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분싸 그녀의 커밍아웃
나의 작은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친아빠처럼 나를 가르치고 보살피셨다. 아버지의 형제 중에 키도 제일 크셨고, 참으로 훈남이셨다.
천자문은 꼭 외워야 한다며 그날그날 외울 분량을 다 못 채우면 호되게 혼을 내셨고, 내가 돈을 훔치는 짓을 할까 봐 노심초사하시도 했다.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황~~” 동요보다 먼저 천자문을 불렀다. 이불에 소변을 보고 키를 덮어쓰고 쫓겨났던 기억도 있다.
처마 끝에 매달린 제비집에 새끼들이 너무 궁금해서 작은아버지께 물었더니, 대번에 내 호기심을 눈치채고 제비집을 망가뜨리면 복이 나간다며 혼을 내셨다. 복이고 나발이고 궁금해 죽겠는데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다.
작은아버지가 외출한 사이에 긴 대나무로 제비집 아랫부분에 살살 구멍을 냈다. 흙가루와 함께 새끼 네 마리가 후두두 마루에 떨어졌다. 다행히 새끼들이 죽지 않아서 큰벽돌 구멍 속에 감춰뒀는데 결국 발각되어 작은아버지한테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모른다. 지금도 아찔하다. 그래도 아픈 기억이 아니라 행복했던 추억이다.
나는 그렇게 타고나기를 당돌하고 맹랑하게 생겨먹은 아이였다.
비가 오면 낚시를 가야 한다며 꼭 나를 끌고 냇가로 갔다. 동무들이랑 물놀이는 재미있었지만, 작은아버지랑은 영 재미라곤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아버지가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며 공부에 공자도 모르고 천방지축 뛰어 다니는 나에게 거듭거듭 잔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공부를 해야 했지만, 작은아버지는 술을 끊어야 했다. 결국 그 술이 작은아버지를 삼켜버렸으니까. 중학교 시절 나를 보러 오셨던 작은아버지는 아버지랑 술을 마시다가 나한테 잔소리를 좀 했는데 이를 본 아버지가 역정을 내셨다.
서운했던 작은아버지는 그 늦은 저녁에 시골로 내려가겠다며 집을 나섰다. 그러곤 뒷 날 아침 내가 다니던 고교 앞 대로변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뺑소니였고, 나는 지금도 가끔 그 길을 다니는데 마치 꿈인 것만 같다. 내 인생은 참으로 비현실적인 영화 같다.
작은아버지는 많이 배우지 못한 게 한이 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학교도 제대로 없는 이 시골에서 어린 나를 어떻게 가르칠까 고민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형과 형수를 닦달했단다. 덕분에 나는 일곱 살쯤 아버지의 집으로 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서 호적이 없었던 것이다.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아이였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낳아주신 생모님이 돌아가시고 사망신고를 하면서 출생신고도 좀 했으면 좋았으련만. 내가 학교 갈 나이가 다 되어 그 사실을 안 작은아버지는 전라도에서 서울까지 여러 번 오가며 서류상 없던 나를 법적으로 존재하는 아이로 만들어주셨다.
지금도 없던 사람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건 번거로운 일인데, 그때는 증명할 게 더 많았다고 했다. 돈도 꽤 들었고, 작은아버지가 그 일로 애를 얼마나 태웠는지 엉덩이에 종기가 나서 마구 터질 정도였다고. 덕분에 나는 호적이 있는 아이가 되었고 학교에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작은아버지는 나를 위해 오직 한 가지-서류상 존재하는 아이로 만들어 주기- 사명만 마치고 급히 떠난 사람 같았다. 한 철만 피다 바쁘게 지는 꽃처럼 그렇게 어린 내 곁에 잠시 머물다 떠난 두 번째 소중한 인연이었다.
나는 대성통곡하는 할머니와 첫 이별을 하고 일곱 살에 아버지 집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살림살이는 시골집과 진배없이 가난했지만 아빠도 있고 어머니도 있고 언니와 예쁜 동생도 있는 집이 참 좋았다. 나는 5학년 때까지 나의 어머니가 새어머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빠는 막일을 하셨는데 매일 술을 먹었고 주사도 심했다. 그런 남자와 살아가는 어머니가 어린 내 눈에도 한없이 가여웠다. 척박한 상황에서도 억척스럽고 부지런하게 살아가시는 어머니가 존경스럽고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마치 당신이 나를 낳았든 낳지 않았든 상관없이 당신은 무조건 나의 어머니여야 할 것처럼 새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한 아버지가 숙제를 제 때 해놓지 않았다고 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언니에게 심하게 화를 내셨다고 한다. 그 걸 본 어머니가 나와 언니를 차별하는 아버지에게 경고를 해주려고 나를 다시 시골 할머니댁으로 보냈다고 했다.
애 달린 젊은 여자에게 애 달린 가난한 노가다꾼 재혼남과의 가정생활이 쉬웠을 리 없다. 젊은 여자 어머니는 나를 이용해서 아버지를 때리기도 했고, 달래기도 했다. 어떤 날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아버지를 때리는 채찍이 되었다가, 어느 날은 당근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언니는 어머니의 자식, 나는 아버지의 자식, 그리고 동생은 두 분의 자식, 우리는 서로 차별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낳지 않은 딸을 품은 여자의 입장에서, 낳지 않은 딸은 품은 한 남자의 입장에서, 어느 날 새아버지가 생긴 사춘기 딸의 입장에서, 새어머니가 생긴 어린아이의 입장에서,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꼬맹이의 입장에서 각자 어떤 마음일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서로에게 묻지도 않았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이 되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당신은 아빠, 당신은 엄마, 우리는 딸, 너는 내 동생이라고 불러야만 했다. 그리고 반드시 서로 같이 살아내야 한다며 전투적인 태세를 취해야 했다. 좋든 싫든 우걱우걱 씹어 삼키며 어떻게든 서로를 소화해야만 했다.
지금의 다문화 못지않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그때 그 시절 재혼 가정.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갈등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서로 주고받는 상처는 어떻게 사과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언니는 언니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나는 나대로 그렇게 서로를 씹어 삼키면서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언니와 동생, 그리고 나라는 존재 가치가 좀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아버지한테 화가 난 어머니는 난데없이 나에게 보복성 커밍아웃을 해버렸다. 어린 나는 준비도 없이 그대로 날벼락을 맞고 말았다.
“나는 너의 친엄마가 아니라 새엄마다. 너의 엄마는 너 낳고 자궁암으로 돌아가셨다더라. 그러니 나한테 그런 것까지 바라지 마라.“
그날부터 내게는 사랑의 갈증이 찾아왔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는데, 어머니는 내 어머니가 아니란다. 나는 어머니가 닮고 싶은데, 내 피에는 그런 어머니의 피가 한 방울도 섞여있지 않단다. 나는 그런 내가 절망스러웠고, 언니와 동생이 부러웠다.
그날부터 언니와 동생, 그리고 나의 존재가치는 극명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들러리일 뿐. 아무리 그 선을 넘어보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공부를 아무리 잘 해도, 집안일을 매일 해도,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저 늘 어머니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세 번 째 의자에 앉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