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교육

by viva

어떤 형식의 회절, 구름이 갑작스레 높고 크다는 것을 실감할 때, 죽음이 저녁 식사 시간보다 가깝게 느껴질 때, 권태, 위협, 별자리, 울타리, 녹는 물고기, 플로베르, 그런 단어의 초현실주의적인 나열에서 포착하는 이른바 연기의 감정이라는 형태로 축약되는 것, 어떤 이들은 나이 스무 살에 그런 것들을 느끼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말하고, 다른 이들은 늦었다고 말한다, 아마 두 쪽 모두의, 스무 살이라는 터무니없는 나이. 이윽고 남은 마음들을 들이쉬고 삶을 호려서 유리 너머에 상으로 맺히게 한다. 나는 지켜본다. 천천히 걸어 화면의 밖으로 사라진다. 완벽히 전원의 몫인 곳으로 돌아간다.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화음과 그 떨림이 잘 느껴지는 선율이 흘러 들어간다….


크림 색깔의 눈동자가 나를 지켜보는 것만 같이, 그곳에서 서서히 나 자신을 무미한 권태에서 되찾아보자. 각성은 잠에서 항상 갑자기 이루지 않는다는 것이 권태로운 삶의 특징이다. 그리스 알파벳 이름이 붙지 않은 어떤 자극의 파장을 들이켜도 뇌 내는 내 혀를 내밀게 할 생각이 없다. 이것은 마치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역설 같아서, 잠투정이 아무리 길어져도 몇 시간 후에 커피를 들이켜며 열렬히 독서에 집중하는 나 자신을 따라잡을 수 없는 수학적 체계를 생각하게 한다. 모순이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눈을 감았다고 생각한 채로 휴대전화를 뒤적여 음악을 튼다. 그 곡이 끝나갈 때쯤에 쓰겁게 잠에서 깨어난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일정이 없다. 아무것도 그 권태 이상의 것을 주지 않는다고 예정되어 있다. 권태라는 것의 오만한 배를 갈라 회를 쳐서 한 젓갈 물어 밴다. 비릿함은 잡혔지만, 맛이 없는 고기다. 그런 상상을 한다. 권태라는 놈은 삶이라는 어선의 크기 있는 잡어이다.

일정이 없을수록 빨리 외출준비를 하는 무뚝뚝함은 이놈과 상생하는 방법의 하나가 된다. 아무도 아무의 외출에 대해 아무 말을 할 도리가 없다. 너무 일찍 일어난 것이다. 가족 한 명이 자기 방에서 자고 있다. 입때 돌아오거라. 하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의 구보 어머니의 말을 상기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멜로디가 약식으로 흘러나오며 문의 잠금장치가 풀리고, 나오자마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 하나가 있으니, 나는 이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악을 쓴다. 몸을 왼쪽으로 돌려서 나간다. 마치 문고리를 왼쪽으로 돌려서 여는 문이 하나 더 있다는 감각으로, 나는 저이를 지나쳐 그냥 가는 것이다. 권태가 밀려온다.

여러분들은 언젠가 아침 묘시에 나가서 바깥의 정경을 보라. 큰길로 나아가자마자 보이는 건 삭막히도 텅 비어있는 도로의 모습. 이따금 저 너머 안개로 흐린 너머 하늘에 쓰여진 제 자상을 숨기는 일출의 비밀스러운 붉음을 포착할 따름 이외엔 이 도로에는 자극적인 것 그 자체가 없다. 매미 대신 어제 비가 조금 내려 젖어있는 수풀 근처로 귀뚜라미 소리가 심심이 들린다. 하늘은 구름 없이 하얗다. 시원한 여름 아침의 숨결이 내 얇은 반바지 속을 가른다.

