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臥薪嘗膽)

부차와 구천

by 전창훈

불 꺼진 방, 한 남자가 긴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 뾰족한 가시나무 장작에 앉아 무언가를 우적우적 씹고 있다. 한여름임에도 남자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안광으로 방 전체에 한기가 맴돌았다. 그의 손틈에서 흘러내린 소름 끼치는 검은 액체만이 적막을 깨웠다.

그때 누군가 밖에서 인기척을 내며 문 앞에 섰다. 남자는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검을 천천히 뽑아 무릎 위에 두었다. 살기가 안팎으로 맴돌아 짚더미를 제집처럼 헤집던 빈대와 작은 쥐새끼도 숨을 죽였다.


"누구냐."


남자는 나직이 물었다. 인기척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손아귀에 핏줄이 도드라지며 검을 잡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누구냐고 물었다."


인기척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바닥으로 떨어진 하얀 옷 위로 온갖 얼룩이 눈에 띄었다. 몸을 가볍게 한 남자는 검을 들어 올려 횡으로 벨 준비를 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를 베어버리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검에 실렸다. 팽팽한 긴장감이 방을 가득 채우다 못해 터져 나가려던 순간, 인기척이 목소리를 크게 내었다.


"네 이놈 부차! 너는 월왕구천이 네 아비를 죽인 것을 잊었느냐!"


부차라 불린 사내는 번개라도 맞은 듯 제자리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앙다문 입 사이로 흘러내리는 검은 액체에 피가 섞여 나왔다. 잊을 수 있을 리가. 그 치욕스러운 순간을, 그 한스러운 순간을! 부차는 검을 바닥에 내던지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굴욕을! 절대, 절대로 잊지 않았소이다!"


부차가 내지르는 괴성 사이로 인기척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부차는 여전히 주먹을 바닥으로 내려치며 원통함에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울고, 바닥을 내려치며 보냈는지 나무 바닥은 이미 움푹 파여 검붉은 색으로 덧칠되어 있었다.


"월왕구천...! 아버지의 원한을 갚아주겠다. 반드시!"


부차의 원한은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대립하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왕 합려가 월나라는 공격할 당시 월나라는 왕이 죽어 상을 치르고 있었다. 나라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오나라의 대군을 맞이한 월왕 구천은 결사대를 구성한다. 열국지에는 구천이 사형수로 구성된 결사대가 적을 상대하다 집단으로 자살하며 충격을 주었고 그 틈을 탄 기습공격으로 오나라를 패퇴시켰다고 나오는데, 사기에는 그저 '월왕 구천은 결사대로 맞서 싸웠고, 세 줄을 지어 오나라의 진영에 이르러 고함을 지르며 목을 그어 죽였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구천은 오나라의 대군을 막아냈고 오왕합려 또한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새로이 왕에 등극한 부차는 아비가 당한 굴욕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가시나무 장작에 누워 잠을 청하며 스스로를 몰아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방에 드나드는 이에게 아비가 당한 치욕을 이야기하도록 하여 매일 복수심을 불태웠다. 그 갸륵한 심정이 하늘에 닿았는지 부차는 충신이자 당대의 영웅호걸인 오운의 보좌를 받아 복수를 성공한다. 오운은 동병상련, 굴묘편시, 일모도원, 부관참시, 와신상담, 오월동주 등 수많은 고사성어가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니 꼭 기억해두길 바란다.


부차의 복수 이후 구천은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부차의 노비 신세로 전락한다. 구천이 오나라에서 겪은 치욕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구천의 아내가 부차의 첩이 되었다는 등, 충성심을 드러내기 위해 부차의 마부 역할을 하고, 병이 든 부차의 변을 핥았다는 등 다양한 일화가 있지만 이는 소설인 열국지에 기록되었거나 이후 미디어에서 창작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확실하지는 않다. 심지어 오늘 고사성어의 주제인 '곰쓸개를 핥으며 복수심을 키웠다.'의 [상담] 또한 열국지에 기록된 것으로 근거가 불분명하다.


하지만 구천이 복수의 칼날을 시퍼렇게 갈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구천은 충신 범려의 공작으로 겨우 오나라로 돌아와 매일 곰의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했다. 또한 부차가 그랬듯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느냐!'라며 자신을 몰아세웠다. 구천이 단순히 복수심만 키운 것은 아니었다. 범려의 계책을 받아들여 부차에게 많은 재물, 그리고 시이광이라는 미녀를 보내 국정을 소홀히 하도록 만들었고 출산과 결혼을 장려하며 국정 운영에 힘썼다.


