아플까 봐 차마 다가오도록 두지 못했다.
선을 긋고, 난 그 뒤로 한 발자국씩 더 피했다.
당연히 그걸 모를 리가 없었지만, 내게 계속 다가와주었다.
덕분에 같은 무리에서 어정쩡하게 있기는 했지만, 그 속의 다른 아이들은 나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듯했다.
특히 서너 명 정도는 대놓고 내가 싫은 기색을 내며 돌려서 깎아내렸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와중에 끝내 나는 휘청거렸고, 주저앉았다.
난 직접 학교에 있던 wee 클래스를 한 번 더 찾아갔고, 상담을 요청했다.
첫 상담 때, 상담 선생님은 굉장히 놀라셨다고 한다.
늘 그곳에 점심시간이면 친구들과 가서 활기차고 밝은 모습으로 노는 데다가 어른들에게 잘 대하는 내 모습을 봐오셨기에 내가 상담을 신청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 하셨다고 말이다.
심지어 깊은 상담을 위한 심리 검사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단다.
살아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정도의 우울감, 불안감 등
안 좋은 부분은 모두 수치가 만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미 난 내 손목이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한 후였기에 상담 선생님은 더욱 놀라시며 차분히 나를 설득하셨다.
상담 내용은 당연히 말하지 않겠지만 내 상태가 상태였다 보니까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께
이걸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가 처음으로 우리 가족들이 나의 상태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게 된 시점이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3학년 1학기 초에 인터넷에서 간이 검사를 해봤는데,
상태가 심각하게 나왔다며 엄마께 힘들다는 걸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인터넷에서 한 걸 어떻게 믿냐며 가볍게 넘겼다.
괜히 또 학교 가기 귀찮다고 그러는 거냐고.
그 말을 들을 때, 몇 년 전이던 초등학교 6학년, 그 일이 있고 난 직후에 서운했던 게 떠올랐다.
우리 엄마의 학원에는 A가 다니고 있었는데, 나와의 일이 있기 전에 그만둔 상태였지만
A의 오빠는 그렇지 않았다.
나와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계속해서 A의 오빠를 학원을 다니도록 하는 A의 어머니를 보고
우리 엄마는 그런 일로 그만두게 하지 않으니 얼마나 감사하냐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속상했다.
마치 내가 A의 부모님께 우리 엄마가 책 잡힐 만한 원인을 제공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몇 년 후, 힘들다는 것을 알리는 전화를 건 내게
수업 중이라며 바쁘니 끊으라는 말까지 덧붙이던 우리 엄마.
학교 측에서 연락을 받고 난 후, 나와 처음으로 작은 개인 병원에서
대학병원에 가서 입원을 해야 한다고 조언하던 의사의 말을 듣다가 처음으로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우리 엄마.
난 그 옆에서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내 전화 너머로 대답해 주던 엄마가 아마 그랬을 것처럼
아무 표정 없이 엄마를 쳐다보기만 했다.
정말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전부였을 뿐이다.
그때부터 난 단 하루도 그 생각을 놓은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