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찾아 270리
김인주
집 떠나는 날 (1)
국민학교 2학년 가을 쉬는 시간 교실에서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고 뛰어다니고 있는데 엄니가 복도에 보였다 옆에 서울 사는 큰엄마도 보였다
큰엄마는 키도 크고 얼굴도 크고 배도 크게 나왔다 아버지의 고향인 함흥에서 같이 피난 나온 형님뻘 되는 분의 사모님이라고 알고 있었다 서울서 전기공사 일을 하여 아주 부자로 산다 하였다
오늘 지금 서울 큰엄마 집에 간다고...
그 순간 나는 입을 닫았고 동시에 귀도 막았다
누구도 나에게 오늘 지금 떠나야 한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나 또한 묻지도 않았다
나는 친구들과 선생님과 울 엄마와 작별인사도 아쉬움의 시간도 없이 아마도 책가방만 든 채 학교를 떠나 시내 가는 버스를 탔다
춘천역까지 갔다 대합실은 사람이 몇 명 없었다 모두 어른들 뿐이었다
형도 있고 남동생 여동생도 있는데 왜 둘째인 나만 보내지는지
아마 내 귀와 입을 닫아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고 보았어도 기억하고 싶지 않아 기억을 삭제했는지 모른다
나는 스스로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렇게 큰엄마와 춘천역에서 경춘선 상행선에 태워졌다 나의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옆에 없었다
나는 소리 내 울지는 않았다 9살이다
서울 큰엄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춘선 기차 왼쪽 차창 밖으로 단풍잎들이 크레파스 색깔로 보였다 어느새 단풍잎은 눈물로 일그러져 있고 차창에 비친 내 희미한 얼굴은 소리 없는 눈물이 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불안한 슬픈 침묵이 용산구 후암동 시장 버스종점 로터리 부근의 나의 새집에 까지 이어졌다
둘째인 너라도 서울 가서 밥이라도 먹고살라고
너는 큰집에 가서 젼기일 배워 살라고
너에게 미안하고 안 간다 할까 봐 미리 이야기 못했다고
나는 다 커서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엄니에게 들을 수 없었다 묻지 않았다 나 스스로 답을 내리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서울 남의 집 살이 (2)
나는 9살이고 갑자기 남의 집에 던져졌다
수없이 많은 날을 맨 가장자리에서 벽을 보고 잤다 우리 집엔 없던 부잣집의 물건들을 보면 더 우울해졌다
나는 학교에 보내지지 않았다
전기공사 하는 큰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일 배우라는 말씀이다 사환이다 나는 하마터면 학벌이 국교 2년 중퇴가 될 뻔했다
큰집에 두 형들과 여동생이 있었지만 나는 친하게 잘 지내지 못했다 풍족하게 사는 모습이 정이 안 갔다 나는 왜 가난해서 남의 집에 빌어 먹으러 왔을까
그 집이 난 불편했고 식모 누나 빼고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듯했다 나의 마음의 문은 오랫동안 늘 닫혀 있었다 식모 누나는 조금 편했다 식모도 춘천 서면에서 왔다고 했다
거의 일 년을 학교를 안 갔다 해가 바뀐 뒤에야 학교에 보내졌다 남산 도서관 밑에 있는 후암국민학교다 책가방은 형이 쓰던 것을 받았다 미술시간에 준비물이 필요했다 앞줄부터 선생님이 검사하기 시작했다 내 차례이다 나는 말없이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 내렀다 나는 아무 핑계도 말하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면 반친구들과 놀았다 다 놀다 각자 집으로 가면 나는 남산으로 올라갔다 집에 가기가 싫었다 남산에는 놀이터 등에서 혼자 다니며 시간을 보내다 어둑어둑 해져서야 집에 들어갔다
매일 저녁마다 종이 곽대기에 네모칸이 그어진 곳에 15집 정도 되는 집을 찾아다니며 큰엄마 도장을 찍고 도장을 받으러 다녔다 어느 날 집에 왔는데 큰엄마 도장이 주머니에 없었다 간이 콩알만 해졌다 겁이 덜컥 났다 식구들 몰래 건전지 플래시를 감추어 들고 나왔다 비는 내리고 어두웠다 나는 플래시를 땅바닥 길바닥에 비치며 내가 다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오르며 도장을 찾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젖은 시장 바닥을 허리를 구부리고 ㅣ. 찾아 나갔다
마침내 굵은 목도장이 내 눈에 띄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한 기적이었다 그날 밤 이불 제일 가장자리에서 벽을 보며 누운 나는 긴 한숨조차도 조심스러운 안도의 잠을 청해야 했다
나는 단어를 주고 문장을 만드는 짧은 글짓기를 잘하였다 큰엄마에게 칭찬을 받았다 학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주는 우등상을 받았다
4학년 1학기가 되었다 큰아버지는 아침마다 용산 한강철교 있는 곳까지 뛰어갔다 오라고 했다 며칠 뛰다가 춥기도 하고 힘들어서 용산고등학교 담벼락 밑에 앉아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가 집에 들어가곤 했다
어느 날 큰엄마가 춘천집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끄덕였다 아무 망설임이 없었다 큰엄마도 되묻거나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후암동 버스종점에서 빵 한 개를 사주시며 가라 했다 나는 혼자 성동역까지 갔다 그리고 춘천역 가는 기차를 타고 춘천역에 내리니 점심때가 지났다 빵 한 개는 이미 기차 안에서 먹었다 배는 고팠지만 빨리 우리 집에 가야 했다
