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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이온 Oct 23. 2021

장 폴 사르트르와 한국 민주주의

사르트르의 참여 문학론과 김지하 시인 구명운동을 중심으로

1. 서론 - 장 폴 사르트르의 한국 민주화 재평가

필자가 중간고사 기간임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대중들에게 유명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참여 문학론을 소개함과 동시에 거의 반세기 가량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당하게 저평가받아온 그의 한국 민주화를 둘러싼 영향력을 재평가하기 위함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명실공히 다양한 방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실존주의 이론은 아직도 실존주의의 바이블로 인용되고 있으며, 후설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상상력>, <상상계> 등의 책은 미학과 문학이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역시 사르트르 하면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미지는 그가 가지고 있던 특유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회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특히 그가 남긴 또 다른 유명한 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사르트르가 가지고 있던 문학이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데, 문학작품, 좀 더 확장을 시켜보자면 언어 표현이 사회를 움직이는데 발휘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영향력과 작가들의 사회 참여적 의무를 강조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사르트르의 적극적인 사회참여운동과 문학이론은 그 스스로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념인 공산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젊을 시절 투신했던 반 나치 레지스탕스 운동과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저술활동도 그의 강렬한 공산주의적 색채를 빼놓고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듯 사르트르가 가지고 있는 다방면의 영향력에도 한국사회가 타 국가들과 달리 사르트르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는 않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아마도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던 뿌리 깊은 레드 콤플렉스와 사르트르가 불필요하게 고집부리며 고수했던 역사인식 "남한 북침설"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웬 공산주의 철학자가 남한이 북한을 침략했다고 하는 허황된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보통의 남한 사람들이라면 사르트르에 대해서 고운 시선을 보내기는 힘들었으리라.

 필자도 사르트르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한계점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역사적인 이유에서든 이념적 문제에서든 북침설을 진지하게 고찰할 필요조차 없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르트르의 북침설이 한국인에게 풍기고 있는 부정적인 아우라가 사르트르의 남한의 민주화에 끼친 영향력과 의의를 지나치게 가리고 저평가해왔다는 점은 반드시 지적할 필요가 있다. 미리 강조하건대, 장 폴 사르트르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철학적 신념에 따라 한국의 문학을 대단히 높게 평가했던 철학자였으며, 실명한 노구를 이끌고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짧은 수명조차 모조리 불사를 정도로 한국의 민주화에 큰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2. 사르트르의 한국 민주주의 기여

(1) 연구의 시작

 필자가 처음 사르트르를 접하고 진지하게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달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르트르에게 진지한 관심을 두고 공부하면 할수록 사르트르가 우리나라 민주화에 끼친 영향력이 아예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명백해졌으며 누군가는 이를 강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내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우리나라 민주화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이름 높은 예술인 김지하 시인과 몇 다리 걸친 인연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었다. 그분과 성경을 공부할 적에 문득 사르트르를 공부하고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분은 김지하 시인과 사르트르의 인연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해주시는 게 아닌가? 그 내용이란, 사르트르가 여타 세계 지식인들과 힘을 합쳐 김지하 시인 구명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었으며, 실제로 당시 서슬 퍼렇던 유신정권 치하의 사법부에 압박을 가해 김지하 시인이 사형을 집행당하는 것을 막아냈다는 이야기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이를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처럼 흘려듣고 있었다. 하지만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르트르는 북침설을 주장했을 정도로 남한에 비호감을 가지고 있던 철학자였다는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선입견이 떠올라 사르트르의 김지하 구명운동, 유신정권 규탄운동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사르트르는 유명한 러셀 재판

[1]

에서 러셀과 함께 한국 정부를 부도덕한 전쟁을 앞장서서 수행한 국가로 강도 높게 비난했던 적도 있었다

이렇듯 나의 얄팍한 상식선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르트르가 남한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편견을 지울 수 없었다

.

