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옆자리

여기 자리 비었나요?

by 데이지

저수지에는 연꽃이 피어 있었다. 빼곡한 연잎 사이로 드문드문 수려하고 고고한 연꽃의 자태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버님, 잠깐 쉬었다 갈까요? 연꽃 좋아하시잖아요!


내가 그냥 가자는 손짓을 하자, 며느리는 다시 자동차의 속도를 올렸다.

- 하이, 대디, 그랜파? 홀드 온 플리즈

- 그랜파, 이츠 대디!


손주가 건네주는 전화를 받아 들자, 아들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 아버지,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벌써 거길 가세요? 어머니는 여기 계신데

왜 아버지 혼자 거길 가시냐고요?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 가족이어도 다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끊자!


나는 창문을 열었다. 20년 만에 느껴보는 고국의 계절을 타고 상쾌한 바람이 전해졌다.

백미러로 며느리가 나를 힐끔 보며 말한다.


- 아버님, 솔직히 저도 좀 놀랐어요. 갑자기 한국에 가겠다 하신 것도 그렇지만

오시자마자 여길 가자고 하셔서. 어머니도 LA에 계신데, 아버님은 왜 한국에...

아들 며느리도 다 거기 사는데 왜요?


- 어미야, 나는 한국에 묻히고 싶다.


- 그럼 어머니는요? 어머니도 한국으로 옮겨 오실 계획이세요?


나의 계획을 가족들에게 이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며느리에게 쪽지를 들키지만 않았다면 혼자 택시를 타고 조용히 올 수 있었을 텐데

모든 것을 공유하고 함께하려는 우리 가족의 문화가 지긋지긋했다.

확실히 아들 내외는 시부모를 과잉보호해 왔다.


논과 밭을 지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다다랐을 때 파라다이스힐이란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손에 꼭 쥔 쪽지를 펼쳐 보았다. 파라다이스힐, 내포면 산 333. 쪽지 속에 이름과 주소가 동일했다.

며느리의 자동차가 언덕 위를 부드럽게 올랐다. 그리고 안정적으로 주차를 했다.

나는 손주가 챙겨주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산세 깊은 곳에 조용히 내려앉은

고요한 자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자리들을 마주한 산과 저수지의 풍광이 썩 괜찮았다.

나는 깊은숨을 뱉었다. 한평생 내 폐에 묵었던 숨을 이 순간 토해내는 기분이 들었다.


- 아버님 여긴 꼭 미국 묘지 느낌이네요!


- 날 잠깐 혼자 내버려 두렴!


나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묘지 쪽으로 내려갔다. 그녀의 이름을 찾아야 했다. 김해옥이란 이름 옆에 장로라는 두 글자가 덧붙여 있었다.


김해옥 장로 1950년-2025년


그녀는 75년의 생을 살다 갔다. 하나의 묘비석 아래 두 개의 자리가 있었다. 그녀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6개월 전 그녀가 다녔다는 교회의 목사로부터 평생 미혼의 그녀가 옆자리를 비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나는 이곳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목사가 전해준 말을 하루에 수십 번씩 곱씹었다.

- 김해옥 장로님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사람이 사는 동안은 어쩔 수 없었다지만

죽어서는 자유로울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죽어서는 원하는 대로 살아도 되는 거 아니냐고.

하나님도 그것을 바라시는 거 아니냐고. 그것은 죄가 아니지 않느냐고.


나는 귓가에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이름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양복 재킷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묘비를 닦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참으로 오랜만에 말을 건네보았다.


- 여기 자리 있나요? 당신의 옆자리.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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