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처음 한 평론은 어떤 글...?
꽃을 샀다.
살아있는 꽃 한 송이를 샀다.
굳이 연인, 가족, 기타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저 꽃집의 꽃 한 송이가 내 집에서도 그 녹으로 숨쉬고, 잎으로 빛내고, 궂은 줄기로 나에게 보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느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겹의 잎을 가진 꽃 한 송이와 함께 꽃병, 친절한 사장 아저씨의 조언 몇 마디 까지 내 집으로 들이기로 결정했다.
창가의 선반은 그 위의 두꺼운 책들 말고도 꽃 한 송이 만큼의 무게를 더 일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그 친구인 꽃병과 거기에 채워진 약간의 물의 무게도 함께였다.
아저씨의 친절함은 무게따윈 가지고 있지 않으니 그의 조언에 따라 매일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물들에게 그 의미를 돌리도록 하자.
밖으로 나가기 전에는 거실로 살짝만 고개를 돌려서 꽃병 옆에 창문 옆에 지루한 책들.
비가 오는 날에는 담아놓은 물과 쏟아지는 물과 마른 종잇장 다발.
해가 든 주말에는 투명히 비치는 줄기와 꽃받침 그 위의 잎과 잎과 잎 한 잎 두 잎 나는 분명히 그것을 원했다.
집으로 돌아오고 꽃 한 송이 그대를 보며 어느 날 나는 생각했다.
어떤 일이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나기 쉬운 법이다.
매일 물을 갈아야 하는 것은 성가시다.
차라리 물을 갈기보다 더러운 물 마시기를 꺼리는 그대 꽃 한 송이를 매일 갈면 안 될까?
매일 꽃 한 송이를 사서,
여전히 숨쉬고,
여전히 빛내고,
여전히 보여지는,
그렇게 그렇고 그럴뿐인 당신을 당신 하나 더로 바꿔서 내일 다시 만난다면.
또 다른 하나 더 당신은 창가 밖 마당에 던져두면.
꽃병이나 물이나 선반의 수고로움이나 물을 다시 채운답시고 물그릇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들의 평화를 깨버리기 보다야 차라리.
꽃을 살 돈이라야 죽어도 못 다해낼 만큼 많았다.
꽃을 돌볼 외로움이라야 눈에서 흘러넘칠만큼 많았지만 꽃병 물을 갈아치울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매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겹꽃 한 송이를 사서 오기로 결정했다.
아저씨와는 별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겹겹이 두껍도록 쌓여 군집을 이루는 책들은 매일 물을 가느라 튀곤 하던 물조각들을 맞으며 살지 않아도 된다고 기뻐했다.
창밖으로 꽃을 던지며 더러운 물을 봤다. 한 꽃 잎보다도 많은 꽃 송이 송이들이 흙위에 겹겹이 쌓였다. 나는 날마다 무거워져가는 마당 위 토양의 의미는 누가 보증해주는가 궁금했다.
한 손에는 서류가방 한 손에는 꽃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나는 창가를 봤다.
저녁 석양이 타는 날이면 부족한 빛 때문에 그 안에 든 물의 더러운 이물을 감추게 되는 꽃병과 창문과 그 뒤에 타오르는 석양이 있다.
창문은 그 시절 매일 물을 가느라 튀어버린 그 가증할 외로움 마저 원했다고 내게 소리쳤다.
그러나 모습을 감추는 햇살과 그에게 반사되어 희미하게 눈을 뜬 물은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는 불덩어리들에게 시선을 줄 뿐이었다.
나도 창가로 뛰어나가 그 바깥을 붉게 태워진 허망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러나 내 시선은 말라비틀어져 아래에 다발로 늘어진 꽃 다발, 다발, 다발을 향해 자꾸만 맞춰졌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있다.
거실에 깨져 바닥에 나부끼는 꽃병 조각들과 더러운 물기 가득한 바닥과 모든 것을 위에서 바라보는 창가의 선반과 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방문을 등진 나.
마른 종이 한 장 뿐인 것에 검은 글자가 겹친다.
쓰여진 글자 한 자 한 자마다 외로움에 적셔진다.
...이것이 나의 처음 쓴 글. 당시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가.
약 2년 후, 이 글에 덧붙인 자가평론도 있다.