 그래서 나는 단순한 호기심에 이끌려 사르트르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사르트르의 일대기나 개인사를 정리한 자료를 찾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다. 국내 사르트르 연구라고 해봐야 대부분 사르트르 철학을 정리한 책이거나 논평문이었을 뿐 사르트르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연구자료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남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사르트르라는 인간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탓이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외국 논문이나 자료들까지 찾아볼 수밖에 없었는데, 자료를 모으면 모을수록 사르트르에 대한 선입견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련의 자료들을 검토해본 결과, 사르트르는 사실 "한국"자체를 혐오했던 게 아니라, 제3세계에서 약자와 지식인들을 탄압하면서도 국익과 정권유지를 위해 약소국 침략까지 서슴지 않았던 "한국 독재정권"을 혐오했던 것이라는 결론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사르트르가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태도는 현대 한국의 지식인들이 미얀마 군부독재정권의 지식인 탄압과 약소민족의 권리 침해를 비난하고 미얀마의 민주화를 기원하는 모습과 비슷했던 것 같다.


 (2) Korean (Military) Government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는데 참고한 몇 가지 논거들을 소개해보겠다. 우선 사르트르가 저술한 그의 여러 글이나 러셀 재판에서 합의한 문헌들을 참고해보자면, 사르트르의 비난 대상은 언제나 "Korea"가 아니라 "Korean Government"라거나 "Korean Military Government"라는 식으로 명시되어 있다. 다시 말해 사르트르는 단 한 번도 한국 자체를 비난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한국을 비난할 적에는 언제나 그의 비난 대상이 한국 정부 혹은 한국 군사정권이라고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가 북침설이라는 옹고집을 부리던 것도 사실 이승만 독재정권(민중을 괴롭히고 평화를 교란하는 빈곤한 제3세계 독재자들에 대한 비판의 논조)에 대한 비난적 논조가 결합하여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북침설 자체는 명백한 낭설이지만 그가 비판했던 대상이 한국이나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 독재정권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강조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째서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사르트르가 한국 자체를 싫어했다거나 남한에 대해 비난해왔다는 식으로 오해하게 됐을까? 아마 사르트르가 가지고 있던 공산주의자 딱지와 북침설 논란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사르트르의 목소리에 집중하는데 방해하는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끔찍이도 싫어하는 공산주의자가 남한이 북한을 침공했다는 낭설을 믿고 있었는데, 그가 남한 독재정권을 비판했다는 말은 남한 자체를 비판했다는 말로 충분히 와전되어 오해되었을 수 있다. 


 (3) 한국 민주화운동 참여

 다음 논거는 뭐니 뭐니 해도 우리나라 유명 시인인 김지하 시인 구명운동을 통해 한국 민주화에 이바지했다는 점이다. 장 폴 사르트르의 김지하 구명운동은 몇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첫째는 전 세계 지식인들과 연대해서 유신정권 사법부를 압박하는 방법이었다. 여기에는 노암 촘스키나 일본의 여러 문필가도 가세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둘째는 이 글의 간판 주제이기도 한 김지하 저항시 소개이다. 사르트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본인 인생의 업이기도 했던 <현대(Les Temps Modernes)>지

[2]


를 창간하고 전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는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사회 참여적인 글을 쓰기 시작한다

. <

현대

>

지에는 매달 적게는

 100

페이지에서 많게는

 300

페이지에 달하는 글이 발행됐다

.

