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유 Feb 13. 2023

‘paraphrase’

달리기가 우리의 언어라면



:몰입의 부재

제목을 ‘몰입의 부재’라  못 박고 이야기를 한다면 다소 무거워질 거 같아 부과적인 설명을 조금 해본다면, 내가 지금 나열한 분야들은 각기 다른 조각이지만 공통분모라면 나의 취향이 깃든 오래된 취미 혹은 특기들이다. 늘 그렇듯이 무뎌진 일상의 감각을 다시 일깨워줄 일은 많지 않는 일상의 연속이지만 이런 연속성 사이사이에 나 스스로가 찾은 행복들이과  몇가지의 규칙성이 있다.

위스키를 마실 때 나는 주로 후각과 4월에 가장 맑는날 한강물이 흘러가는 듯한 부드러운 목 넘김, 해질녘 한강과도 같은 긴 여운에 집중한다.

향수를 뿌릴 때는 오늘의 일정, 날씨,비가 많이 오는지 혹은 비가 우리의 피부를 시원하게 적셔줄 정도만 오는지에 따라 사용할 향수를 선택하고, 갖고 나가서 읽을 책은 아무래도 지하철3호선 오금행 열차는 시간에 상관없이 ‘어느정도 이상은’ 승객들이 항상 많으니 서서 읽더라도 집중이 잘 될 수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갖고 간다.

글을 쓸 때는  평소 생각나는 것들은 바로바로 그 자리에서 메모장에 창고처럼 여러문단들을 비축해 두었다가 쌓인 것들을 분해하기도 혹은 조립하기도, 위치를 바꿔보았다가 혹은 문장의 틀을 해체했다가 단어를 치환한다던가 어절을 줄일 수 있으면 줄인다던가, 아예 모든 글자를 동전 엎어버리듯이 간단하게  ‘역:[逆]’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진행해야 할때도 있었다.

단숨에 간추려서 쓸 수 있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짬을 내어 조금씩 조금씩 써 내려갔다.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 뛰는가’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때마다 나 자신에게 묻고 답하면서. 그래서인지 그리 긴 글은 아니지만 꽤 시간이 걸렸고 쓰고 난 이후에도 신경을 몰두하여 손을 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의 취미를 축 으로하여, 나 자신의 대해 애둘러 말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이야기 한다는것이 우리 일상에서 그리 쉽게 접할 수 있지는 않았기에 그만큼 정성을 들여 글을 가다듬지 않으면 안 되었고 나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부담 되고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런 글을 쓴 의미를 잃게 되고.

잡을래야 잡히지 않는 미묘한 균형 사이를 방황하는 이 순간에도 여러차례 퇴고를 반복하며 써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에 첫 문장이다.

오랜 시간을 할애하고 몰입하여 머릿속에 구름처럼 떠다니는 단어들과 문장들 생각들을 메모장이든 종이든 -어떠한 형태로든 우선 치환해보는 시행착오-가 수반돼야만 한다.

글을 적어내려갈 때의 나의 모습과 달리 달리기를 할 때  어떻게 몰입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자기절제가 동반 되었다.




| 만약 달리기가 우리의 언어라면

달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내 기준에서 그럴 뿐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가파른 숨이 턱 끝까지 차서 내뱉고 싶다고 그냥 내뱉으면 절대 안 된다. 가끔 러닝을 하는 사람들의 숨소리는 굉장히 불규칙적이다 라고 느낄 때가 많다.  오지랖인 거 알지만 그런 호흡을 들을 때면 나조차 동요되는 기분을 가끔 받기 때문에 내 입장에선 나름 중요한 문제이다. 숨을 어느정도 제어하고 비축해두었다가 한번에 내뱉는 습관이 되어있지 않으면 힘들면 힘들 때  내뱉고 대충 들이마시는 호흡은 아무런 주제가 없이 서로의 자랑만 나열하고 과시하려는 결핍에 잠식된 대화와 다를 것 없다. 하지만 제대로된 호흡이란 우리의 ‘언어’와도 같다. ‘언어’란 것은 내뱉기 전에 키워드를 생각하고 단어를 조합하고 나름에 기준에 맞게 파악한 후에 내뱉는 것처럼. 뱉어내는 날숨을 최대한 절제하여 내 안에 비축되어있는 호흡들이 어떠한 형태의 틈새로라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최소한의 호흡만을 내뱉으며 연주를 이어나가야만 했다-

달리기를 지속적인 페이스로 20분가량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을 하나만 꼽으라면 뛰어난 기초 체력도 중요하지만 사실 들숨과 날숨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꼽을 것이다. 이부분이 스스로가 잘 유지돼야만 한다. 이러한 부분이 말을 삼키는 것보다 뱉을 때 더 신중해야듯이 달리기 역시 날숨(뱉는 행위를 스스로가 조절할 수 있는 능력) 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말하는 언어의 태도도, 달리기에 임하는 태도 모두 비슷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만약. 호흡이 규칙적이지 못해 나도 알지 못하던 틈새 사이로 새어나가게 될 때면 발을 디딜 때에 박자감과 호흡 그리고 몰입하던 생각이 모두 무너져버린다면 모래성 위를  달리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달리기를 하는 동안 이순간보다 더 최악인 상황은 없었다. 이럴 땐 차라리 멈춰서 호흡을 가다듬고 ‘0’에서 다시 시작하는게 훨씬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모두가 잘 알겠지만 달리기라는 것을 정말 즐기면서 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운동 중 하나이다.

