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카이온이 운영하고 있는 "공학자의 시선으로 다시 본 논리-철학 논고"세미나의 내용을 요약하고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것에 있습니다. 자유롭게 읽어주세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사진
노자 도덕경에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는 말이 있다. 도라고 말하는 도는 도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어떤 진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어버린다면 그 진리는 언어표현 안에 갇혀버리기 마련이기에 진리 그 자체는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노자보다 도, 즉 진리에 대해 더욱 급진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노자는 최소한 진리적인 무언가가 인간의 말 밖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진리조차도 인간이 언어로 구성해낸 언어의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잠언이자 논리-철학 논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말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형태로 나타난 결론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인간이 인식하려 하는 대상은 3가지 층위로 나뉜다. 우선 첫째는 인간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 세계, 즉 "현실"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 외부에 놓여있는 물리적 세계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적 정의나 규정, 혹은 인식을 떠나서 외부의 물리적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두루뭉술하게 떠오르는 인상에 불과하거나, 사실 그러한 인상조차도 A나 B라던가, "그것"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정의하거나 명명해서 인지할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인간의 외부에 있는 순수한 물리적 세계에 대한 기술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콜라 맛을 블라인드 테스트로 비교하는 것을 상상해보자. 언어 없이 물리적 세계를 인지하려 하는 것은 눈을 가리고 콜라 맛을 가려내는 것과 같다.
둘째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순수한 언어적 세계, 즉 "세계"이다. 이 언어적 세계는 인간 외부에 놓여있는 물리적 세계와는 아무런 상호작용을 하지 못하고, 그저 인간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단지 그 때문에 존재하는 세계이다. 예를 들어, 유명 소설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세계는 인간이 언어적 세계로 만들어낸 세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의 참 혹은 거짓은 순수한 개념적 정의로만 구성될 뿐이기에 동어반복적 명제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는 대표적으로 수학적 명제와 과학적 법칙이 모두 인간이 연역적으로 정의해낸 개념 그 자체에서 도출되는 동어반복적 명제에 불과해서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가령 수학 식 "1+1 = 2"에서, 1+1은 2와 동일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지식은 아무것도 없다. "1+1 = 2"와 "해리포터의 이마에는 번개모양 흉터가 있다"는 질적으로 동일한, 언어적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이 언어적 세계 속에서 창작하고 구성해낸 것에 불과한 순수한 언어적 세계 역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말할 의미가 없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순수한 언어적 세계에만 있는 개념들, 가령 정의, 진리, 신, 영원 등은 인간이 언어로 구성해낸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셋째는 인간이 거의 유일하게 말할 수 있으며 유의미한 부분을 가지는 세계이다. 바로 앞서 말한 물리적 세계와 언어적 세계가 촉수처럼 맞닿는 세계가 그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정의를 하지 않으며, 그저 유명한 "그림이론"만이 유명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그림은 무엇일까?
우리는 다양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가령 내 눈 앞에 귀여운 거북이가 있어서, 그 거북이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거북이 그림은 거북이를 잘 그렸어!'. 여기서 등장한 귀여운 거북이 그 자체는 "현실"을, 거북이 그림은 "세계"를, 주인공이 내린 평가인 '이 거북이 그림은 거북이를 잘 그렸어!'는 유의미한 명제이다. 그는 이에 대해 그림 말고도 촉수 등 이해를 돕는 다양한 설명을 덧붙이는데, 아무튼 그는 말은 말뿐이면 의미가 없으며, 말로 개념화할 수 없는 물자체로서의 현실 그 자체는 알 수가 없지만, 인간의 언어가 현실과 만나며 상호작용해서 진정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면 그제서야 인간이 진정으로 알 수 있는 지식의 영역이 열린다고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은 "현실"과 "세계"가 맞닿아서 참 혹은 거짓을 확인할 수 있는 영역, 오로지 그 영역이 인간이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뜻하는 바는 자명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형이상학, 신학, 윤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형이상학은 언어적 세계를 다룬다. 순수히 언어로만 구성되는 세계인데, 더 말을 복잡하게 할 필요성이 있을까? 이는 윤리학, 신학, 몇몇 분야의 이과적 학문을 포함한 지극히 다양한 학문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파괴성을 가지는 생각이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이러한 모든 학문들은 복잡한 말장난에 불과할 뿐, 어떠한 가치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눈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플라톤은 진리를 이데아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으로 봤으며, 칸트는 인간의 외부에 놓여있는 물자체는 인간이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는 것으로 봤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만은 달랐다. 그는 진리라는 말 또한 인간이 언어를 통해 만들어낸 낙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를 발표하며 자신이 철학을 둘러싼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언하며 철학계를 떠난다.
진리는 인간이 언어로 그려낸 낙서에 불과할까?
그에 따르면 인간은 언어사용이라는 저주에 걸린 존재이다. 인간이 진화를 거치는 어느 순간 사용할 수 있게 된 언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사용규칙 내지 도구에 불과했지만, 인간은 어느새 이러한 실용적 도구에 불과했던 언어를 실제 현실이라고 착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는 철학이란 마치 어린 아이가 도화지에 낙서를 그려놓고는, 자신이 그려놓은 낙서가 진짜 존재하는 대상이라고 스스로 속아넘어가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철학적 논변을 토해내는 철학은 인간들을 언어라는 낙서가 실제라는 착각에 빠뜨려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는 이러한 언어적 저주를 고발하고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는 논리-철학 논고를 어떻게 구성했을까? 학식이 높은 어떤 분에 따르면 논리-철학 논고는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읽으면 안된다. 논리-철학 논고는, 소위 말하는 진리(라고 할 수 있다면...)의 다른 말이고, 비트겐슈타인은 진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차근차근 분석해내려가는 책을 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리-철학 논고를 읽을 때는 전문가분과 함께 읽어야지만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또한 논리-철학 논고의 주된 아이디어는 무엇일까? 아카이온이 구성한 논리-철학 논고 세미나의 방향은 비트겐슈타인이 우주를 귀납과 연역의 두 가지 세계로 나누고, 결국 귀납이 연역보다 우세하지만 귀납은 언어적 한계로 인해 최종적으로 정리되고 체계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해내는 것이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인류가 구성한 지식들이 결국 귀납에 기초하기 마련이기에 인간이 새로 맞이하는 상황, 맥락, 환경변화에 따라 변화무쌍할 수밖에 없고, 그렇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지식을 얻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고 전제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