 여기에서 강조할 점은 사르트르가 그의 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도 강조했다시피 시를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어 매체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가 사회참여적 잡지였던 <현대> 지를 운영하는데 적용한 몇 가지 철학 중 하나이기도 했기 때문에 "<현대>지에는 시가 아니라 산문만을 싣겠다"는 일종의 결의 또는 선언으로도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사르트르는 시는 추상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에 시를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 인정했다가는 온갖 글들이 <현대>지에 잡다하게 발행될 수 있는 혼란을 유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운영했던 <현대>지에는 처음 발간된 1945년부터 연재가 끝나는 2019년까지 시가 전혀 실리지 않았었다. "단 하나"의 예외였던 김지하 시인의 저항시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사실 단 하나는 아니고 총 일곱 작품이 예외로서 <현대>지 1975년 8-9월호에 공식적으로 등재되었는데, 그 일곱 작품 모두 김지하 시인의 작품이었다

[3]

말하자면 사르트르는 김지하 시인의 저항시를 자신의 철학적 고집을 꺾을 정도로 인상 깊게 감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사르트르가 철학자로서 가지고 있던 고집은 전 세계적으로도 대단히 유명하다.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보자면 그의 평생의 사상적 동지였던 알베르 카뮈와 벌인 알제리 독립전쟁 지원 논쟁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가 고향이었던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 독립전쟁을 지원해봤자 전쟁만 일어나 민중의 삶이 피폐해질 테니 차라리 프랑스가 알제리에 일종의 자치권을 보장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일종의 타협설을 주장했다. 자신의 고향이 프랑스와 분리된 타국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그의 "이방인"적 성격이 잘 드러나는 사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식민지배가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끔찍한 범죄였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스스로 프랑스인이었음에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독립전쟁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사비까지 지출해 무기를 지원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카뮈와 사르트르는 알제리 독립전쟁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으며 결국 평생의 철학적 친구였으며 지적 동지였던 둘은 서로의 생각을 전혀 양보하지 않고 결별을 선언한다.

 사르트르의 철학적 고집이 드러나는 또 다른 사례는 위에서도 구구절절이 소개한 북침설(...) 논란이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르트르는 본인이 한번 옳다고 믿는 것은 비록 그것을 반박하는 자료가 제시되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고집을 피우는 답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르트르 스스로 자신의 철학적 고집을 내려놓고 승복한 사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시는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부적절하다는 그 스스로의 철학이었으며, 그것을 비판할 수 있었던 작품은 다름이 아니라 한국의 시인이었던 김지하가 만든 <오적>이라는 작품이었다. 한국 전통의 판소리에서 영감을 받아 담시의 형식으로 저술된 <오적>이라는 시는 비록 시임에도 사회를 비판하는 매체의 역할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르트르는 스스로가 <현대> 지를 발간할 때 가지고 있던 원칙이자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도 강조했던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타협하고 <현대>지에 최초이자 유일하게 김지하 시인의 시들을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김지하 시인의 저항시는 사르트르가 스스로 <현대>지에 소개했던 유일무이한 저항 시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도 얻게 됐다.

 여기서 몇 가지 더 강조할 사항이 있다. 사르트르가 김지하 시인의 <오적>에 대해 가지고 있던 애정은 상당히 남달랐던 것 같다. 사르트르가 접한 <오적>은 한번 일본어로 번역된 판본을 다시 한번 불어로 번역된, 쉽게 말하면 중역본이었다. 당시 을씨년스럽던 한국에서 <오적> 원본을 구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으므로 어쩔 수 없이 택했던 대안이었으리라. 하지만 사르트르는 이러한 중역본을 프랑스 대중에게 소개하는 것이 대단히 불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김지하 시인의 동문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당시 프랑스 파리 주재 특파원 기자셨던 주섭일 기자께 자신의 이름과 부인인 유명 여성주의 운동가이자 문필가였던 보부아르의 이름을 모두 걸고 미셸 콩타를 특파원으로 파견해 <오적>에 대한 자세한 해설까지 얻어갔다. 정리하자면, 사르트르가 <현대>지에 <오적>을 비롯한 여러 시를 싣는 과정은 1) 중역본 수입 2) 김지하 시인의 지인이자 불어에 능한 프랑스 주재 기자 물색 3) 특파원을 파견하여 <오적>의 해석 입수였다고 할 수 있다. 사르트르 스스로 김지하 시인의 작품에 대해 큰 관심이 있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공들인 작업을 할 수 있었을까.


