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한 만큼, 더 깊은 곳에서 돌아온다
어떤 고통은
몰라서 겪는 것이 아니다.
끝내 보지 않기로 선택했기에 겪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무너뜨리는지,
어느 지점에서 영혼의 균열이 시작되는지.
그럼에도 우리는
그 임계점 앞에서 멈춰 선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분석’이 아니라
‘생존’의 영역임을
직관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지식화’하기 시작한다.
이해하고, 설명하고,
그럴듯한 의미를 박제한다.
머리로 납득시킨 뒤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난다.
그러나
시선에서 밀어낸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피한 깊이만큼
무의식의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얼굴로 귀환한다.
이유 없는 불안으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폭주로,
통제되지 않는 신체의 반응으로.
그때 우리는 말한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정말 모르는 걸까.
융은 경고했다.
“무의식은 의식되지 않으면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다.”
끝내 보지 않은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를 바꿔
사건이 되고,
패턴이 되고,
결국 삶이 된다.
우리가 매번 처음처럼 흔들리는 이유는
그 고통이 낯설어서가 아니라,
매번 등 돌려왔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불안을
단순한 기분의 저조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실존적 부름’으로 보았다.
외면해 온 것들이 기괴한 모습으로 떠오를 때,
그것은 자아의 붕괴가 아니다.
그동안 억눌러온
‘진짜 나’의 드러남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통을 이겨내는 ‘승리’가 아니다.
그 감각에 철저히 익숙해지는 것이다.
불안과 공포를
불청객이 아니라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외로움과 고독은
그 화해의 과정에서 지불해야 할
피할 수 없는 통행료다.
피할 수는 있다.
그러나 끝까지 피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사실을 알고도
다시 안전한 망각의 뒤편으로 돌아선다.
그 짧은 회피가
가장 오래 반복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