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놀라지 말고 들어. 할머니가 새벽에 돌아가셨대. 오빠는 이미 장례식장에 갔어. 굳이 가라고 알려주는 건 아니고, 딸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출근 준비를 하며 받은 엄마의 전화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걷어내게 만들었다. 어떤 옷을 입고 출근을 해야 할지 망설이던 나는 속옷부터 양말까지 올 블랙으로 맞춰 입고 원룸을 나섰다. 그리고 내가 향한 곳은 회사였다.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웹툰을 편집하는 편집자이다. 오늘 플랫폼에 보내야 하는 웹툰이 있었고, 나는 그것의 편집을 해야 했다. 회사에서 만화의 배경을 담당하는 스케치업이라는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회사에 있어야 했다. 사실 그것 아니라도 내가 할 분량의 내 일은 어떻게든 끝내고 싶었다. 그리고 뭐랄까, 무서웠다. 나의 개인적인 감정에 동정하며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 무섭다고 해야 할까?
사실 엄마가 할머니의 부고를 이렇게 조심스럽게 전한 건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였다. 폭력적이고 무능한 가부장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을 한 후, 나는 친가와 인연을 끊다시피 했다. 저런 아버지를 키워 낸 가정에 대한 환멸이 있었기도 했고, 또 혹시나 아버지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리’라는 것이 내 골수에 깊게 박혀 있어서였던지 나는 망설임 없이 할머니의 마지막을 함께하기로 했다. 물론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다 끝내고 말이다. 그렇게 내 나름 열심히 일을 했지만 작가는 내게 원고를 제때 던져 주지 않았다. 사실 어제 끝났어야 하는 일인데, 작가는 창작이라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소요하고 있었다.
작가란 뭘까? 창작을 하기 때문에 남의 시간을 함부로 써도 되는 집단일까? 사실 나 또한 동종 업계에서 작가로 일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더욱더 머리가 아팠다. 연재 중인 원고를 이렇게까지 제때 주지 않다니…. 재밌게도 작가가 원고를 늦게 주면 편집자도 야근 수당 없는 회사에서 밤 11시 59분까지 일해야 했다. 마치 그게 미덕인 양, 은근하게 편집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분위기의 회사. 어제 내 일이 제대로 끝났다면 나는 지금 당장 ‘도리’라는 것을 하기 위해 고향땅에 마련 돼 있다는 장례식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겠지.
일 분 일 초가 나를 갉아먹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창작이 나의 도리를 깎아 먹고, 나는 내가 할 분량이 어디까지인지 타협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 4시가 되었을 때, 나는 나만이 할 수 있는 분량의 일을 끝냈다. 그리고 나의 직속상관을 따로 불러 조용히 할머니의 부고를 알렸다. 기겁하는 그녀의 모습이 나의 정서와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반응도 충분히 이해했다. 나와 다른 감정의 입출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니, 나와 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모두가 내 할머니의 부고를 알고 탄식을 토하기도 전에 얼른 조용히 회사를 빠져나왔다. 원고를 받아낸 뒤의 작업은 회사 사람들에게 맡기고….
대중교통이라고는 제대로 다니지도 않는 시골.
그 시골 한쪽 자락에 자리 잡은 장례식장.
아마 내 고향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모두 이 장례식장에서 수의를 입혀줬을 것 같았다. 위치가 딱 그래 보였다.
나는 우선 고향에서 가까운 대도시인 대구로 향하는 KTX표를 끊었다.
그리고 시골로 향하는 막차인 버스를 잡아 타야 했다. 휴대폰이 안내하는 시간은 상당히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는데, 어쨌든 안 되면 택시라도 잡아타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얼른 내 일상을 떠나 할머니가 잠들어 계신 곳으로 향했다.
대구에 내리자마자 미친 듯이 달렸다. 과거 사고로 양쪽 다리를 모두 수술했던 나로서는 상당히 힘든 일이었지만 그래도 달렸다. ‘도리’라는 것을 하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어렵게, 정말 어렵게 막차인 버스를 잡아탔다. 물론 이 버스에서 내리고도 또 한참 차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일단 할 수 있는 단계는 모두 했다.
그렇게 숨을 헐떡이고 버스에 앉아서야 나는 눈물을 흘려냈다.
할머니가 떠나고 있다.
좋은 기억 하나도 없고, 이해할 수 없던 할머니의 숨이 세상에서 걷히고 있다.
슬펐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그렇게 버스에서 내리고 나는 눈물을 말렸다. 계획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나는 할머니가 잠들어계신 장례식장의 이름을 기사님께 말했다. 그리고 시커먼 옷을 입은 여자가 야밤에 장례식장에 가자고 해서 놀라지 마시라는 말도 덧붙였다.
“저 귀신 아니니까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러자 기사님은 껄껄껄 웃으셨다.
“아가씨가 타셨던 데서, 이 시간에 자주 태워 갑니다.”
기사님은 그렇게 껄껄껄 웃으시며 익숙한 듯 나를 내가 있어야 했던 곳으로 내려주셨다.
