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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가지 않은 길 Oct 18. 2023

근로자의 죽음

연재 소설

  전쟁 같았던 1975년이 저물고 1976년이 열렸다. 마침 3공구와 5공구가 암반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터라, 담맘 현장은 부진한 실적을 만회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신년을 맞이했다.  

   

  1월은 사우디답지 않게 날씨가 선선한 덕에 작업 능률이 크게 올랐다. 첫 삽을 뜬 이래 월 단위로 최고의 실적을 올려 분위기가 한껏 고무됐다.      


  그러나 그것도 한 달뿐. 하늘이 무심했다.

  4공구가 수압 테스트를 하는 날이었다. 4공구는 대형 암반의 저주로 작업 진도가 꼴찌에서 헤매다가, 작업장을 교대한 후 2, 3공구도 암반에 발목을 잡히게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4공구의 주행속도가 빨라지더니 1월 말에 이르자 작업 현황 막대가 2, 3공구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이번 수압 시험을 통과하고 포장을 마치면 2공구를 추월하게 돼, 정 공구장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천 기사가 수압기를 펌핑 하자 게이지 눈금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10psi, 20psi, 30psi, 40psi······

  “만일 오늘 테스트에 실패하면 공구장이 지랄깨나 하것지?”

  방현우가 땅을 고르며 중얼댔다. 그동안 수많은 수압 테스트를 거치며 실패한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분수 사건 후로는 기사들이나 작업자들 모두가 과민 반응을 보였다.

  “말이 씨가 되는 법일세. 그런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지.”

  봉수한이 허리를 펴며 방현우를 핀잔했다.    

  

  저쪽에서 석 한풍이 굵은 수도관 세 개를 두 팔로 안고 용접기 쪽으로 오고 있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어 금방 쓰러지기라도 할 듯 불안해 보였다. 매우 내성적인 그는 누이 편지를 받은 후로는 누구와 얘기도 않고, 식사도 제대로 못 할 뿐 아니라, 잠자리에서도 밤새워 뒤척이며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수압기 옆을 지날 때였다. 모랫바닥에 발이 미끈해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잠시 후 몸의 균형을 바로잡았지만, 안고 있던 수도관 하나가 팔에서 굴러 떨어지며 수압기와 게이지를 연결하는 신주를 쳤다. 충격을 받은 신주가 부러지는 순간 ‘펑’하고 게이지가 튕겨 나갔나 했는데, ‘딱’ 소리와 함께 석한풍이 이마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총알처럼 날아간 게이지가 그의 이마를 때렸던 것이다.··· 응급실로 실려 간 그는 일시 의식을 회복했으나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운명을 다했다.     


  신주는 강도가 강한 대신 유연성이 없어서 충격을 받으면 그대로 부러져버린다. 강한 압력을 받는 신주를 건드리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라 수압측정 시 수압기 접근이 엄격하게 금지돼 있었다. 석 한풍은 딴생각에 빠져 금지 규정을 어기고 그 옆을 지나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공구 창고 한편을 막아 빈소가 차려졌고, 여권 사진으로 영정 사진을 만들었으며, 천 대리와 홍 대리가 번갈아 가며 빈소를 지켰다.  


  k숙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를 죽인 것은 수압 게이지가 아니라 바람난 아내였으며, 그는 삭이지 못하는 울분을 사막의 밤하늘에 토해냈으며, 그의 죄는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 뿐이었음을.      


  시신은 본인의 유언에 따라 캠프 뒤쪽 모래 언덕에 묻혔다. 국제개발이 공사를 마치고 철수한 지금도 그는 그 자리에 남아 담맘 상하수도 공사의 역사를 증언하리라. 대역사를 이루기 위해 많은 피와 땀, 희생이 뒤따랐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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