부차는 아비의 복수를 이룬 후 목적을 잃은 것인지 범려의 계책대로 점차 사치와 향락에 젖어들었다. 간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충신 오운을 멀리하며 정치를 멀리했다. 권불지십년 화무십일홍이라 하였던가, 하늘은 이번에는 구천의 손을 들어주었다.


"왕이시여! 기회가 왔습니다!"


범려가 밝은 얼굴로 헐레벌떡 들어섰다. 구천은 칼을 닦으며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중이었다. 시간이 꽤나 흘렀지만 오나라에서 겪은 치욕은 도저히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아무 일도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며 그 굴욕적인 순간이 수면 위로 올라와 그를 괴롭혔다.


"... 무슨 일인가."


범려, 그는 충신이었다. 자신과 함께 오나라에서 굴욕을 맛보았으며 그럼에도 자신을 향한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치욕을 옆에서 지켜본 인물이었다. 범려가 입을 열어 오나라에서의 일화를 이야기한다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고 말 것이다. 구천은 검을 내려놓고 복잡한 눈으로 범려를 바라보았다.


"지난해 흉년이 들어 오왕에게 구휼을 요청한 사실, 기억하십니까?"


"기억하고말고, 원수에게 구원을 요청하다니. 그보다 더 치욕스러운 순간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올해는 오나라가 흉작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풍년이고요!"


구천은 범려의 말을 듣자마자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곡식을 주지 않고 즉시 침략을 하라는 뜻이구나!


"그대 말대로 기회가 왔네 그려.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게. 내 친히 부차의 목을 베겠다!"


범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더욱 조아리며 구천을 만류했다.


"아닙니다. 지금 쳐들어간다면 위험한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아직 오나라는 강성하고 여러 제후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눈치만 보는 제후들의 협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찌하자는 것인가."


"가장 좋은 곡식을 보내십시오."


"지금... 뭐라 하였는가?"


구천은 내려놓은 검을 들었다. 감히, 이놈이 나에게 다시금 부차를 섬기라 하는 것인가! 오나라에서 있었던 일은 복수를 위해 참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월도 이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전쟁이란 붙어봐야 아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면 범려, 이놈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고 나를 부차에게 팔아먹을 작정이라도 한 것인가!


"고정하십시오 전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가장 좋은 곡식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냥 보내지는 마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살짝 쪄서 보내주십시오. 올해는 여차저차 넘긴다 하더라도 원래 흉년은 이듬해가 고비입니다. 찐쌀에서 싹이 틀 리가 없으니 이듬해도, 그다음도 오나라에 흉년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때 쳐들어간다면 손쉽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구천은 범려의 말에 따라 오나라에 찐쌀을 보냈다. 부차는 구천이 보낸 쌀을 전국으로 보내 종자로 삼게 했지만 찐쌀에 싹이 틀 리가 없었다. 결국 범려의 계략이 적중한 것이다. 구천은 부차가 회맹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오나라에 쳐들어가 손쉽게 승리를 얻는다. 구천은 살려준 의리를 갚은 것인지, 아니면 살아서 치욕을 맛보라는 의도에서였는지, 부차를 살려주고 백호의 장에 봉하며 복수를 마무리한다. 백호의 장은 지금으로 치면 동장, 이장 정도의 지위로 사실상 왕위를 박탈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후 부차가 자결하고 오나라는 멸망했으며 구천은 오나라를 이어 춘추오패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하지만 복수의 매듭은 다른 방식으로 이어졌다. 영원할 것만 같던 월의 전성기도 구천의 굴욕스러운 과거를 아는 범려가 처형당할 것을 염려해 잠적하고 여러 충신이 자결을 선택하며 끝이 난다. 구천 또한 병사하여 월나라는 이후 초나라에 멸망한다.


와신상담, 복수나 목표를 위해 어떠한 고난도 참고 이겨낸다는 뜻으로 현대에 와서는 복수보다는 시험, 취업 등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열중함을 나타내는데 쓰인다. 노력과 극기의 가치가 퇴색되어 가는 현대 사회에서 와신상담 같은 고사성어의 의미는 너무 폭력적이라며 꺼려지고는 한다. 하지만 삶의 가치는 자신이 정하는 것이고 우리는 고사성어에서 영웅들의 선택을 발견해 이를 이정표 삼아 살아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극기하는 모습으로 와신상담하는 모습도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절영지회(絶纓之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