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서야 가능한 검토하는 삶
어릴 적부터 길들여진 무검토
1. 한국 사회의 불행한 아이들
나는 현재 학습지 교사로 일을 하고 있다. 나름 자유로운 노동시간과 괜찮은 보수에 만족하며 일을 하는 중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비참한 모습의 일면을 최전선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점에서 어딘가 꺼림직한 마음도 가지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일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유아와 초등학생들을 많이 만날 수밖에 없다. 저출산이라고는 하지만 찾아보면 유아와 어린이들이 충분히 많다는 점에 놀란다. 이렇듯 많은 아이들의 집을 방문해서 가르치다 보면 그 집안의 재산, 집안 분위기, 심지어 국적까지도 나름 세세하게 알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러한 다양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불행하다는 점이 특이했다.
나 때도 그랬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사교육을 엄청 많이 받은 것은 또 아니었고, 개인적으로는 초등학생 때 다양한 것을 하며 놀았던 것만 기억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맡은 학생들은 정말 대부분 거의 고등학생급의 빽빽한 사교육 일정을 소화하느라 지쳐 있었고, 굳은 표정만을 드러낼 뿐이었다.
2. 5시 쟁탈전
학습지 교사의 가장 큰 일 중 하나는 역시 스케줄 관리이다. 나만 해도 110과목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스케줄 관리를 잘못하면 한 집이 5분 정도 밀리면 뒤에 있는 모든 집의 시간도 5분씩 밀려서, 단 5분을 조정해야 함에도 모든 집에 다 전화를 돌려서 5분만 시간을 미뤄달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 학부모가 가장 지키고 싶어 하는 시간대가 바로 오후 5시다. 그렇다면 어째서 학부모들은 오후 5시를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아이들은 보통 3~4개의 사교육을 모두 하기 마련인 듯하다. 우선 학교를 다녀오면 종합학원에 가야 하고, 학원이 끝나면 태권도를 가야 하며, 태권도가 끝나면 집에 와서 구몬학습을 해야 하고 주말에는 미술학원에도 간다. 초등학교 1학년들이 이러한 스케줄을 소화하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 친구들이 짓는 표정을 보면 마음이 아플 뿐이다.
그러다가 문득 이 친구들이 이 모든 예체능과 학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 친구들에게 이렇듯 많은 학원에 다니면서 구몬학습 숙제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어봤다. 그런데 모든 이들의 답이 동일해서 나를 놀라게 했는데, 바로 "엄마가 시켜서"다. 이 친구들은 미술에도 관심이 없고,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도 그냥 치라고 해서 치는 것일 뿐이다. 물론 과중한 학업 경쟁 스트레스는 별도이고, 그러한 와중에 부모님들이 악착같이 게임도 못하게 막고 있으니, 아이들이 행복하기 힘들 수밖에 없다.
3. 언제부터 시작되는 검토하는 삶?
하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일의 특성상 학생들에게 하기 싫으면 끊으라는 말을 차마 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저 가끔 숙제를 안 해오면 그럴 수 있지 하며 격려해 주고 지나쳐 줄 뿐이다. 그렇게 나는 이러한 사교육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이 자기 생각과 판단 하에 자신의 삶을 검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행복과 꿈을 위해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나라 학생들은 초등학교부터 중학교에 이르는, 어찌 보면 자신만을 위한 삶을 설계하고 계획하는 일에 가장 창의적일 수 있는 시기 동안 부모님과 사교육 업체에서 알려주고 시키는 것에만 익숙해진다. 그렇게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대학에 입학한 상태가 되어있거나 사회에 나와 아무 생각 없이 어떻게든 삶의 전선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그 이전에 자기 자신을 위해 세워놓은 인생의 행복 계획이 있을 리 만무하고, 이러한 계획을 성인이 되어서야 처음부터 찾고 짚어나가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아와 어린이 시절부터 치열한 사교육에 찌들어 버린 우리들이 그러한 인생 계획을 찾아 나서기가 쉬울 리 없으며, 그저 사회에서 정해준 좋은 직장을 가지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경쟁해 나가는 길을 걷게 될 뿐이다. 그렇게 한국인들은 자신만의 행복론을 상실한 채 불행해지고 있으며, 자신이 겪어온 불행했던 유년 시절을 대물림해 주지 않기 위해 출산을 포기하는 선택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언제부터 검토하는 삶을 시작해야 할까?
4.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목숨이 걸린 재판에서조차 몸을 아끼지 않으며 과감한 연설들을 토해낸다. 그가 이렇게 재판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그 누구보다 아테네를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서는 평생에 단 3번만 아테네를 떠났었다고 하고, 그가 지금까지 다른 아테네인들을 캐물으며, 소위 말하는 "신령스러운 것"의 말에 따라 스스로 등에의 역할을 떠맡은 것도 결국은 아테네인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소크라테스가 한 일은 아테네가 지적으로 타락하거나 도덕적으로 나약해지는 것을 방지하고, 소피스트들의 농락에 놀아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든 아테네인이 자기 삶, 지혜를 쉬지 않고 캐물으며 아테네인 전체의 행복을 추구해야만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한국 사회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처럼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검토하고, 자기 행복은 물론이며 한국 사회 전체의 행복을 돌아보기가 쉽지 않다. 한국 사회의 교육은 어디까지나 입시, 출세에 맞춰져 있을 뿐이지만 이러한 입시와 출세가 가져다주는 것이 반드시 행복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 이기백 교수님이 첫째 시간에 충분히 설명해 주신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스스로 캐물어야 한다. 도대체 우리들은 무엇을 위해 이렇듯 치열하게 경쟁하고, 공부하고, 나아가 노력하는 것일까? 도대체 우리들이 이러한 불행에 빠뜨린 장본인은 누구일까? 사회일까? 아니면 문화일까? 그것도 아니면 우리들이 유년 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검토하는 경험을 쌓아오지 못한 탓일까?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은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답을 찾기 전에, 문제를 물어봐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캐묻기를 한 것처럼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캐묻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