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 구멍이 난 자들

자아의 외주제작

by 간극

혼자일 땐 약하고, 무리가 되면 강해지는 사람들.

이상하게 낯설지 않다.

오히려 너무 자주 본다.

사회에서는 심심찮게 강약약강의 인간들을 마주한다.


처음엔 그걸 성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혼자 있을 때와 무리 속에 있을 때의 간극은 단순히 태도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의 질'이 뒤집히는 현상에 가까웠다.


야생에서 강한 쪽에 붙고 약한 쪽을 누르는 건 생존의 문법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야생성을 극복하기 위해 설계된 사회다.


이성으로 살아가는 시대에

왜 여전히 동물적인 메커니즘이 반복되는 걸까.


혼자일 땐 소멸할 듯 작던 사람이

무리가 되는 순간 이상할 정도로 비대해진다면, 그것은 채워진 게 아니라 ‘부풀려진’ 것이다.


자아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든다.

무언가를 가져오고, 보여주고, 확인받아야만 안심한다.


반대로 '존재'는 그저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보고

“존재감이 있다”라고 말하지,

“자아감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존재는 애초에 그 자체로 드러나는 고유한 힘이기 때문이다.


강약약강의 흐름 속에 있는 사람들은 이 존재의 힘이 빈약하다.

그들에게 존재의 증명이란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반응을 수집해 완성하는 ‘외주 제작’에 가깝다.


그들은 무리의 크기를 빌려 자신의 빈곤한 실존을 가린다.

그 안에서 뿜어내는 것은 고유한 힘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을 재료 삼아 짓이겨 만든 '피의 접착제'다.


이 끈적한 결합은 누군가를 짓눌러 발밑에 두는 공동의 가해를 통해서만 유지된다.

그 접착제로 서로를 묶어놓고는,

마치 자신의 존재가 거대해졌다는 집단적 과대망상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는 뒤틀린 지도자나 선동가들이 대중을 장악할 때 즐 겨 쓰는 유구한 방식이기도 하다.

공공의 적을 제물로 바쳐 무리의 구멍 난 자아를 하나로 이어 붙이는, 가장 저열하고도 확실한 통제술이다.


저것은 강함이 아니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다.


그들에게 무리란 같은 방향을 보는 동지들의 결합이 아니라, 각자의 빈자리를 서로의 몸으로 가리고 있는 ‘결핍의 연대’다.


결핍이 모여 덩어리가 되면 제법 거대해 보이지만,

그것은 안이 텅 빈 거품의 질량일 뿐이다.


문제는 그 무엇으로도 구멍은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존재의 균열은 밖에서 가져온 부유물로는 결코 메워지지 않는다.


타자를 누를수록 그 자리는 오히려 더 깊은 공백으로 남는다.

그래서 그들은 멈추지 못하고 반복한다.

누르고,

버티고,

다시 누른다.

채워지는 것 없이 자신을 더 비워내면서..

우리는 이런 부류와의 충돌을 피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들은 때로 균열을 감춘 채 도움이나 기회라는 가면을 쓰고 다가온다.

하지만 그 연결이 온전한 관계인지,

혹은 내 존재를 연료로 삼으려는 기생인지 멈춰 서서 물어야 한다.


반대로 존재감이 단단한 사람은 무리나 타인의 힘을 빌려 자신을 전시하려 하지 않는다.

애초에 증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있음 그 자체로 전해지는 단단한 핵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을 피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내 존재의 편이 되어 바로 서 있으려 한다면, 그 오염된 흐름에 휩쓸리지는 않을 수 있다.


강약약강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자리에 생긴 깊은 공동이

타인을 제물 삼아 자신을 증명하려는 비극적인 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그 구멍은,

타자를 짓밟는 발밑의 감각으로는 끝내 메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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