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을 의심하는 순간, 존재는 노출된다
페르소나는 사전적으로 ‘가면’을 뜻한다. 그러나 이 가면은 필요할 때만 쓰고 벗는 장식품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친 세계를 건너기 위해 태어나는 순간부터 입어야 했던 두 번째 피부에 가깝다.
우리는 이 피부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관계를 위해, 사회라는 거대한 직조물 속에서 제 몫을 하기 위해 강제로 덧입혀졌다. 그래서 이 가면은 이물감 없이 밀착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순간 그것이 곧 ‘나’라고 느껴진다.
사회의 맥락 안에서 페르소나는 필수적인 방어기제인 동시에 치명적인 마취제다.
가면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본질을 내부에 가둔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전장을 누비며 승리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치매에 걸린다.
가면의 봉인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함정
선택권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직업, 가족, 이해득실의 관계망은 우리에게 특정한 얼굴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 압력 속에서 형성된 표정을 두고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고 스스로를 봉인해 버린다.
이 편리한 정의는 자아가 만들어낸 가장 게으른 변명이다. 그 순간 존재의 가능성은 박제되고, 성장은 멈춘다.
우리는 흔히 지식의 축적과 문명의 발전을 성장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때때로 가면을 더 정교하고 매끄럽게 연마하는 공정에 불과하다.
지성이 높을수록, 풍족함이 더해질수록 가면은 더욱 얇고 투명하게 밀착된다.
우리는 그것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마치 평생 안경을 쓰고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시야에 렌즈가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듯,
우리는 자신의 눈이 아닌 가면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균열이 드러나는 찰나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가면이라도 삶의 급격한 변곡점 앞에서는 균열이 생긴다.
극도의 고독, 예술적 몰입, 사랑 앞에서의 무장해제, 혹은 이해득실 앞에서의 노골적인 계산.
사람들은 그럴 때 튀어나오는 본능적인 모습을 보며 ‘본색’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조차 또 다른 겹의 가면일지 모른다.
본인조차 자신이 몇 겹의 가면 속에 숨어 있는지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변하는 것은 가면일 뿐,
존재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윤회나 환생을 논하지 않는다.
다만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경계 위에서, 우리가 그 어떤 사회적 옷도 입지 못한 채 벌거숭이로 서야 하는 찰나가 올 것이라 믿는다.
모든 사회적 지위와 수식어가 탈거된 뒤에도 여전히 남아서 맥박 치는 것.
그것이 진짜 ‘나’ 일 것이다.
의심이라는 첫 번째 해방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지금 내가 내뱉는 말이 나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가면에 녹음된 사회적 대본인지.
안경과 가면은 그것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순간, 혹은 그것에 손을 대어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가면을 의심하는 그 찰나의 불쾌함이야말로 우리가 연기하는 자아에서 벗어나 실존하는 존재와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우리는 어쩌면 평생 가면을 벗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인식이 바로, 가면에 잠식당하지 않고 그것을 운용하는 주인이 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