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국 생활 20년

돌아보니, 나는 이렇게 여기까지 왔다

by MT

6월이면 미국에 온 지 딱 20년이 된다.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된 걸까. 가물한 게 더 흐릿해지기 전에, 오래된 기억을 거슬러 본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특급 호텔의 브랜딩과 패키지 디자인이 주 업무인 충무로에 있는 작은 디자인 회사에 입사했다. 어느 날, 클라이언트였던 하얏트 호텔의 델리 프로젝트를 맡고 있던 디자이너 로페스 씨가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우리는 그를 남대문 시장과 인사동으로 안내하며, 한국의 살아 있는 풍경을 보여주고 한식도 대접했다. 그저 평범한 작은 경험일 수도 있었지만, 영어를 잘하고 싶은 갈망과 함께 ‘저 사람처럼 디자인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생겼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날이 나의 ‘미국병’을 앓기 시작한 계기였던 것 같다.


이후 옮긴 회사는 미국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한국에서 자신의 비지니스를 시작한 광고 회사였다. 운 좋게 합류하게 되었고, 3년 동안 글로벌 광고 일을 배우며 자연스럽게 영어도 늘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새로 오픈한 특급 호텔의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일하게 됐다. 대학 시절 이후로 가장 행복했던, 6년간의 호텔 생활(?)이었다. 호텔을 둘러보며 내가 디자인한 업장 메뉴판, 로비 사인, 케이크 박스, 심지어는 냅킨 조각까지 호텔 여기저기에서 마주칠 때의 감격은 몸까지 짜릿하게 만들었다. 회사 동료들 중 몇 명은 지금까지도 연락을 이어가는 인생 친구가 됐다. 그 누가 일요일 저녁이면, ‘내일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된다’는 생각에 설레할까? 그때 나는 정말 그랬다.


하지만 솰라 솰라햐며 외국인들과 일하고 싶었고 미국, 특히 뉴욕에서 디자인을 배우고 싶다는 갈증은 점점 커져갔고, 결국 2006년 6월, 이민 가방 하나와 배낭을 메고 미국으로 왔다. 자식을 유학 보내야 할 나이에, 나는 연고 하나 없는 이곳으로 왔다. 한국을 떠나며 “미국 땅에 뼈를 묻겠다”라고 농담 섞인, 그러나 내심 그러고 싶다는 희망으로 선언하고 왔지만, 이렇게 십년 살이를 두 번이나 하게 될 줄은, 그게 가능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디자인 대학원에서는 대부분 나보다 띠동갑 어린 친구들이었지만, 나는 그들처럼 젊게 열정적으로 놀고 공부했다. 함께 어려움을 나누며 뉴욕을 즐겼고, 공부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 너무 놀았다는 후회를 만회하듯, 하루 24시간을 한 시간처럼 1초도 낭비 없이 열심히 공부했다. 동시에 학교 컴퓨터실에서, 허용된 최대 주 20시간을 꽉 채워 일했다. 랩실 문을 열고 닫고, 프린터 종이를 갈아 끼우는 일이 주 업무였지만...


그러다 학교를 졸업한 그 해, 미국 금융위기가 터져 현지인들조차 대량 해고에 취업문은 굳게 닫혔다. 유학생들은 하나둘 고국으로 돌아갔고, 나 역시 그랬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왜 그렇게 혼자 힘들고 외롭게 버텼는지 잘 모르겠다. ‘여기다 뼈를 묻겠다’고 했던 말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안 되면 다른 길을 찾는 것도 충분히 좋은 선택이었을 텐데 말이다.


절망과 외로움에 울지 않은 날이 없었다. “이러려고 그렇게 어렵게 돈을 모아 유학을 왔나”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아무의 도움 없이, 엄마 맛있는 거 제대로 사드리지도 않으며 10년 동안 유학비를 모은 거였다.


매일 구직 사이트를 뒤지고 이력서를 넣고, 연락을 기다리고, 면접을 보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누군가는 이력서를 100군데 넣고 포기했다고 했지만, 나는 아마 그 열 배는 더 넣었을 것이다. 창피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인터뷰를 160번쯤 봤다. 그래도 그렇게 두드리고 또 두드려도 두드릴 문이 계속 있는 뉴욕은 진정 기회의 땅이라 생각한다. 삼성 로고를 디자인한 리핀코트(Lippincott), 첼시 마켓에 사무실이 있는 Google, I Love NY 로고로 유명한 밀튼 글레이저 (Milton Glaser), 세계 최대 화장품 회사 로레알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회사 건물은 한 번씩은 다 들어가 본 것 같다.


1년 넘는 시간 동안 여기저기서 프리랜서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갔다. 아는 동생과 스타벅스에 가면 커피 하나를 시키고, 무료로 주는 뜨거운 물과 반씩 섞어 마시며 커피값도 아꼈다. 그러다 2010년, 비교적 장기간 프리랜서로 일할 기회를 얻었고, 2012년에는 바자, 에스콰이어, 엘르 매거진을 발행하는 대형 미디어 그룹인 허스트에 정직원으로 채용됐다. 센트럴 파크 옆, 세계적인 건축가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의 작품인 허스트 타워로 출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일이 감격스러웠다.


그 이후 몇 차례 회사를 옮기고, 현재는 어린이 책과 교사용 가이드북을 디자인하는 회사에서 8년째 일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10년의 경력이 있어, 언젠가는 한국과 미국의 직장 문화를 비교하는 이야기도 쓰고자 한다.


지금 내 직위가 높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이었다면, 특히 디자인 업계에서 여자로 이 나이까지 현업에 남아 일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미 은퇴를 했을 나이다. 이곳에서는 나이를 묻는 사람도, 설사 나이가 많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면 그만이다. 존칭과 직함이 없이 나 아니면 ‘You’다. 지금은 내 은퇴 연금만 차곡차곡 쌓으며, 얇고 길게 일하고 있다.


20년이 흘러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수모와 눈물, 좌절, 그리고 묘한 성취감이 뒤섞여 있다. 지난 시간 동안 마음에만 담아 두어 덩어리 진 이야기들을 이제는 하나둘 풀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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