할머니, 지금 만나러 갑니다.
나는 사실 할머니가 어디에 계신지, 안내받은 게 없었다. 오빠에게도 내가 간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고, 하물며 인연을 끊다시피 연락하지 않던 친가의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사실 연락처도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장례식장엔 입구부터 나에게 내가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안내를 해 주었다. 익숙한 할머니의 이름이 TV 화면에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아버지가 상주로 이름을 올린 채 말이다.
나는 천천히 할머니를 향해 갔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 번도 스스로 할머니를 향해 간 적이 없었다. 아! 아니다. 한 번은 있었다. 할머니가 무릎 수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상당히 반기셨는데, 나의 눈에 할머니는 폭력적인 아버지의 어머니일 뿐이었다. 그래서 어색했다. 아버지가 투영돼서 보이는 할머니를 향해 나는 다정한 웃음을 지어드릴 수 없었고, 오직 마지막 ‘도리’를 다한다는 이유로, 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렸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이 두 번째이다. 할머니는 누워있고, 나는 할머니를 향해 ‘도리’ 때문에 나아가는 그런 관계.
나는 여유로운 척 다른 장례식장에 가는 사람을 위해 엘리베이터까지 잡아주며 천천히 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내가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나의 고모, 삼촌 하물며 오빠도 나를 반겼다. 의외로 아무도 나에게 다가와 “왜 이제 나타나!!”라는 날카로운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모두가 한결 같이 내게 말했다.
“와 줘서 고맙다. 할머니한테 인사하자. 그리고 할아버지한테도.”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검은색 한복으로 갈아입고, 할머니의 빈소에서 절을 올렸다. 그리고 고모들의 손에 이끌려 할아버지께 갔다. 그러자 할아버지도 내게 “왜 이제 왔어.”라는 말 대신 “잘 왔다.”라는 말을 했다. 나는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제대로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내가 할 수 있는 할머니에 대한 애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오빠가 다가와 말했다.
“고개 들어. 너 뭐 죄지은 거 없다. 그냥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면 되니까 편하게 있어.”
“어? 어….”
나는 오빠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사실 알지 못했다. 지금도 알 수 없다. 나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게 죄가 있다면 할머니를 아버지를 낳은 엄마로 본 것뿐인데 그것도 죄가 되는 일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오빠는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내가 말없이 앉아 있는 게 꼴보고 싫었던 것일까?
생각해 보면 할머니라고 아버지 같은 아들을 낳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시집오기 전 할머니의 친가에서 귀하게 자란 딸이었다고 들었다. 할머니의 부모님은 13명의 자녀를 낳았고 그중 네 분만 성인이 되셨다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의 부모님은 네 분의 자녀에게 각각 오래 살라는 뜻의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리고 그저 살아내는 게 고마워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 결과물인 할머니가 양반집 막내 도령에게 시집을 갔다. 할머니의 집안도 마을에서 이름 꾀나 높은 양반집이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아버지는 기존의 양반들이 시대에 뒤처져 하품을 하고 있을 때 장사에 눈을 떴다고 했다. 그래서 1900년대 당시 지금의 택배 개념의 장사를 도입했고, 일대의 땅을 모두 소유하셨던 이른바 만석꾼이라고 했다. 돈 많고 뼈대 굵은 집안의 딸이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할아버지를 만난 것이었다.
18살, 아무것도 배운 적 없는 여자인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결혼해서 19살에 낳은 아들이 내 아버지였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인 나의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동발달학도, 부모교육도, 부부교육도, 아동심리학도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이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었다. 불행하게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낳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계셨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자주 안아주지도, 제대로 훈육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아니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것이었다. 배우지 못했으니까.
이렇게 생각해 보니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할머니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 머릿속에 저장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결코 적지 않구나. 그리고 할머니의 아버지의 바람이 정말 이루어졌구나. 할머니는 당신의 형제들보다 훨씬 많이 사셨다. 90년. 할머니가 살았던 시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할머니는 살아내셨다.
나는 말없이 빈소에서 할머니의 얼굴을 쳐다봤다. 물론 빈소의 한편에는 죄 많은 장남, 나의 아버지가 병든 몸으로 당신의 어머니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내게는 ‘위협’ 이외에 그 어떤 의미도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나를 위협하고 내게 소리를 지른다면 나는 도망가면 그만일 테니까. 나는 그저 할머니의 깊은 주름이 고스란히 찍힌 영정사진을 가만히 쳐다봤다.
누군가 그랬다. 딸들은 할머니를 닮는다고.
그 말이 맞다. 나는 아빠의 X 염색체를 받아왔는데, 그 염색체를 준 사람이 바로 할머니 아닌가? 그래서 그런지 할머니와 나는 생각보다 많이 닮아있었다. 왼쪽과 오른쪽 눈이 짝짝이인 것도, 좁아 보이지만 사실 넓은 이마도, 두꺼운 입술도. 분명 나의 외모 유전자에 할머니의 기여가 큰 것 같았다.
어쩌면 내가 죽었을 때 나는 할머니와 비슷한 영정사진을 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