 (4) 실명한 노구를 불사른 유신정권 규탄과 김지하 구명

또한, 이러한 작업이 당시 불편했던 사르트르의 신체적 여건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본다면 사르트르가 김지하 시인과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가졌던 애정이 한층 돋보이리라 생각한다. 그의 김지하 구명운동과 한국 유신정권 규탄은 1975년에서야 시작되지만, 이미 그는 1973년에 69세의 나이로 공식적으로 실명한 상태였다. 사르트르의 가장 큰 신체적 특징 중 하나는 역시 사시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그는 10대 초반의 나이일 때 극심한 독감에 걸려 한쪽 안구의 시력을 거의 상실했다고 한다. 그런데 매달 <현대>지에 100~300페이지에 달하는 대량의 글을 발행하면서도 그의 필생의 철학적 숙제였던 <윤리학>을 저술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에 연대하는 활동까지 줄기차게 수행했던 것이다. 그렇게 태생이 병약했던 신체를 이끌고 과로를 일삼았으니 노쇠한 몸이 버틸 재간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렇게 그는 만성적인 고혈압에 시달렸고, 1973년 69세의 나이에 거의 실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 여기에는 사르트르의 고집 중 하나였던 악명 높은 흡연량도 이바지했다고 한다.

 여기서 사르트르의 <윤리학>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해보자면, <윤리학>은 사르트르 필생의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독특하게도 여타 실존주의자들과는 달리 소위 말하는 "실존주의 윤리학"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강연 록에서도 줄곧 등장하는데, 사르트르는 궁극적으로 실존주의가 윤리학의 형태로 완성되어야 현대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음과 동시에 철학자들이 실존주의를 좀 더 진지하게 수용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1973년에 69세의 나이로 실명하고 그의 신체건강이 급속도로 약화되기 시작했으니 사르트르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7년 뒤인 1980년에 사망한다.

 실제로 그는 실명한 뒤에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생각을 레코드판으로 말해서 녹음하면 동료들이 그 레코드판을 재생해서 글로 작성하는 식으로 <윤리학>을 저술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쥐어짜 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때 한국에서 자신의 최후의 수명과 열정을 불사를, 또한 자신의 철학적 고집까지 뒤흔들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975년에 김지하 시인이 <오적>이라는 시를 발표하고 유신독재정권에 의해 사형을 집행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자신의 귀에 들어온 것이다.

 여러분들 같으면 어찌하겠는가? 죽기 전까지 반드시 완성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한 필생의 과업에 집중하겠는가? 아니면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약소 빈민국이었던 한국의 어떤 시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남은 열정을 모두 가져다 바치겠는가?

 그는 평생 삶의 경험과 학식을 그야말로 극한까지 농축해서 <윤리학>을 저술할 준비만 해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본능적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그의 참여 문학론에 걸맞은 길을 택한다. 실명한 노구를 이끌고 최후의 힘을 다해 다른 철학자들과 연대해 김지하 구명운동에 투신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신의 유명한 철학자적 고집을 꺾고 김지하 시인의 저항시를 자신의 <현대>지에 싣는 과감한 결단을 감행한다. 김지하 시인의 작품 앞에 자신의 문학론을 한 수 굽힌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자신의 필생의 과업으로 설정했던 <윤리학>을 끝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도덕을 위한 노트>라는 미완성된 글만 남겨둔 채 1980년에 세상을 떠난다.

 여기까지 논거를 살펴보자. 과연 장 폴 사르트르는 한국을 혐오한 철학자였을까? 아니면 그 스스로의 철학적 고집까지 꺾을 정도로 한국의 시인에 관심이 있었으며, 한국의 민주화에도 영향을 끼친 고마운 철학자일까?