가짜 꽃, 조화造花인 것이다. 용처는 어떠한가? 가짜를 만들었다면 진짜에 비교하면 나을 일이 있고 못한 일도 있을 것이다. 가짜 꽃은 성가시게 죽지 않도록 관리해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가짜 꽃은 촉감도 불길하고 싸구려는 햇빛을 받으면 가짜라는걸 티내듯이 플라스틱같은 색감으로 반짝반짝 빛나서 없어보인다. 아니, 꽃을 세세하게 돌봐줄 자신감도 없어서 가짜를 원한다는 점에서 싸구려가 에초에 잘 들어맞는것 일지도 모른다. 보통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는 표현을 쓴다. 아름다운 것에는 그에 걸맞는 용기가 있어야한다. 그 아픔도 기꺼이 장미 그 자체로 감수하고서 장미덩굴의 면류관을 쓴 사람은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을 아주 비틀어 본것이 본작이다. 조화는 오직 조화調和만을 위한 것-이 말장난을 떠올려서 본작의 시작이 된것이다, 사실이 그렇다.-아픔과 헌신따위 없다. 자세히 생각하면 장미 면류관은 아름 답지 않다... 현실의 아름다움은 그런 방식이 아니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에 달린것, 어떤 것이 절대적인 관점에서 아름답니 아니니를 따지기 전에 꽃 그 자체의 요소들, 당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까지도 모아서 보아라. 아름답다는 절대감각이란 그런 인상의 집합이 모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미의 본질은 가시. 꽃을 본질로 여기고 아름다움의 절대관만 노리면 이 아름다움은 반드시 시들것이다. 당신이 이 꽃은 아름답다고 재대로 느낄 수 있도록 그것의 희노애락을 올곧이 보아라. 꽃의 본질을 보아라. 오롯이 그것만을 누려라. 정하려고 하지마라. 타인의 좋은 점만을, 아름다움만을. 본작에서는 책, 선반, 창문등이 의인화하여 꽃병 주위의 정경에 대해 다소 소란스러운 표현이 들어갔다. 꽃집 주인아저씨는 이것들과 격이 같은데 아저씨의 비중이 물건들만큼 낮은것이 아니라 물건이 사람의 마음을 지닌듯이 표현을 한것이다. 그런데 꽃 또한 사람인양 묘사하는데 이 꽃은 2인칭, '당신'혹은 '그대'로 불린다. 꽃병의 무게가 더해져 더 열심히 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선반,
"아저씨의 친절함은 무게따윈 가지고 있지 않으니 그의 조언에 따라 매일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물들에게 그 의미를 돌리도록 하자."
의 '물'은 '아저씨'와 동격임을 확인할 수 있고, 꽃에 물을 간다고 젖지않게 되어 기뻐하는 책들, 꽃을 받아들이는 수고또한 나는 원했노라고 비통하게 소리치는 창문.
그러나 '아름다운' 꽃은 2인칭이며 화자의 관심을 독차지해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확실히 사람이지만 화자가 그것을 침묵케 했다.
"꽃병이나 물이나 선반의 수고로움이나 물을 다시 채운답시고 물그릇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들의 평화를 깨버리기 보다야 차라리."
화자는 아름다움 이외에 원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나는 저 꽃집의 꽃 한 송이가 내 집에서도 그 녹으로 숨쉬고, 잎으로 빛내고, 궂은 줄기로 나에게 보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침묵하는 당신, 오롯이 '나'를 위한 죽은 꽃, 말하자면 드라이플라워다. 하지만 화자의 생각에서 아직 죽은것은 아니다. 녹으로 숨쉬고, 잎으로 빛내고, 줄기로 보이고 있다. 그것은 화자의 이상이다. 그리고 곧 그 이상은 만개해서 엇나간다.
"
매일 물을 갈아야 하는 것은 성가시다.
차라리 물을 갈기보다 더러운 물 마시기를 꺼리는 그대 꽃 한 송이를 매일 갈면 안 될까?
매일 꽃 한 송이를 사서,
여전히 숨쉬고,
여전히 빛내고,
여전히 보여지는,
그렇게 그렇고 그럴뿐인 당신을 당신 하나 더로 바꿔서 내일 다시 만난다면.
"
이제 순간의 아름다움을 엿보았다. -순간아 멈추어라, 너 정말로 아름답구나! 인간은 이 순간의 틈새를 엿보며 살아간다. 보인 순간은 현실과 가깝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멀다. 파우스트 박사는 도처에서 신을 본다- 꽃은 피동적인것, 보여지기 위해서 존재한다. 실존보다 본질이 앞선다. 지극히 하이데거 적이다. 이것은 착각이다. 꽃은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은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사랑받기 이전에 부여받은 자연스러움이 있다. 오래 알고 지낸 친우일수록 그를 존중하고 자연스러워 지는 법을 배우지만 새로 사귄 여인은 금방 싫증이 온다. 당신이 그녀를 소유하기 이전에 있었던 이상이 깨어지고 그에 반하여 당신에게 사랑받기 이전에 있었던 자연스러움은 종적을 감춘다. 친우는 평생인 법이 많지만 연인은 오래 가는 법이 없다. 보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당신을 위한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리석게 우리는 원한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망상했을 뿐인 어떤 장면을. 꽃이 자아를 잃어버린다. 우리 안에서 본질인 아름다움만 남는다. 이것이 망상속에서는 아름다워 보였을 수 있다. 조화로 아름다움만을 박제했다. 바로 이 하모니야. 그러나 물은 계속 더러운 채다. 꽃은 매일 대체당하고 있다. 아름다움만 있으면 상관이 없으니까. 우리가 원한 것은 결코 아름다움은 아니었음을 깨닿는다.
"
밖으로 나가기 전에는 거실로 살짝만 고개를 돌려서 꽃병 옆에 창문 옆에 지루한 책들.
비가 오는 날에는 담아놓은 물과 쏟아지는 물과 마른 종잇장 다발.
