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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u Dec 06. 2021

노묘의 시간

5화. 추억은 방울방울

  과묵하고 새침하기만 해 보이는 고양이들도 생애주기 발달단계에 따라 성격 변화가 있다. 개별 고양이들마다 성격차이,  개묘 차가 아기 고양이들일 때는 별로 도드라지지 않는데 이 시기 대부분 고양이들은 (아픈 녀석이 아니라면)   활발하고, 호기심도 많고, 적극적인 편이다. 하지만 3-5개월 차부터는 좋아하는 간식의 기호성도 생기고 놀이 방식에도 특성이 생긴다. 우리 아가들의 경우에는 남아 여아 간의 먹성 차이도 처음엔 거의 없었고 여아인 까망이가 더 많이 먹는 적도 있다가 몸집 차이가 슬슬 나기 시작하는 것은 성묘가 된 이후부터였다. 기억해보면, 아주 어릴 때에는 두 마리가 똑같이 배가 빵빵하도록 모든 먹을 것에 탐닉했고, (지가 앵무새인 줄 아는지) 기회만 있으면 내 어깨 위로 뛰어올랐으며, 어디든 파고들 수 있는 틈만 보이면 온 몸을 날려 숨어들었다.

어깨 위에서도 너무 편안한 까망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까망이는 여전히 호기심도 많고 낯선 이들이 와도 자기 볼일은 다 보는 활동냥인 반면 노랑이는 거실에서 기분 좋게 늘어져 있다가도 초인종 소리만 나면 부리나케 아지트로 숨기 바쁘다. 촉촉한 진 음식과 마른 간식류 양쪽 다 별로 가리지 않는 노랑이에 비해 까망이는 주로 마른 간식에 크런치한 식감을 좋아한다. 두 마리 모두 빗질을 환장하게 좋아하지만 한 마리는 빗질을 해주면 자신도 나름의 보은을 해야 한다고 여기는 건지 꼭 동시에 핥아주려고 하는데 비해 다른 녀석은 그냥 세월아 네월아 몸을 내맡기고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는다.  몸 크기가 너무 작았던 생후 한 달 미만 시점에는 당연히 분리하여 자기들만의 이부자리에서 재웠는데 제법 걷고 뛰기 시작하는 시점부터는 집사 부부의 이부자리로 들어오려고 기를 썼다. 한 마리는 내 목에 자기 목을 대고 누웠고 다른 한 마리는 겨드랑이에 코를 박고 잠들었다. 아무래도 잠버릇 고약한 남집사의 몸부림에 아이들이 다칠까 염려되어 떼어놓고 문을 닫으면 (미닫이 문의 간유리가 시작되는 곳까지 키가 안 닿아) 들여다보기라도 해야겠는지 두 마리가 쌍으로 곰돌이 푸우의 티거처럼 한참을 겅중겅중 뛰는 통에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어쩔 도리 없이 문을 열게 되곤 했다. 그리고는 잠을 설쳐 피곤한 출근으로 이어졌다.

개묘차가 크지 않은 아기 시절, 두 마리 모두 잘 먹고 활발했다. 미세하게 노랑이가 조금 더 적극적이기는 했지만. 암팡지게 물고 힘차게 분유를 먹어줄 때마다 느낀 안도감이란!

  이제 만으로 13살 넘은 우리 고양이들에게서는 찾아보려야 찾아보기 어려운 극성. 지금도 드물게 기분 좋은 날,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 좋거나, 반대로 빗질이 좀 길게 과하다 싶으면 '깨물 깨물'(작은 앞니로 상대를 배려하며 아프지 않게 살짝 무는 행동)을 해주는데 유치가 빠지던 아기 시절에는 상대의 반응에 전혀 경험치가 없었으므로 힘 조절이 되지 않았다. 작은 이빨들 중에도 송곳니만은 제법 길고 날카로워 바늘처럼 파고드는 데다가 공략 포인트도 하필 손끝이나 발끝처럼 아주 고통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곳들이어서 고렇게나 작은 앙징맞은 입으로도 내키는 만큼 진심으로 꽉 깨물 때면 나도 남편도 아주 질겁을 하곤 했다. 오죽하면 이갈이를 하는 기간만큼은 두 마리 모두 이불속에 들여주지 않고 손과 발 모두 두꺼운 이불속에 꽁꽁 숨긴 채 자야 할 정도였다. 다행히 그 기간은 몇 주뿐이어서 곧 편하게 함께 잠들 수 있었고 지금은 오히려 그 부산함이 좀 그립기도 하다.

