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특별하게, 흘러가게
나그네, 떠돌이
어느 시대라도 여행을 좋아하고 갇힌 곳을 싫어해서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하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혼자여서 외롭고 무서운 게 아니라 스쳐가는 바람과 탁 트인 공간, 산과 계곡, 들판을 바라보며 혼자 미소 짓고 이슬과 풀내음, 햇빛에 따라 달라지는 풍광을 선보이는 자연의 시간과 공간을 사랑하는 그 누군가는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삶에서 인연은 단번에 끝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우연히 같은 여정의 또 다른 여행객이나 나그네를 만나 동행하면 혼자가 아닌 둘 이상의 걸음이 모여 길을 가는 날도 있겠지만.
혼자이기보다 여럿이, 또는 군중 속 주목받지 않는 조용한 1인으로 '지나가는 사람 1'의 역할이 마음 편한 날이 있다.
어느 날, 조용히 스쳐 지나던 누군가를 또 다른 장소에서 한번 더 보게 될 때, 낯설지만 눈에 익은 누군가는 우연히 여러 번 조우하게 된다. 여러 번의 소소한 스침이 인연이 되기도 한다. 집 근처 버스정류장, 아파트상가의 마트, 자주 가는 편의점 등 가까운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은 우연이라는 변수로 기억하지 못하는 몇 번의 지나침이 이어진다.
인연의 시작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여러 번의 마주침에 가끔은 눈인사를 건네거나, 우연한 계기에 대화를 하면서 천천히 타인에 대한 앎이 시작된다. 가까운 거리, 생활반경이 인연의 한 요소가 되는 순간이다.
직장에서는 5년 정도를 한 곳에 근무하다 보니, 한 두 마디의 안부는 기본이지만, 1~2년을 함께 같은 학년으로 묶이지 않는다면 얼굴만 아는 사이다.
서로가 같은 직장, 직종에 있다고 사람과의 사귐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내게 흔치 않다. 사교적인 사람이라면 친밀함을 느끼고 친근함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지만, 짧은 만남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1년이라도 같은 공간 속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인연이지만 호연일 수도 악연일 수도 있다.
10여 년도 지난 일이지만 직장에서의 1년 동안의 악연으로 그곳을 떠나는 만 5년 동안의 시간이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다.
언젠가는 끝날 악연이었지만 시간이 더디 가고, 누군가를 잠깐이라도 만날까 봐 조마조마한 날들이었다.
나 스스로는 많이 호전되고 해결되었다 생각했지만 혼자만의 착각이라 다른 누군가는 힘들어하며 여러 명의 사람들에게 힘듦을 토로하는 걸 듣게 되었다.
같은 동료에게 불편함을 표현하며, 불편함을 느끼게 했다는 명목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어린 동료의 눈물 또한 보게 되어 마음이 아팠다.
함께 있던 순간 속에서 나만 힘들었던 게 아니어서 어린 후배의 눈물 어린 포옹 속에 함께 눈물 흘리는 시간이 있었다. 힘들었던, 그 순간은 타인의 어려움이 된 과거와 현재의 두 사람은 비슷한 경험으로 마음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말하지 않아도 무엇이 힘들고 억울한지 충분히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있었다.
그곳을 떠날 때는 누군가도 마무리를 하고 싶으셨는지 다음 근무지에서 잘 지내는지 확인해 보겠다는 말까지 듣긴 했지만, 다행히도 다음 근무지에서는 누군가의 바람 덕분인지 무탈하게 지냈었다.
사람들과의 인연들이 꼬였을 때, 인생이란 나그넷길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길이란 생각으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면 마음이 더 편안했을까?
오래 지낼 생각으로 누군가를 내편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배척하며 지낼 이유도 없었을 텐데.
잠깐 만난 이가 나를 해하려는 강도나 도적떼가 아니라면 내 인사에 반응이 없는 무심하고 뻣뻣한 사람이라도 그러려니 지나갔을 것이다.
나그네는 혼자이기에, 길을 걷는 동안 소지품이 많지 않을 거다.
몸에 지닌 것이 많으면 그만큼 쉬이 피곤해질 거니까, 최대한 짐을 줄이고 가벼움을 선택할 거다.
그런데,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니 당장 사용할 것도 아닌 물건으로 자꾸 무언가를 쌓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나그네 인생에 대한 이해가 한순간 물욕에 잠식된 결과 아닐까, 이 순간 주저앉아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뿌리내리고 싶어 스스로를 무겁게 하고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사람이나 물건도 인생 속에서 과함 없이 조금은 부족한 듯한 게 답이 아닐까? 더 많이 가질수록 앞으로 나가기 힘들어지니까.
무거움을 내려놓고 가벼움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내일 새롭게 이어질 여정을 꿈꾸며, 걱정 근심 없이 잠드는 오늘 하루가 되길, 걱정 근심으로 빼앗기지 않는 기쁨과 행복감으로 꿈꾸는 밤이 되길 기대해 본다.
내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겨두고, 오늘의 나는 휴식의 시간에 만족한다. 내일의 내가 힘찬 걸음으로 빛나는 내일을 살아갈 수 있길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