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의 대화
그날은 유난히 모든 소리가 늦게 도착했다.
사람들의 말은 입술에서 떨어진 뒤 한 박자쯤 공중에 머물다 내 귀에 닿았고,
신호등이 바뀌는 소리조차 이미 끝난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지연 속에서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세계에서 밀려난 호흡을 지닌 사람이란 그런 것이다.
세상과 동떨어져 삶을 영유한다.
헝크러진 에코백을 더듬어 밑바닥에서 줄이어폰을 건져냈다.
이어폰을 귀에 꽂는 순간, 지연되던 세계가 한 겹 더 멀어졌다.
음악은 늘 같은 지점에서 끊겼고, 나는 그 끊김을 반복 재생하며 걸었다.
사람들은 제 박자로 웃고 부딪히며 지나갔지만, 나만이 박자를 잃은 채 보도의 가장자리를 따라 미끄러졌다.
나는 그 감각을 최대한 느끼려 하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밭게 걸었다. 껍질이 반쯤 벗겨진 비닐 밖으로 새어나온 크래커 조각이 손틈에서 부서져 내렸다. 나는 그리하여 그 자리에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부서진 조각들은 발밑에서 사소한 별처럼 흩어졌고,
지나가던 누군가의 구두가 그것을 무심히 밟고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멈춘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를 앞질러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흡은 여전히 뒤처진 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사라진 것들의 소리만 늦게 듣고 있었다.
어지러이 뒤섞인 세계를 도저히 따라가기 지친 오늘이었다.
사라진 것들과 하나 되기로 휘청이는 순간의 끝에 위태로이 서있었다.
일순 세상이 흐른다.
경적 소리는 사방에서 울려대고 조금 늦은 발길을 기다리는 바퀴 따윈 존재치 않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이 인도의 끝이 아니라
이미 도로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숨을 들이마셨지만 공기는 끝내 도착하지 않았고,
지연된 호흡 대신 타인의 급한 숨결들이 나를 스쳐 갔다.
멈출 수 없는 것은 바퀴만이 아니었다.
세상은 기다림을 잃은 채 앞으로만 쏟아졌고,
나는 밀려난 박자로 그 한가운데 서서
뒤늦게, 아주 뒤늦게 살아 있다는 감각을 떠올렸다.
살아있다, 라.
냉소적으로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웃음이 비져 나왔다.
그래. 나는 오늘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야 밖을 나섰다.
확인이라는 말은 늘 사후적이었다.
넘어지고 나서야 바닥의 감촉을 떠올리듯,
나는 늘 뒤늦게 나를 증명해야 했다.
차 한 대가 급히 방향을 틀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갔고,
그 바람에 셔츠 자락이 흔들렸다.
그제야 심장이 제 박자를 찾은 듯 요동쳤다.
아, 이것이구나—
세상이 나를 위협할 때에만 허락되는,
정상 속도의 존재감이라는 것이.
나는 무작정 달렸다.
세상의 끝을 내 눈으로 보고 싶다.
그 누가 지구가 둥글다고 했더냐.
나는 달려 나의 끝을 보려 한다.
한움큼 숨을 들이쉰다.
나는 믿고 싶어.
내가 들이쉰 만큼 이곳의 공기가 줄어 내가 존재했다는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는다는 것을.
폐가 타들어 가는 감각 속에서 시야가 좁아졌다.
건물들은 가장자리부터 허물어지듯 흐려졌고,
아스팔트는 더 이상 길이 아니라 하나의 방향이 되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나는 조금씩 가벼워졌다.
남겨지는 것은 발자국이 아니라 공백,
내가 지나온 자리만큼 비워진 세계였다.
그리고 그 끝에서,
떨어질 줄 알았던 나는
기대와 달리 멈춰 서 있었다.
지구는 둥글지도, 끝이 있지도 않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세계가 나의 속도에 맞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차가운 감각이 손바닥에 닿았다.
희게 출렁이는 강은 끝도 없었다.
난간에 등을 가만 기대어 세상을 들었다.
물은 끊임없이 흘렀지만, 소리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찰랑임은 시간의 언어가 아니라 맥박의 잔향처럼 들렸고,
나는 그 위에 귀를 얹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난간의 냉기가 손바닥에서 팔을 타고 올라와
나를 이곳에 고정시켰다.
도망치듯 달려온 끝이 이 정지라면,
어쩌면 나는 처음으로
세계와 같은 자리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물 속이라면 왜인지 따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한하리만치 당연하다는 감정. 나를 안아줘. 나는 안기고 싶어.
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표면을 조금 흔들며,
마치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난간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안긴다는 것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지금의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은 따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따뜻함은 돌아오지 않는 방식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잠시 더 들었다.
흐르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
그리고 끝내 밀려났으나 아직 남아 있는 나의 호흡을.
세계는 여전히 나보다 빠르게 움직였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공기는 줄지 않았고,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나는 여기에 있었다.
몸을 뒤척이며 나는 그 위에 섰다.
바람결 따라 나도 그처럼 흔들렸다.
추락인지, 낙하인지, 착지인지, 너의 포옹인지.
어느 때엔 이 편이 더 쉬운 날도 있는 거야.
나는 끝내 구분하지 않기로 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결심이 되니까.
대신 바람의 방향에 몸을 맡긴 채
균형이 무너지는 미세한 각도만을 느꼈다.
난간 위의 시간은 이상하게도 길었다.
발바닥 아래로 전해지는 떨림,
강물의 숨, 도시의 잔열이
한 겹씩 포개져 나를 붙들었다.
그리고 알았다.
어느 날에는 내려가는 것보다
서 있는 일이 더 많은 용기를 요구한다는 걸.
그래서 나는 오늘, 이 편을 택했다.
떨어지지 않는 선택,
안기지 않고도 살아 있는 선택.
지연된 호흡이 다시 돌아왔다.
세계는 여전히 앞서 있었지만,
이번에는 나를 놓치지 않았다.
왜 너는 자꾸만 나를 붙잡아서 나를 힘들게 하지?
나의 세상이 두 갈래로 쪼개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붙잡는다는 감각은 늘 타인의 손에서 시작되지만,
끝내는 내 안에서 완성된다.
나는 누가 나를 잡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난간인지, 바람인지,
아니면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인지.
둘 다 나를 나라고 불렀고,
그래서 나는 어느 쪽도 쉽게 버릴 수 없었다.
힘들다는 감정은 선택의 고통이 아니라
동시에 두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붙잡힘이 나를 괴롭히는 이유는
그것이 감옥이어서가 아니라,
아직 돌아갈 자리가 남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라는 걸.
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나는 아직, 위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