3. 사르트르의 앙가주망과 김지하 저항시

여기서 사르트르의 참여 문학론에 대해 간단히라도 살펴보자. 독자들은 문학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문학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학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플라톤은 시인 추방론을 주장하며 문학작품을 열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문학작품을 포함한 예술작품들은 이데아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거짓말 덩어리일 뿐이고, 그나마 문학을 허용한다면 젊은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용도에만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에 적극적으로 반대할 듯하다. 사르트르의 참여 문학론을 한껏 응축시키고 있는 개념인 앙가주망에 따르면, 오히려 문학작품(주로 산문)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듦과 동시에 부당한 권력의 압제에 저항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문장 하나하나가 인간과 사회의 모든 차원에서 울리지 않는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라는 그의 인터뷰 자료는 그의 생각을 적절히 드러낸다

[4]

.

 사르트르의 참여 문학론은 '앙가주망'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앙가주망(engagement)을 직역하자면 참여라는 의미겠지만, 사르트르는 이를 자신만의 용법으로 발전시킨다. 그가 말한 바로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 대부분은 일종의 사회적 참여이다. 인간은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떠나서, 또한 본인의 배경이나 계급이나 상황과 무관하게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본인이 어떤 언어를 사용하든,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사회적 상황과 맥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 사용과 용법의 선택은 그 자체로 자신의 "입장표명"이고, 다른 세계를 창조하거나 지지 혹은 비판하는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대중들이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이기적으로 자신만의 이윤만 추구하는 족속이라는 혐오적 맥락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대중 A도 이에 동참한다고 해보자.


(1) 유대인 1 = 이기적으로 자신만의 이윤만 추구하는 족속

(2) 유대인 2 =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


 대중 A가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1)이라는 맥락으로 사용하는 것은 사회적 맥락과 따로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 A가 아무 생각 없이 유대인을 (1)의 맥락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도 일종의 혐오적 표현 사용에 가담하는 사회적 참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글과 언어를 통해 대중들이 수용하고 재생산하고 있는 이러한 혐오적 표현의 맥락을 폭로하는 앙가주망을 할 수 있다. 작가는 심지어 (1)을 대체할 수 있는 표현인 (2)를 사용하고 전파하면서 대중들의 언어 표현에서 혐오적 표현이나 맥락을 소거하는 변혁적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다. '유대인'을 그냥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이라는 맥락으로 사용하도록 언어 표현에 변화를 주는 노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앙가주망에 의한 폭로와 변혁은 기본적으로 기성적이고 지배적인 언어 표현이나 사고방식에 저항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은 기본적으로 사회 전체와 상호작용함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사르트르의 참여문학은 전체적 변화를 지향한다. 작가는 자신의 방법론이나 지론에 의거해서 언어에 담겨 있는 지배적 이념이나 사고를 세상에 폭로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인류의 언어 표현을 폭로하거나 개조하는 방법으로 기성적 언어에 구속되어 있던 개인의 의식을 해방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문학을 "언어 폭탄(bombes verbales)"이라고도 표현한다. 

 물론 사르트르는 말년에 접어들어 자신의 진취적이고 전면적이었던 참여 문학론을 부분적으로 철회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자신이 아무리 <구토> 같은 작품을 창작한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 아프리카에서 굶주리고 있는 빈민 아이들을 구할 수는 없으리라는 절망감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르트르의 참여 문학론이 전 세계 문학론에 끼친 영향은 그의 표현처럼 "언어 폭탄"과도 같았다. 실제로 과거 우리나라의 수많은 저항시인도 사르트르로부터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아 참여적 문학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사르트르 참여문학의 독특한 점은 참여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문학작품을 주로 산문에 국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시적 언어가 앙가주망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시가 사회를 폭로하거나 변혁시키는 구실을 하기에는 대단히 간결하기 마련이고, 나아가 추상적이고 예술적인 언어로 만들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사회 참여적 글을 발행하던 <현대>지에 산문만을 싣겠노라 선언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르트르는 <현대>지에 산문만을 싣겠노라 스스로 선언했던 것에 무색하게 김지하 시인의 저항시를 <현대>지에 싣는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더 궁금한 사실은 어째서 사르트르가 지구 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저항시 중에 왜 하필이면 김지하 시인의 저항시를 싣기로 결심했는지 여부이다.