‘글’이란 것이 ‘문장’이 되기 위한 가장 최소한의 문장 패턴은 주어와 동사가 있어야 문장이라고 칭할 수 있듯이, 문장처럼 굉장히 심플하고 규칙적인 패턴을 갖고 달리기에 흥미를 빠르게 갖기란 혹은 점진적으로라도 몰입하기란 축구와 농구에 비교하자면 상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축구와 농구는 공만  있다고 할 수 있는 놀이가 아니지만 달리기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신고 있는 신발 하나면 충분하지만 몰입하기란 어려운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4월에 맑은 어느 중순 새벽3시33분에 달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나만의 하루를 밀도 있게 채워주는 모든 취향들의 형태는 각기 다르지만 결국 ‘나’라는 사람에게 스며든 이유는 어떠한 공통분모가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되었다. 만약 그 때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단순히 ‘좋아해서’라는 일차원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더라면 지금처럼 타인과는 다른 자아, 생각, 접근법, 모든 일과 선택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는 나만의 확고한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설사 이런 비판들과 시기질투하는 시선들이 시니컬해보이고 날카로워 보일지라도 세상이 정해놓은 틀이 아닌 자기만의 가치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내 눈에능 훨씬 재밌고 멋져 보인다.

때론 나의 생각이 부정 당하는 의견을 누군가가 낼 때에도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우린 우리대로 나아가면 그만이란 생각을 종종 한다. 세상은 다양한 것들이 다양한 이유로 존재하고 있다. 사람도 다양한 생각과 외모로 존재한다. 우리는 다양한 넓고 많은 그릇이 존재하는 것들으 그 모습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일. 이것을 제외하고 해야할 일은 더 없을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실감’을 믿기로 합시다. 주위의 평판이나 시선은 관계없습니다.

글을 쓰는 자로서도 읽는 독자로서도 스스로가 취향을 고취시키는 사람으로서도 ‘스스로가 느낄 수 있는 실감’보다도 행복한 건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실 이번 주제와 관련 된 이 글의 초고는 이미 작년 여름 서촌 청운동 뒷길에서 삼청동을 관통하는 청와대 길 앞 더운 어느날 그 자리에서 써 내려간 글이었다. 하지만 육안으로만 봐도 다 마시고 그냥 길바닥에 버려진 -텅 빈- 음료캔처럼 글의 살짚이 중간 중간, 문장의 개연성이 듬성듬성 비어 있다는 걸 굳이 끝까지 읽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 인생과 내 취미에 있어 아무리 좋은 주제라 생각을 했지만 쉽게 보여주기가 어려웠던 이 글을 어느덧 스스로가 납득할만큼의 개연성과 나름의 살을 붙혀나가니 나 스스로가 납득되는 글 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다양한 주제의 초고를 써 놓았고 이것들이 나 스스로한텐 납득되기 충분한 글이라고 한들 독자들이 읽었을 때 약간의 ‘?’ 이 떠오른다면 그건 절대 납득될 글이 아니란 생각을 종종 합니다.

그건 오히려 독지들을 괴롭히는셈이 돼 버리는 거죠 그래서 그런지 이번 글의 주제만 약 6개월의 퇴고를 거치면서 느낀 것은  가령 ‘글을 쓰는 행위’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래 내가 갖고 있는 지론이나 문장 생각을 독자들이 쉽게 와닿을 수 있게 풀어내는 작업인거죠

친구들과 나의 생각을 이야기해야할 때, 오해가 생겨 풀어야할 때, 손님에게 이 좋은 제품을 재밌게설명해줘야할 때, 기분이 상했을 때 명민하게 해결해야할 때 등등 일상 생활에 놓인 모든 순간이  ‘paraphrase’ 의 연속일겁니다. 얼마전 만난 지인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퇴고의 퇴고를 거쳐 자연스럽고 간결한 문체를 만들려고 한 것이 보였다’

 말씀이 지금 이야기한 ‘패러프라이즈 인정 받은  같아 이보다   기쁨은 없을 겁니다

.

.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된 것 :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작가의 이전글 Portrait of lady 와 arsnal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