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전자의 시점으로 써 내려가는 나의 오답 노트
요즘 내가 항상 빼먹지 않고 시청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나는 솔로>다. 이 프로그램은 단순히 솔로 남녀가 짝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랑을 통해 결국 사람과 인생을 배워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화면 속 출연자들은 각자의 욕망과 서투름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사실 대중이 이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이유는 결과보다 그 ‘과정’에 있다. 제작진은 짝이 되었느냐 아니냐 보다, 그들이 서로 부딪히고 오해하며 화해하는 날 것의 서사를 집요하게 비춘다. 시청자들은 그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몰입하며 일종의 ‘도파민’을 얻는다. 나 또한 그 도파민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시청자 중 한 명이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왜 저기서 저런 말을 하지?”라며 가벼운 비평을 던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나는 다르다. 본방사수를 할 때면 리모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으로 화면을 응시한다.
나는 요즘 ‘관전자’라는 신분을 버티고 있다.
한때 나는 내 결정이 늘 정답에 가깝다고 믿었다. 선택의 기로에서도 후회 없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깨달은 것은, 내 삶 역시 제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실패한다. 때로는 내 목소리를 분명히 내야 하지만, 결국 더 중요했던 것은 나 자신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일이었다. 다만 관전자라고 해서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각자의 해석과 판단은 모두 다르다.
그래서인지 ‘관전자’라는 위치는 때때로 답답하게 느껴진다. 무언가 평가받는 듯한 패배감,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은 막연한 불안을 견디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런데 이 지독한 관전의 시간을 버티다 보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들이 있었다.
화면 속 한 출연자가 조급함에 못 이겨 상대에게 자기 확신을 강요하는 장면을 보던 순간이었다. 나는 심장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남녀 관계의 문제가 아니었다. 몇 년 전, 오직 성공만을 향해 달려가던 시절의 나 역시 그랬다. 과정 속에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내 논리만 밀어붙이던 서툴고도 오만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인생을 관전한다는 것은 방관이 아니었다.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내 삶의 ‘오답 노트’를 정리하는 가장 치열한 공부였다.
요즘의 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그저 웃어넘기지 않는다. 대신 과거에 저질렀던 오만함과 서투른 대화법을 하나씩 수선한다.
“나도 저랬었지.”
“저 상황에선 저렇게 말했어야 했구나.”
과거의 멈춰버린 내 시간을 재료 삼아, 나라는 사람의 결함을 메워가는 중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아직도 내가 멈춰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는 지금의 이 버팀은 비겁한 도망이 아니라, 다시 무대에 서기 위한 가장 능동적인 준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주인공의 자리에서는 미처 배우지 못했던 ‘객관화’라는 무기를, 나는 이 관객석에서 비로소 얻고 있다.
때로는 관전자가 되어야 한다.
다만 무작정 비판하고 비난하는 관전자가 아니라, 장점을 골라내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관전이어야 한다.
나는 오늘도 관전자의 자리를 묵묵히 버텨낸다. 훗날 내가 지금보다 더 성숙하고 성장한 순간, 나는 이전과는 분명 다른, 조금 더 세련되고 단단한 주인공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 당신이 버티고 있는 그 고요한 시간도, 어쩌면 당신이라는 사람을 가장 아름답게 수선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부디 지금의 주변과 상황을 차분히 관전하며 스스로를 단단히 다져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