뭔가 잘 놓여있다면 고양이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음, 나를 위해 준비했군"하며 냉큼 올라앉아버린다. 고양이들에게 눈치라든가 배려, 열등감은 존재하지 않는 인지감정 영역.

   다른 어린 고양이들의 무용담에 비하면 정말 얌전한 편이었지만 그 옛날 아무리 여러 곳에 스크레쳐가 준비되어 있어도 가죽소파의 팔걸이만은 참을 수 없었던지 박박 긁는 통에 새로 인테리어를 할 때는 아예 소파를 없애고 무인양품에서 산 조밀한 커버를 씌운 좌식 의자로 바꿔버렸다. 집사 둘 모두 소파에 큰 애정이 없었던 터라 다행이었다. 덕분에 필요 없는 가구는 최소화하고 공간을 더 확보할 수 있어서 집에는 장롱 세 짝을 빼면 캣타워가 제일 큰 가구였던 시절이 꽤 있었다. 고양이들 덕분에 우리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힙한 사람들처럼 보였으나 실은 치열한 기능적 판단의 결과였을 뿐이다. 두툼한 부피가 있는 물건은 수건 하나조차 하나를 버리면 하나를 더 살 수 있을 만큼 콤팩트한 공간관리를 했으니 말이다.


  최근에야 좀 공간 여유가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남편은 원래의 맥시멀 리스트로서의 본성을 억누르느라 힘들었던 지난 시간에 대한 반작용이라도 하듯 이사하자마자 집에 비례하는 큰 TV와 큼직한 냉장고를 들여놓았다. 자신만을 위해 돈 쓰기 미안했는지 고양이들을 위해서도 방방마다 펫도어를 달기 위해 직접 문짝을 모두 교체하는 사려 깊은 난리법석도 잊지 않았다. 옛집에서도 기존 달려있던 문짝의 하단을 직각으로 잘라내어 투박하게나마 고양이 문을 만들었는데 기대한 것보다 훨씬 그 문이 유용해서 얼마나 스스로 대견했는지 모른다. 그 집을 팔 때도 매수자 신혼부부가 그 문짝에 반해 다른 집보다 우리집을 선택했다고 했다. 삶의 흔적이 묻은 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만 있는 건 아닌 것이었다.  

베란다 햇살 좋은 곳 고양이 자리. 그리고 남집사가 집접 주문 교체한 펫도어. 원래 플라스틱 스윙도어가 말끔하게 달렸으나 우리 고양님들은 머리로 미는 것도 힘들다하여 천으로 교체.

  고양이들과 함께 이사하고, 집을 우리 삶에 맞춰가고, 또 새 집 생김새에 우리 삶을 맞추기도 하고... 그렇게 14년 차를 함께 해오고 있는 동안 나도 남편도 꽤 많은 것을 시도하여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 후 다시 시도하기를 셀 수 없이 해왔다. 그 기간 동안 아이들은 심장조차 미친 듯이 빨리 뛰는, 작고 연약하여 불안하기 그지없는 핏덩이 같은 생명에서 이제는 느긋하고 사랑 많은 듬직한 노묘들이 되어있다. 품새는 여전히 윤기 나는 "털빨" 덕분에 세월의 흔적을 비껴갔지만 그래도 많은 의미를 담은 미세한 눈매만으로도 아이들은 예전의 그 불안한 영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습관처럼 쓰다듬으면 그에 질세라 내 손을 핥는 그 하찮은 주고받음 속에서 이 꼬맹이들은 가끔 내 "보호자"가 되기도 한다. 어느새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지나온 시간에 레이블을 달아 온 것처럼, 또 다른 시간으로 길을 내며 함께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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