혼자서 발을 들어, 앞으로 움직이고, 무게중심을 옮기는 과정까지가 부조화하다. 마치 권태라는 놈과 발을 짜 맞춰 걷지 않으려고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 반대 방향으로 지나가며 마주치는 사람에게 의식될까 봐 시선을 내리깔고 과장되게 몸을 옮긴다. 그들은 내게 얼굴이 없는 사람이다. 아니면 <신곡>에서의 자기의 엉덩이를 보고 뒤로 걷는 죄인들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단테처럼 그들을 보고 동정에 울지는 않는다. 권태가 눈 앞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쓴 글을 그이에게 보여주면 이런 간단한 사건에 왜 이렇게 많은 표현을 들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태도가 눈에 보인다. “하지만 예술적인 글이라는 것도...” 직업이 기자인 그이는 내 글을 중간에 읽다 포기하고선 이런 변명 조의 말을 뒤에 붙였다. 기억이 맥락 없이 떠오르자 걸음이 분절에 나뉘고 힘이 딱딱 실린다. 그따위의 의문은 몇 년도 전에 내가 그이와 같은 어른들에게 묻고 싶었던 그것과 같은 종류라는 말이다! 왜 무한히 권태로운 삶에 우리는 여러 기교를 섞어, 좋은 대학에 들고, 괜찮은 직장을 얻고... 나는 걸음을 멈춘다. 결국 나는 그이의 그 말에, 그 생각에 대답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을 따름이 아닌가. 엄밀히 말해 나는 그이를 ‘어른들’이라고 노골적으로 부를 수 있는 나이가 지났다. 가던 곳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다시 어떤 카페에 앞에서 내 발걸음이 멈춘다. 당연히 일곱 시도 되지 않은 시각에 문은 닫혀있다. 나는 카페의 자갈이 깔린 안쪽 야외 테이블에 앉아 주섬주섬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심술궂게도 나는 이곳 카페의 종업원이 얼마나 부지런하려나 보려는 것이다. 얼마 안 되어서 모자를 눌러쓴 종업원이 팻말을 돌리고, 문을 열고, 카페의 불을 켜는 것을 나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목격한다. 종업원의 성실은 내 기대와 어긋난 움직임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그녀가 나를 봤을지는 또 모르지만, 왜냐하면 나는 그녀의 발만을 주춤한 태도로 책을 열심히 읽는 척하며 시선으로 따라갔을 뿐이기 때문에, 나는 긴장감에 잠시 얼어붙는다.

시간 간격을 조금 두고 책을 접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무 말도 없이, 여전히 시선을 아래에 내리깔고 종업원의 앞으로 다가가 아메리카노 하나를 주문한다. 어색하게 체크카드를 단말기에 꽂는다. 그 과정 동안 나는 종업원이 하나의 기계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곳이 많으니 그리 비현실적인 가정은 아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상투적인 말투의 말을 얼핏 들은 것 같은데, 나는 이제 쓰려니 정확히 어떻게 그녀가 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리에 앉아 잠깐 휴대전화를 확인하고 있으니 종업원이 금방 완성된 커피를 전한다. 내가 거리가 좀 있는 이 카페로 항상 오는 이유가 좀 우스운데 들어 보겠는가? 아메리카노의 맛이 강하기 때문이다. 오, 아니다. 나는 미식가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커피를 마셨을 때 기성품답지 않은 불결한 산미가 없으면 책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면 종업원이 나를 특이하다고 생각할까 봐 두렵다. 그래서 미식가가 아닌데도 전문점을 찾는다.

밖에서 읽던 책을 다시 펼치기 전에 그 표지를 본다. 서툴게 불어의 발음을 추측해본다. ‘르뒤카시옹 상티몽탈’ 사실 그냥 영어처럼 읽어도 읽히지만. ‘더 센티멘탈 에듀케이션‘, ’감정 교육(l’education sentimentale). 이 노골적인 단어는 내게 어떤 기억을 화면의 전환처럼 내게 불러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낙엽 같은 걸 보고도 ‘아 예쁘다~’하고 생각하는데 이런 부분이...” “사고가 과하게 추상화되어있는...” 나는 정신과 의사가 일할 때도 흰 가운이 필수인지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의 말을 내 가족은 열심히 받아 듣고 있다. 나가는 길에 진단서를 살짝 훔쳐본다. ‘상세 불명의 우울 에피소드’ 그 위에는 ‘조현성 성격장애’. 내가 정신장애를 지니고 있다는 말은 어떻게 저렇게 함축될 수 있었는가? 글로는 그 감정이 표현될 수 없으리라.

곧이어 상담가와의 면담이 시작되었다. 여러분들 상상해보시라. 그녀는 캐릭터가 여러 표정을 짓고 있는 카드를 스무 개가량 늘어놓으면서, 매주 요 일주일간 느낀 감정은 무엇에 가까운지 내게 묻고는 하는 것이다. 각 카드에는 기쁨, 흥분된, 감격스러운, 명확해진, 그런 당연한 이름부터 애매한 느낌까지가 늘어져 있다. 감정 교육.

그러니까 사람들이 당연하게 나는 오늘 슬프다. 화가 난다 등의 기분을 나는 둔감하게 자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은 표출되지 못하고 내부에 응축된다. 그것이 그런 충동적인 행동과 언변 혹은 사회적 습관에서의 미숙함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제목이 그 기억을 떠올렸다는 것. 그 사실. 그런데 어쩔 것인가? 내가 왜 세상에 그렇게 불만을 품고 있는지 객관적인 이유를 듣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말해볼 수 있지만 그뿐이다. 그때의 기억은 이제는 교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무거운 권태와 한 편을 맺어 이렇게 사방에서 나를 쪼아대고 있다.