 생각해보자. 당시 프랑스는 전 세계에서도 가장 진보한 국가 중 하나였다. 당연하지만 수많은 예술과 문학이 성장하고 있었을 것이며 사르트르도 그들을 충분히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미국이나 영국, 독일 등 타 선진국 문필가들의 저항시도 충분히 접할 여건을 가지고 있었을 테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평생을 문필가로 활동하면서 프랑스 문학은 물론이고 영국이나 미국, 독일 문학가들이 만든 저항시는 자신의 <현대>지에 싣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선택한 작품은 김지하 시인의 저항시뿐이었다.

 아마도 이는 김지하 시인의 저항시 스타일이, 특히 <오적>이 한국 전통 판소리의 형식을 빌린 담시의 형식을 빌리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오적>의 독특한 점은 시 작품치고 대단히 양이 많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정보나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적합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 작품으로서 가져야 하는 특유의 운율 감이나 예술성은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오적>에 사용된 다양한 어휘들의 창의적이고 운율감 넘치는 배치는 말 그대로 예술적이다. 독자들은 한번 감상해보길 바란다!

 아마 사르트르는 이렇듯 1) 사회 비판적 메시지 전달 2) 시 작품 특유의 예술성 모두를 갖춘 김지하 시인의 <오적>을 접하고 작지 않은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본인은 시 작품을 언어로 만든 추상예술, 혹은 최소한 명백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는 부족한 모호한 언어 양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전통의 시적 양식이 김지하 시인의 손을 빌려 사르트르에게 전달되자 사르트르 스스로 자신의 옹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도록 큰 충격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리고 김지하 시인의 작품은 사르트르의 참여 문학론적 성격에도 대단히 짝이 잘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르트르는 평생 작가의 사회 참여적 역할을 크게 강조하며 다른 예술가들 보다도 문필가들의 사회적 영향력과 의무를 크게 생각했다. 그런데 김지하 시인은 사르트르의 참여 문학론적 성격에 들어맞는 참여적 시를 만들었음과 동시에 시 특유의 예술성까지 빼먹지 않는 특출 난 면모를 뽐냈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사르트르는 김지하 시인을, 그 자신 스스로가 수상을 거부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적극 추천했을 것이다. 자신이 거부한 상을 추천한다는 모양새가 웃기긴 하다.


4. 장 폴 사르트르 개인사 연구 촉구

이렇듯 장 폴 사르트르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시론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받은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사르트르는 한국을 혐오했다기보다 한국의 민주화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한국의 지식인 탄압과 부도덕한 전쟁을 일삼는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그야말로 실천하는 지식인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프랑스인도 아니고 미국인도 아닌 한국인들만이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며, 우리 스스로도 한국 문학에 대해 충분히 자랑스러울 수 있는 역사이자 장 폴 사르트르에게 한국 현대사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기 마땅한 자리를 마련해주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국내 장 폴 사르트르의 개인사에 관한 연구는 정말 거의 진행이 안 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당장 필자도 장 폴 사르트르와 김지하 시인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노력했지만 구할 수 있는 자료는 주섭일 기자께서 옛날에 올려두신 칼럼과 교회 목사님의 지인 분을 통한 증언이 고작이었다. 국내외를 통틀어 그 어떠한 학자도 이 둘의 관계를 진지하게 연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한탄스럽기만 한 순간이었다..

 심지어 연구를 위해 김지하 시인의 작품이 각종 각주와 함께 공식적으로 소개된 1975년 8-9월호 <현대(Les temps Modernes)> 판본을 얻는 일도 절대 쉽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국내 도서관에서 해당 자료를 구할 수는 없었다. 위 잡지를 발간한 잡지사였던 갈리마르(Galimard)사에 공식적으로 협조 메일을 보내 위 판본 잡지를 참고하거나 구하고자 노력했지만 갈리마르 사도 위 판본이 너무 오래돼 더는 구할 수 없다는 답변만을 줄 뿐이었다.

