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죽으라는 법은 없어요??!!!

by Bravo

동네 어르신들께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들 하셨다. 얼마 전까지도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죽어라 죽어라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나이가 들 수록 엄마가 없었던 내 삶에도 나를 살게 해 준 몇몇 안전기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어려서 할머니의 존재가 내게는 그랬다. 할머니는 7남매의 엄마였고, 과부였다. 그리고 사별한 큰 아들의 딸인 나까지 총 8명을 슬하에 품으셨다.


꽃다운 나이에 사별한 할머니는 재가를 하지 않았다. 인물이 꽤 있는 편이셨는데, 할머니는 왜 새 할아버지(?)를 안 만드셨을까 궁금하다. 로맨스가 한 번도 없으셨을까?



자식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시골집에서 나를 키우며 홀로 사셨다. 그러다 자식들이 이혼을 하거나 불운의 사고를 당해 잠시 쉬러 오면 편안히 맞아주셨다. 어느 날은 이혼하겠다며 울며불며 내려온 막내고모를 잘 먹이고 잘 재운 뒤 다시 돌려보내셨던 기억이

난다.


풀 먹여 주름 곧게 편 모시한복, 하얀 고무신, 비녀 꽂은 쪽머리.. 단정을 넘어 늘 무슨 사명이라도 있어 보이는 차림새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이 없는 과부라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싫어서 행동도 복장도 더 신경을 쓰셨던 것 같다.


그런 점잖고 꽂꽂한 우리 할머니도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일 년에 한두 번 있었다. 여름 방학이면 시골 조부모님 댁으로 놀러 오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방학마다 외지에서 오는 그런 하얀 아이들은 서른 집이 채 안 되는 작은 시골동네에 소소한 이야깃거리와 재미를 주곤 했다. 나도 서울에서 내려오는 남자아이들을 좋아했다.


같이 물놀이도 하고, 고둥도 잡고, 산에도 올라가고, 동네 입구에 있는 바위도 타고.. 그런 모든 것은 내가 제일 잘하는 일들이라 서울 아이들 앞에서는 내가 두목처럼 굴 수 있었다.


잘 놀다가 뭐에 수가 틀렸는지 나보다 한 살 어린 남자아이가 나더러 너 엄마는 어디 있냐고 묻더니 다같이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다이빙도 못 하는 게!’, ‘고둥도 나보다 못 잡는 게!’ 하면서 자존심을 밟아주고 실컷 골탕을 먹여줄 수도 있었지만, 그날따라 맥이 빠졌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서 샌디(또 다른 나의 안전기지였던 시고르자브종 반려견)를 안고 울고 있으니 밭일을 끝내고 돌아오신 할머니께서 나를 보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역정을 내셨다.



사건의 전말을 다 들은 할머니는 마당에 홀로 서서 멍멍이새끼, 소새끼, 돼지새끼 등등 온갖 동물의 새끼는 다 찾아가며 욕을 하시더니, 급기야 며칠을 앓아누우셨다.



할머니 입에서 그런 욕이 나오다니! 더 놀란 것은 바로 어린 나였다. 그 뒤로 나는 그런 비슷한 사건이 있어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스스로 보복하거나 삭히는 법을 터득했다.




할머니가 그 시절 내게는 엄마였고 안전기지였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서 제일 내편이었던 사람은 할머니였던 것 같다.



내가 새어머니를 만나서 행여나 구박을 받을까봐 늘 노심초사였고,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라며 동전이라는 동전은 다 모아서 두 손에 꼭 쥐어주시던 나의 할머니.




세상에서 부는 바람이 하도 차고 시려서 ‘인생 각자도생, 세상에 내 편은 하나도 없어!’라고 외쳐야만 덜 추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생각이 틀렸다. 늘 나를 살리는 누군가는, 무언가는 있었던 것이다.


나는 혼자이고,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만 생각하면서 그 생각에 매몰되어 버리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결핍을 안고 성장하면서도 정서적으로 완전하게 부러지지 않고 내가 나를 이 만큼 돌보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유아기에 나의 자존감을 안전하게 지켜준 할머니 덕분이다. 할머니의 온기로 끓여 주셨던 팥죽이 나에게 살아갈 힘이 된 것이다.


너는 엄마가 없어서 나에게는 더 아픈 손가락이라고, 그래서 나는 무조건 네 편이라고 말해주었던 단 한 사람이 있었다.


맞구나, 죽으라는 법은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