‘감정 교육’의 다음 장을 이어서 읽는다. 지금의 나보다 한살이 어린 나이의 소년 프레데릭 모로가 정숙한 아르누 부인과 사랑에 빠져서... 그런 지극히 프랑스적인 이야기. 나는 이야기가 깊어지며 어떤 종류의 황홀함에까지 사로잡힌다. 여기는 프레데릭과 친구들이 괜찮은 여자들에 관해 얘기하는 장이다. 잠시 나에게 꼭 들어맞는 어떤 상상 속의 여인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여인은 스무 살의, 무척 점잖고, 한량의, 문학에 아주 특출난 취미가 있는, 오냐, 이 계획은 아주 글러 먹었다. 햇빛이 떠오르면서 카페 유리에 새겨진 글자가 책에 그림자로 비친다. 나는 자리를 옮긴다.

주인공 프레데릭은 시와 소설을 조금 쓴다. 아르누 부인과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다가 곧 무위로 되돌려 버린다. 나는 내가 쓰는 글들에 관한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되돌아간다. 언젠가 기자였던 그이도 혀를 내두를 만큼 천재적인 글을 쓰고 말리라... 하지만 어떻게? 그러고 보니 금요일에 글쓰기 수업이 생각이 난다. 그 수업에 나는 단단히 실망한 터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쓰는 것처럼 글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만 톡톡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충분한 경험도 없고 감정을 느끼는 능력도 없이, 어떻게 내가 글로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글들이 있는 한편에 내 글을 적어 내면 그 기자에게 들었던 말을 반복해 들을 뿐일 테다. 그런 세상에 대한... 해묵음과 권태로 가득한 글 말이다.

천재적인... 감동을 주는 글... 나는 생각에 잠긴다. 그래서 이 책의 이름이 왜 ‘감정 교육’일까? 나는 몰래 책의 뒷장을 펼쳐 이야기가 끝나는 부분을 본다. 늙어 사랑하기 늦은 나이가 된 프레데릭과 그의 친구 데로리에는 ‘그때 젊은 날이 좋았지’라며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에필로그를 나눈다. 끝. 그래서 이게 ’감정 교육’이다... 이 말인가?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찾아봐도 그냥 그런 프레데릭의 삶이 ‘감정 교육’이라는 얘기밖에 없다. 조금 허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 옳다. 감정 교육이 필요한 건 굳이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널려있는 정열적인 야망 있는 젊은이들 전반일 게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생각해 보라. 당신의 감정 교육이란 무엇이었는가? 세상에 불만을 사실 벗지고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가는 젊은이 전체들... 그 고민의 형태가 권태이든 사랑의 열정이든 대학이고 직장이든 뭔 대수랴?

감정 교육! 나는 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작은 단서를 떠올린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권태에 휩싸이기 마련. 상담가가 내밀던 스무어개의 카드는 병자에 관한 치료라기보다는 그런 종류의 독려, 내게 제안된 조금 직접적인 형태의 감정 교육일 테다.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하는 고민들은, 내가 쓰는 종류의 글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하잘것없는 종류일 것이고, 그래서 반대급부로 흥미로울 수 있던 것들이다. 내 노력들은 이해하기 어렵고 속 편한 종류의 것들, 하지만 그래서 나만의 감정이 있는 것들.

나는 남은 커피를 다 빨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한 번에 들이키니 산미가 너무 강해서 조금 고생한다. 사실 어른인 티를 낸다고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지 나는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얼음이 조금 남은 컵을 카운터에 반납하자 종업원이 “감사합니다.”하고 말한다. 카페 안은 내가 의식하지 않은 사이에 사람들이 밀려 들어와서 저마다의 이야기로 떠들고 있다. 내가 문을 나서자 뒤에서 작게 “안녕히 가세요.” 소리가 들린다. 그 인사에 반응하기에는 아직 조금 부담스럽지만. 나는 어쨌든 급히 카페 밖으로 나간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몇 주 동안 글을 쓰지 않았거늘, 간만에 막연하지 않은, 아주 확실한 글감이 떠올랐다. 이 심상이 잊힐까 나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확실히 내 글에는 권태 그 이상의 것은 없다... 하지만 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확실히 나는 이런 글도 쓸 수 있고, 언젠가는 바라던 천재적인 작품도 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