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여운 것들
가여운 것들에 대해서 딱히 쓰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지난주에 술마신 친구가 본인 동기와 의견이 갈렸다는 얘기를
해서 간단히라도 서술할까 한다. 쓰는 김에 파묘, 듄 까지. .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의 핵심주제는 시스템과 개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의 질서와 개인이다. 송곳니, 더 랍스터 두 편을 생각하면 이 두 편의 영화는 명확히 그 질서를 설정으로 규정하고 있다. 킬링 디어에서는? 마틴이 곧 질서 그 자체이다. 오프닝을 신체의 질서인 심장으로 시작하고 엔딩을 마틴의 얼굴로 끝맺음하는 것은 거기서 연유한다. 더 페이버릿 역시 기본골자는 세 여인의 갈등이지만 그 기본바탕은 권력(혹은 사랑)이라는 질서지 않은가. 그랬던 그가 가여운 것들이라는 텍스트를 택했다.
기본적인 이야기는 프랑켄슈타인과 인형의 집을 이종교배시킨 듯하다. 말그대로 어린 어른인 벨라는 마치 공상단 선언을 독파한 대학생마냥 세상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자유를 탐한다. 핵심은 얽매임이다. 벨라는 런던의 집이든, 혹은 던컨과의 여행이든 질서에 속박되어 있다. 그렇게 벨라는 그런 질서를 무시하고 깨부순 후 본인의 거처를 마련한다.
가장 먼저 연상된 영화는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이였다.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미술적 측면이라는 사실, 때때로 과시적이라고도 보여지는 화면까지. 이 두 영화의 연결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중 눈길을 잡아끄는 요인은 광각렌즈의 사용이다. 테리 길리엄은 그 특징적인 광각렌즈 활용으로 유명하며 아마 요근래의 거장들 중 광각의 용례를 갱신하고 있는 감독은 요르고스 란티모스일터다. 더 페이버릿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구사한, 광각을 핵심으로 하는 연출은 명백히 영화적 핵심을 궤뚫는다. 가여운 것들에서 사용한 광각,어안렌즈는 무엇을 겨냥했을까. 먼저 주목하고 싶은 포인트는 왜곡이다. 특유의 극단적인 광각이 주는 왜곡은 관객을 영화와 거리를 두게 만든다. 예컨데 몰입보다는 관찰을 유도하는 말이다. 이런 미묘한 거리감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연출의 시작점이다. 그의 영화를 부조리극과 연결시키는이유도 여기에 있으리라고 추측한다. 종종 어안에 가까운 렌즈사용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광각을 사용하는 또다른 이유는 광각은 세상을 넓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벨라의 세상견문의 서사를 취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넓은 화각으로 배경을 강조하는 광각은 분명히 어울리는 선택이다. 전반적인 연출력에서 영화는 크게 흠잡을 부분 없이 훌륭하다. 다만 내 마음에 걸리는 요소는 리듬이다. 리듬이라는, 모호한 단어는 이도저도 아닌 트집임을 알고 내가 그 미묘한 리듬을 안다고 착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종장에 치닫을 수록 영화의 리듬이 느릿해지고 지루해지며 밀도를 상실해가고 있다고 보였다.
추신: 영화에서 벨라가 경유하고 있는 공간들은 다섯 가지이다. 고드윈의 집, 던컨과의 여행, 여객선, 사창가. 그리고 이 여행을 주파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벨라의 욕망과 호기심이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욕망을 거치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경유한 다음 본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끝난다. 벨라가 그 여정서 만나는 인간관계는 각각 벨라에게 무언가를 전한다. 맥스는 연대를, 던컨은 욕망과 그에 따른 구속을, 여객선에서는 영혼을, 사창가에서는 세상의 이면을, 런던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엿본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감동적이게 다가온 관계는 고드윈이다. 그가 런던으로 귀환한 후 벨라는 죽음과 동시에 본인탄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고드윈은 천재과학자이며 미치광이고 사랑받지 못한 피실험체이다. 그가 실험하는 주체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이런 이중의 정체성을 반영하듯이 집에는 이종교배된 생물체들이 넘친다. 정체성의 문제가 그와 벨라를 휘감는다. 하지만 영화에서 무엇보다 그는 아버지이다. 뒤틀리고 마냥 좋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그는 아버지다. 벨라와 재회하는 장면의 묘한 노랑색 빛은 안온하게 이 특이한 부녀를 축복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자아의 문제. 사회구조의 문제. 정치적 이슈 등등 여러 요소들을 생각하게 만들지만 그저 지적하는 수준이지 깊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벨라로의 삶을 선택하는 결말에 이르면 나로서는 믿기지 않을 감동을 받는다. 그 집에는 아웃사이더들이 집결해있고 그 말은 말그대로 그들은 하나하나 빛나는 개인들이다. 어머니 몸에 태어난 딸은 그저 개인의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이 영화는 요르고스의 동화이며 시스템을 이겨낸 개개인의 생의 찬가이다.
듄 2는 내 친구들이 거의 다들 즐겼고 반응들 보니 다들 칭찬으로 넘치던데 나도 좋았다. 이 갑독의 특색이나 뭐 이런 거는 듄 1편 글 쓰면서 대강 열거해서 딱히 더 추가하고 싶지는 않다. 여러모로 위엄가득한 영화로 완성된 느낌이다. 드니 빌뇌브 연출적 장점이 물씬 풍기는 대작으로 완성된 느낌이다. 연출적으로 주특기인 느린 리듬, 강렬하고 웅장한 롱숏과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완성형의 그것이기에 딱히 언급할 주제는 아닌 듯 싶다.
인상깊었던 포인트는 아웃포커스이다. 멀리서 모래벌레를 이끌고 오는 쇼트와 승리 후 챠니의 시점에서 본 폴의 모습까지 이 아웃포커스의 희미함은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된 폴 아트레데이스의 모습을 효율적으로 시각화한다. 그 외에도 페이드 로타와 폴의 대결에서 그들 둘의 실루엣으로만 표현해 그들 둘이 가지는 본질적인 동일함을 강조하는 부분은 좋았다. 전반적으로 말끔하게 주제와 하고픈 말을 이미지로 선연하게 드러낸 작품이여서 덧붙일 말은 딱히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