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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avo Oct 24. 2024

엄마 없는 하늘 아래

그녀들과 절연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몇 년 동안 새어머니를 찾아 뵈었다. 명절을 보내러 어머니의 집에 가기도 했다. 누가 보면 별 문제없는 집안처럼 보였다. 누가 봐도 내가 어머니의 친딸 같았으니까.



어머니는 우리 집 밑 빠진 독이었던 아버지와 이혼을 하시자마자 빌라 한 채를 구입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이 취업을 하고 집을 한 채 더 구입하셨으니 정말 억척스러운 분이시다.



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어 언니와 내가 뭐라도 해주어야 했다. 나는 공부방을 막 시작했고, 월세를 살던 때라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도 가진 것을 털어 80만 원을 보냈더니 어머니가 말했다.



“언니는 300만원 해줬다. 너는 동생한테 아버지 역할을 해주어야지!”



‘돈이 적다고 핀잔을 주시는 겐가?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이지?’ 나도 받은 거 없이 결혼을 했다. 다니던 교회 사모님이 장롱, 침대, 화장대를 혼수로 해주셔서 그나마 신혼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동생 함을 받는 날 어머니댁에 갔다. 어머니는 함을 받고 제부에게 장모대우를 극진히 해주어 고맙다며 나와 남편을 세워두고 눈시울을 붉히셨다.


‘남편과 나는 푸대접을 했다는 말씀이신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더 좋아질 줄 알았던 내 마음은 더 자주, 더 강하게 아팠다.




어머니는 새 남자친구도 내게 소개해주셨다. 남편과 나는  두 분께 식사도 대접하며 두어 번 더 만났던 것 같다. 이 때는 이 그림이 얼마나 이상한지 몰랐다. 그저 나를 진짜 딸로 여기시는 거라 믿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가족(?)이지 않은가! 어머니는 친딸이 아닌 나에게 굳이 당신의 남자 친구를 왜 소개해주고 싶으셨을까? 아빠가 돌아가시고 후회되는 수많은 불효 중 이 일이 가장 패륜적이라 느껴졌고 두고두고 죄스럽다. 남자친구를 사귀실 수는 있지만 내가 굳이 나갈 자리는 아니였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 지인분도 만나고 하루 자고 간다 하시기에 마음이 행복하였다. 학원일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오니 아이들도 저녁을 해서 먹여주시고 공주님 놀이를 하고 계셨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집(?) 김밥도 싸놓고.



치킨을 한 마리 시켜놓고 도란도란 이야기가 깊어졌다. 그러고 뒷날 어머니가 동생과 사시던 집으로 가셨다. 나는 어머니를 이 정도만 공유할 수 있어도 만족했다.



평일 오후 출근 전에 교회에 가서 홀로 기도를 했다. 그날도 본당에서 혼자 기도를 하고 있는데 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니? 내가 너한테 돈 빌리고 안 갚아서 힘든 적 있었니? 엄마가 네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 하시던데?”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그런 상황도 기억에 없다. 아니라고 악다구니를 쓰며 말했고, 설움이 복받치고 억울해서 엉엉 울었다. 언니는 나를 진정시키려고 알았다고 하더니 그래도 엄마가 없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것이 언니와의 마지막 통화가 되었다.



뒷날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네가 그럴 줄 알았다. 너는 꼭 네가 말을 해놓고 안 했다고 하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나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나는 이미 경험을 통해 그들과 한 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동생에게는 나의 억울한 심정을 전하고 싶어서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내가 그런 말을 해서 얻을 이익이 무엇이 있겠냐고 잘 설명해 주면 동생은 나를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동생도 나처럼 반은 아빠 피니까.



동생은 수요 예배에 가야 한다며 나중에 만나자고 했다. 나는 더 연락하지 않았지만 이를 곁에서 지켜본 남편이 상황이 안타까워 제부에게 다시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뒤로 나는 어머니가 보내오는 카톡에도, 문자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다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는 글귀를 보내셨기에 차단을 했다.



내가 정말 그런 말을 해놓고 기억 못 하는 게 아닐까 괴로워하던 나에게 걱정 말라고 그런 말 하지 않았다고 말해주었다. 어머니가 하도 말씀이 이랬다 저랬다 하시니까 혹시 몰라서 우리의 대화를 녹음했던 것이다.



‘그래, 내가 그런 말 안 했으면 된 거지!’



그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주일에 자모실에서 아이들과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어머니가 교회로 찾아오셨다. 내가 찬양단을 서는데 본당에 없으니 자모실로 올라오신 것이다. 결단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던 참이었는데, 같이 기도하자며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러고는 내 귀에 대고



“너는 세상에 엄마라고 부를 사람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그 말에 내 온몸이 싫다고, 아프다고 반응을 했지만 나는 그런 나의 감각이 맞는지 틀렸는지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주변에 엄마들을 관찰했다. 정상적인 엄마라면 그 누구도 제 자식에게 엄마라고 부를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 또한 우리 딸들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어떤 마음이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간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자고로 부모란 자식들끼리 싸워도 화해를 시켜줄 판인데, 굳이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하셔서 오해를 받게 만드신 의도가 궁금했다. 내 수준에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남편이 조심스럽게 자기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당신의 재산을 처분해야 하는데 내가 있으면 걸림 돌이 되지 않겠냐고. 1/3보다 1/2이 낫지 않겠냐고 말이다. 정작 나는 1/3을 바란 적이 없는데.



이후 나는 수년 동안 아프고 힘들었다. 하루는 선생님들과 식사를 하다가 뒷목을 잡고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갔다. 그날 혈압이 170이 넘게 나왔다.



그렇게 나의 모든 것이 속수무책으로 녹아 버렸다. 맨땅에 흘러내린 액체괴물 같은 나의 자존감을 다시 쓸어 담아 회복되어야만 했다. 나도 지켜야 할 자식이 있는 엄마니까 회복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나는 상담도 받고 책도 읽고 그림도 그렸다.



엄마라는 빈자리에 내가 억지로 끼워 맞춘 한 조각 퍼즐, 새어머니••다만 엄마가 필요했을 뿐인데••남들은 당연하게 다들 갖고 태어나는 그 엄마가 필요했을 뿐이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면 평생 벌어서 엄마를 사리라! 내 장기 하나와 바꿀 수 있다면 엄마로 바꿔 오리라!


이 사건을 기점으로 나는 어머니와 자매들과 연락을 끊었다. 그런데 늘 마음 한 켠에 내가 가족을 안 보고 살기로 했다는 사실이 자책이 되었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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