해가 든 주말에는 투명히 비치는 줄기와 꽃받침 그 위의 잎과 잎과 잎 한 잎 두 잎 나는 분명히 그것을 원했다.
"
선반, 책, 아저씨등이 그 각각의 마음을 가지고 꽃과 함께 한 폭의 정물화를 그리듯이, 그것처럼 꽃도 그것의 방식으로 살아있어야 했다. 계속 화자는 삶을 원했다. 살아있음이 중요했다. 살아있기에 아름답게 보일 수 있었다. 아, 우리는 어째서 살아있다는 사실로만 기뻐할 수가 없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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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두껍도록 쌓여 군집을 이루는 책들은 매일 물을 가느라 튀곤 하던 물조각들을 맞으며 살지 않아도 된다고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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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플라워에는 권연벌레라는 작은 바구미같은 집벌레가 꼬이기 쉽다고 하는데 책을 벌레에 빗대서 '군집'이라는 표현을 썼다. 꽃은 이제 죽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느낌이 너무 애매해서 다시 쓰고싶은 단락이다. 이 권연벌레라는 작은 녀석이 집에 때로 출현해서 기겁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때 찾아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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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꽃을 던지며 더러운 물을 봤다. 한 꽃 잎보다도 많은 꽃 송이 송이들이 흙위에 겹겹이 쌓였다. 나는 날마다 무거워져가는 마당 위 토양의 의미는 누가 보증해주는가 궁금했다.
"
아름답지 않다. 이제는 본질 외에 없다. 우리는 정해진 대로 살아 갈 수 밖에 없다. 쌓여져 갈수밖에 없다. 가끔 나 말고도 수많은 자기자신이 있고 내가 수많은 나에게 짖눌려서 묻혀버린다는 느낌이 들때가 있다. 땅에 누운 꽃들은 본작의 원초적인 모티프다. 방금 떠올린 것인데 이 시의 주제는 지드적이다.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덧붙이자면, 당신의 '그대'를 아무렇지 않게 죽이고 쌓아둔다면 당신도 그렇게 죽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
꽃을 살 돈이라야 죽어도 못 다해낼 만큼 많았다.
꽃을 돌볼 외로움이라야 눈에서 흘러넘칠만큼 많았지만 꽃병 물을 갈아치울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
당신은 외롭다. 돈 말고도 살아갈 이유를 찾고있다. 당신의 꽃에 관한 이상은 이 욕망의 투영인 것이며 그것이 망쳐진다면 당신은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죽는 것이다.
"
한 손에는 서류가방 한 손에는 꽃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나는 창가를 봤다.
저녁 석양이 타는 날이면 부족한 빛 때문에 그 안에 든 물의 더러운 이물을 감추게 되는 꽃병과 창문과 그 뒤에 타오르는 석양이 있다.
...
나도 창가로 뛰어나가 그 바깥을 붉게 태워진 허망한 얼굴로 응시했다. 그러나 내 시선은 말라비틀어져 아래에 다발로 늘어진 꽃 다발, 다발, 다발을 향해 자꾸만 맞춰졌다.
"
어느날 자기 자신을 위해 꽃을 사고, 어느날 매일 물대신 꽃을 갈기로 결심하고,다시 어느날 잃은 생명을 깨닫고 절망한다. 이제보니 내가 어떤 유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보인다. 벌레로 변하고, 엄마가 죽고,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는 이야기들.
"
그리고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있다.
거실에 깨져 바닥에 나부끼는 꽃병 조각들과 더러운 물기 가득한 바닥과 모든 것을 위에서 바라보는 창가의 선반과 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방문을 등진 나.
마른 종이 한 장 뿐인 것에 검은 글자가 겹친다.
쓰여진 글자 한 자 한 자마다 외로움에 적셔진다.
"
이 세상에 모든 깨어진 꽃병들아. 영문 모를 기대에 맞겨지고, 삶을 모조리 빼앗기고, 끝내 깨어져서 외면당할 것들. 이제 바닥과 선반도 죽은 것같이 움직임이 없다. 우리 모두는 외롭게 죽을 수 밖에 없는가. 인간은 결국 꽃이 되어줄 누군가 없이는 성립 불가능한 의지이기에, 오늘도 무익한 절망이 될 사랑이 되풀이 된다.
돌아보며 아주 놀란점은 재재가 한국적 수필들과 비슷해 보인다. 식물을 직접 열심히 기르면 수고가 들어서 보람찬걸~~~ 그런 '수업시간' 수필들을 싫어해서 나는 다르게 생각하노라 쓴 것인데. 그러나 그래도 그런 쓰래기들과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예술은 피학이다. 장미 면류관이 아름답지 않다는건 그런 이유다. 수고했을 때의 기쁨보단 잘못 선택했을 때의 고통과 절망, 그런 인간적인 논지를 얘기해야지. 아름다움이 본질이 아니라 모든 고뇌가 본질이다. 가장 추악한 선택이 반대편에서 거울로 비추어 보면 아름답다.
끝... 학교에 관한 증오가 가득 담긴 마지막 문단도 인상적이다. 아무튼 처음 쓴 글이란 이런 구체적인 형태로 내 안에 남아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어딘가에 직접적으로 남겨 두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