 위 판본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나 미국이나 영국 등 각지의 도서관도 물색해봤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나는 최후의 희망을 중고서점 탐색에 걸었는데, 운 좋게도 프랑스의 어느 조그만 중고 서점에서 반세기가 넘도록 보존된 1975년 8-9월 <현대>지 판본을 발견해 개인적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모든 작업은 사비 지출로 이루어졌기에 일개 학부생 수준에서 감당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또한 위 작업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고자 국내 몇몇 전문 학자들과 사르트르 전공 교수님들께도 도움을 청하는 메일을 보내봤지만, 모조리 무시당해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발견하거나 조언을 구하는데 너무나도 큰 한계가 있었다. 가령 사르트르가 김지하 시인을 구하기 위해 어떤 글들을 발행했으며, 다른 철학자들과 어떤 연대를 했으며 우리나라 사법부에 어떤 압력을 가했는지는 나 스스로 그 어떠한 자료도 구할 수 없었다.

 비록 몇몇 자료들을 어떻게 구한다고 할지라도, 그나마 영문 자료라면 독해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불어 자료는 아예 손도 댈 수 없어 고민이었다. 특히 1975년 8-9월 <현대>지 판본은 아예 모든 글이 불어 원문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접근해서 분석할지도 큰 고민이었다. 위 판본에 김지하 시인의 작품 총 7개가 수록되어 소개되고 있는데, 그나마 5가지 작품 제목은 그대로 구글 번역기를 돌렸더니 원작 제목과 비슷한 제목으로 번역되어 어떤 작품이었는지 알 수 있었지만, 나머지 2가지 작품은 제목을 의역으로 번역해서 실었는지 어떤 작품이었는지 조차도 알 수 없었다. 아마 불어를 할 수 있다면 위 2가지 작품과 일치하는 내용의 시 작품을 찾아서 어떤 작품인지 알 수 있었겠지만, 나로서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일개 학부생 신분임에도 과감하게 요청해보겠다. 장 폴 사르트르의 개인사, 특히 한국 민주화와 연결된 정보들을 수집해서 연구하도록 하자. 지금 이러는 동안에도 당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수명을 다해가고 있고, 자료들도 언제 어디에서 소실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제 김지하 시인도 앓아누우신 탓에 개인적 도움을 구하기도 여의치 않게 되고 있다. 더 이상 장 폴 사르트르가 한국 민주주의에 끼친 의의를 재평가하거나 사르트르와 김지하 시인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력을 탐구하는데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장 폴 사르트르와 한국 민주주의의, 그리고 김지하 시인의 관계를 둘러싼 진지한 역사학적, 철학적 연구를 시작해야만 한다.


          


* 실제로 구입한 <현대>지 1975년 8-9월호 판본


[1]

 Russel tribunal. 버트런드 러셀이 1966년에 자신을 주축으로 세계 지식인들을 모아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을 규탄했던 상징적 재판.




[2]

사르트르를 주축으로 탄생한 사회참여적 잡지로, 1945년에 창간되어 그가 사망한 이후 2019년까지 발간되었다.




[3]

각각 LA ROUTE DE POUSSIÈRE JAUNE(황톳길), LA MER(바다), LA ROUTE DE SEOUL(서울 길), SANG D'AVRIL, SÉPARATION, LE COSTUME BLUE(푸른 옷), LES CINQ BANDITS(오적)이다. 가운데 있는 SANG D'AVRIL, SÉPARATION는 아마 의역된 제목인 듯한데, 불어를 알지 못해 어떤 작품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4]

변광배, 「'앙가주망'에서 '소수문학'으로」, 『세계문학비교연구』, 세계문학비교학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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