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의 역설

삶은 결핍이 아니라, ‘당연했던 것의 소거’로 무너진다

by 간극

나는 오늘도

내 인생에 무엇을 더 채워야 할지를 고민했다.


어떤 사람과 인연을 이어가야 할지,

무엇이 부족한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채우는 쪽으로 움직인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기를 바라고,

어른이 되면 성공을 원한다.

그다음엔 관계와 안정이다.


인생은 늘

무엇인가를 더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지식은 쌓아야 하고,

메신저 속 친구 목록은

어느새 내 인생의 훈장처럼 계급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계급이 사라질 수 있다는 가정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삶이 무너지는 순간은

대개 새로운 결핍에서 오지 않는다.


이미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

그래서 굳이 의식하지 않았던 것들에서

시작된다.


당연히 다닐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직장,

언제나 내 편일 거라 생각했던 어머니,

늘 나를 우상처럼 바라보던 동생,

힘들 때 말없이 술 한잔 사주던 친구.


그들은 너무 오래 그 자리에 있었기에

소중하다고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던 존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묻지 않는다.

그 자리가 비워진다면,

나는 과연 버틸 수 있을지를.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자신이 없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삶을 더 채우기보다,

이미 채워진 자리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 애쓴다.


인간은

이미 익숙해진 것들에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인생은 분명 채움의 연속이다.

하지만 이미 채워진 자리에 대한 감사를 잃은 삶은

아무리 많은 것을 더해도

결코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우리를 흔드는 것은

부족함이 아니라,

늘 거기 있을 거라 믿었던 것들의

예고 없는 부재다.


그래서 어쩌면

삶은 채우는 법보다

잃지 않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두는 법일지도 모른다.

채움은 늘 내 의지지만, 부재는 늘 예고 없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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