춘천역에서는 신북면 신동리 가는 버스가 없어서 소양로까지 걸었다 나는 책가방도 보따리도 없었다 버스를 타니 앉을자리가 없었다 차가 흔들려 나도 이리저리 쓰러질 듯하니까 앉아있는 어떤 아저씨가 나를 두 무릎 사이에 앉혔다
집 떠난 지 부모형제와 나 홀로 생이별 한지 3년쯤 되는 듯했다 창밖에 소양강이 보이는데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곧 신동국민학교가 오른쪽에 보이면 삼거리다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
집 찾아오던 날 (3)
9살 가을에 낯선 곳 서울로 간 12살 아이는
무정한 잿빛 도시 서울 후암동을 혼자 떠나
경춘선 쓸쓸하고 휑한 춘천 종착역에 내린다
신북면 용산리 가는 버스에서 내리니
바람에 봄비에 삼거리 바깥동네는 허전하고
피다 만 꽃잎이 여기저기 떨어져 흩어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동 북한강은 도도히 남쪽으로 흐르고 강변의 조약돌은 옛 친구들도 없는데 반짝이고 삼거리 정거장 옆 아카시아나무도 거기 그대로 있었다
마을은 배회하는 어린 이방인을 누군지 모르고
어느 집의 아이인지도 모르고 묻지도 않고
우산도 없는데 봄비는 추적추적 내린다
세 들어 살았던 한약방 집에 우리 가족은 없었고 다시 물어물어 용산리 무당네 집을 찾아갔고 잠시 살았던 적은 있다고 했고 다시 신동 삼구 253 군인부대 앞에 동네까지 갔고 결국은 샘밭과 신동일구 사이에 있는 뱀산 귀퉁이에 붉은 진흑벽돌로 방 하나 딸린 부엌 하나 있는 집을 저녁거미 내리기 전 해 질 녘에 찾았다
갑자기 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는 다시 데리고 나갔다 장개울에 물안개 서려 있는 곳에서 부자는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너는 밥이라도 먹고살라고 집 떠나 서울로 보낸 둘째 아이를 잊은 듯 잊고 살던 엄니는 말문이 막히고 잘 왔다고 껴안아 주지도 못한다
어머니는 토담집 부엌 아궁이에 그제사 불을 지펴 궁핍한 저녁 땟거리를 짓는다
에필로그 (4)
9살에서 12살까지는 나에게 외로움과 고통의 시기였다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외톨이였다
평생 나를 아프게 했다 왜 어른들은 친절하게 소상히 설명해 주지 않았나 아니 설명했어도 나는 가족들로부터 버려졌다는 슬픔과 끝내 마음을 닫고 버틴 새집에서의 3년은 평생 고통이 되어 있었다
가족이 원했던 대로 그 시절 남은 가족들은 끼니를 거르고 부잣집에서@ 산 나는 산해진미 잘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해진미가 무슨 소용이었나 나는 눈칫밥을 먹었고 즐겁지 않은 밥상머리에 초대받지 않은 외톨이로 앉아 있었을 뿐이다
내가 시장에서 찾은 목도장은 아직 그 도장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 이동거리를 생각할 때 다시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혹시 못 찾았는데 너무 찾고자 하는 의지 일념이 강해 헛것을 보고 집에 와서는 거짓말을 했거나 많이 혼났거나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봤다 그러나 나는 그날밤 어른 엄지손가락 보다 굵은 목도장의 기적의 발견을 분명히 기억한다
나는 절망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너무 어린 나이에 몸으로 마음으로 배웠다 그 상처는 지금까지도 치유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쓰는 게 치유이기를 바란다 큰딸이 상도동에 산다 상도동에 큰집이 살았었고 한번 들린 적이 있다 상도동 얘기만 나오면 어릴 때 우울했던 기억이 되살아 난다
집에 혼자 오던 날 날은 어둑어둑 해지고 동네개는 짖고 비는 오고 옛집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의 고통과 두려움은 12살 소년에게 너무 가혹했다 그래서 나는 우산이 많다 해가 쨍쨍한 날에도 내 백팩에는 작은 우산이 있다 아직도 비 맞는 걸 극히 싫어한다 트라우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휴가 중에 후암동에 일부러 갔었다 옛날 그대로였다 잃었던 목도장을 다시 찾았던 장소도 확인했다 집도 옛집 그대로였다 학교 가는 길은 좁은 길의 연속이었는데 나는 많은 갈래길마다 무의식 속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 후도 두 번 정도 혼자 더 갔었다 내 의식과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아픔을 스스로 어루만지는 위로하는 행위로 생각했다
내가 집을 칮아 느닷없이 들어왔을 때 어머니는 당황 놀람 미안함 등으로 할 말을 잠시 잃은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좋은 환경에서 행복하지 않은 생활에 대해 둘째인 나에게 평생 미안해하셨다 그래서 그때 이후 늘 어머니는 나에게 밥 먹었니 하고 반복적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아픔을 다시 끄집어 내야 했다 9살 10살 소년을 생각하면 눈물이 계속 난다 카타르시스이기를 바란다
좋았던 과거이건 힘든 과거이건 모두 내 성장의 자양분이 되었다 면역시스템이 되었다
(270리는 후암동에서 찾아간 집까지의 거리 110km를 리로 환산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