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리뷰, 스포 있음.
애스터로이드 시티.
웨스 앤더슨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는 무엇일까. 문득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집중하지 못하고 뜨엄뜨엄 보면서 생각해보았다.(영화가 별로여서가 아니라 내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결국 스타일이고 형식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조차도 아닌 듯 하다. 그린버그는 본인의 형식주의의 예로 마크 로스코를 들었지만 정작 로스코의 그림은 깊고 숭고한 감정을 추구하지 않았는가. 웨스 앤더슨의 영화의 특별하고 탁월하고 그 자체로 상징이 되어버린 형식미에 집착해 본질을 놓치고 있는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그의 최고작인)프렌치 디스패치 이후 이 영화까지 보고나니 드는 생각은 결국 그는 삶에 대해서 그리고 영화에 대해서 표현하는 작가라는 것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극중극이다. 연극이 있고 그 제작을 찍은 티비쇼가 있다. 액자구조고 웨스 앤더슨은 현시대 이 구조를 대표하는 작가다. 이 구조의 핵심은 화자의 존재다. 누군가는 이야기를 나른다. 프렌치 디스패치에서 편집장의 죽음은 흑백이지만 그를 기억하는 기자들의 대화는 컬러였다. 웨스 앤더슨이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을 전하는 형식이다.
이런 면에서 웨스 앤더슨의 트레이드마크를 되돌아보자. 정면얼굴샷과 수직적인 측면얼굴샷, 달리와 트래킹. 강박적인 대칭과 환상적인 색감과 프레임과 프레임이 겹치는 구성. 평면성. 이 양식들이 전하는 핵심 중 하나는 인공성이다.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영화임을 숨기지 않는다. 잠들지 않으면 깰 수 없다고 말했는가. 그의 영화는 일종의 자각몽이다.
프렌치 디스패치와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공통된 특징은 일반적인 특징과 배치되게 흑백과 컬러를 쓴다는 사실이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사건이 아닌 사건을 전하는 형식을 컬러로담았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현실을 흑백으로 연극을 컬러로담았다. 더 신기한 부분은 연극은 매우 영화적인 양식들을 적극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숏/리버스숏과 분할화면, 트래킹숏과 클로즈업, 부감 등등. 오히려 연극적인 분위기는 흑백으로 된 후일담에 나온다. 이런 뒤바뀜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나는 언젠가 위대한 예술은 바다와 땅 사이의 해변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삶 안에 있으면 삶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허구와삶 사이에 있게 해서 삶을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국 애스터로이드 시티 역시 삶과 허구 사이의 경계에 관객들을 끌고 간다.
웨스 앤더슨의 핵심정서 중 하나가 향수이기 때문에 그리고 늘 상실이 주된 이야기였기에 흔히들 하는 오해는 그가 과거에 천착하는 예술가라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아니다.
웨스 앤더슨의 최근 영화서사는 액자구조에 대한 집중을 보여준다. 액자구조에서 중요한 특징은 청자와 화자의 존재다. 화자가 청자에게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 프렌치 디스패치에서도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도 웨스 앤더슨은 과거와 잃어버린 낙원을 아름답게 생각하고 집착하는 소년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과거를 낙원을 기억하고 바라보고 간직하며 전하는 방식을 아름답다고 믿는 예술가이다. 그가 진정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이다.
동시에 그의 영화에는 화자와 청자 간의, 혹은 인물들 간의 묘한 연대가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어기와 장인어른 사이의 대화를 보자. 분할화면으로 역시 정면 숏과 측면 숏에 담긴 그들은 당연히 어색하고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 듯 하다.
분할화면이기에 그들은 각각 분리된 프레임에 있고 위치한 공간도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한 화면에 존재하지 않는가.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들은 미치와 어기의 창을 사이에둔 대화장면이다. 오버 더 숄더 숏을 제한하고 창과 사진 등으로 이중 프레임으로 액자구조를 시각화한 대화장면들에서 미치와 어기는 같은 화면에 없다.(유일하게 내용 상 같이 있던 장면은 생략되어 있는 수준이다.) 그들의 연대를 그릴 때도 웨스 앤더슨의 카메라는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최선의 연대라고 믿는 듯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영화와 삶의 관계는 이것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영화의 인물들은 의미를 묻는다. 반복되는 대사들은 의미를 찾는다. 결국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배우가 말그대로 연극에서 현실로 튀어나와 작가에게 묻는 장면이다. 답을 얻었는가?하면 당연히 아니다. 그럼에도 에필로그서 연극은 계속되었다. 결국 삶은 이해하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심장한 부분은 어기를 연기한 배우가 제 4의 벽을 깨고 말하는 장면이다. 이 때 어기는 독특하게 카메라로부터 멀어진다. 이 움직임은 바로 후에 죽은 아내 역을 맡은 배우와 대화하러 갈 때 재현된다. 이 대화는 묘한데 연극에서는 편집되었지만 가장 중요해보인다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삶의 의미는삶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기/존스가 실존을 찾는 결정적인 움직임이 카메라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은 이를 표현한다. 삶의 의미는 지금 여기서 찾을 수 없다.
죽은 아내 역의 배우와 존스가 대화할 때 웨스 앤더슨은 늘 하는 달리가 아닌 극작스러운 컷(30도 규칙 등 일반적인 편집규칙을 어긴)으로 클로즈업을 한다. 그 때 존스/어기는 이 대사를 한다. 내 사진은 다 잘 나와.
사진은 시선이고 전달이다. 우리가 삶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바라보고 연대하고 전한다면.
잠들지 못하면 깨어날 수 없다. 여기서 잠은 명백히 연극이고 예술이다. 예술은 우리를 깨어날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잠들게 한다. 영화는 수미상관 구조를 보인다. 오프닝에서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들어가는 수평트래킹숏도 동선이 엔딩에서는 반대다. 깨어나기 위해 잠들었으니 이제 깨어나서 살아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