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포에서 밤 11시 30분에 출발한 배는 아침 6시에 제주항에 도착했다. 아침 공기는 생각보다 따스했다.
렌터카를 찾기 위해 우린 택시를 타야 했다. 평소 승용차만 이용하다 택시 이용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처음 예약 택시 부르는 일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다. 딸이 알려준 택시 어플에서 예약하고 기다렸다. 참 신기했다. 차가 몇 분 후에 도착하니 차량번호를 확인하라는 것이다. 드디어 우리 택시가 왔고 기사님은 우리가 마지막 손님이라며 12시간 일하셨다 했다. 피곤하실 텐데 피곤한 여력 없이 친절히 안내해 주셨다.
렌트 카를 인수하니 이런 스티커가 붙어 있다 ‘속도를 줄이면 제주가 보입니다’ 너무 공감되는 말이다. 삶의 속도도 마찬가지라 여겨졌다. 조금 느리게 가면 보이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속도를 줄이면 나의 내면과 마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평소 남편의 애칭은 돌쇠이다. 돌쇠랑 제주 ‘돌문화공원’을 갔다.
자연과 문화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는 가장 제주다운 돌 문화공원은 약 28만 평의 부지에 여러 전시장, 갤러리, 박물관, 초가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특히 돌 박물관엔 희귀한 제주 화산석 400여 점이 여러 형태의 모양으로 전시되어 있다. 둥근 모양의 커다란 화산석을 들고 장수 같은 모습으로 사진도 남기니 정말 돌쇠답다는 생각이 들어 살짝 웃음도 났다.
한라산 백록담을 상징한다는 지름 40미터의 ‘하늘 연못’은 하늘 위에 있는 연못처럼 웅장해 보였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는 넓은 평지에 제주의 역사와 마주한 우린 시나브로 스며드는 바람 속에 봄이 묻어나고 있음을 감지했다.
돌문화공원 입구
승마장을 지나갈 때였다. 결혼 당시 신혼여행은 대부분 제주도였으며,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말에 올라 찍은 사진은 그 시절의 상징이었다. 가난했던 그 시절 제주도 여행은 우리에겐 사치였다. 지금은 매년 몇 번씩 제주 여행을 가지만 한 번도 탄 적이 없었다. 한 번은 타고 싶었다. 혹시나 지나치는 말로 “저기 승마장 있네” 한번 말해봤다. 웬일로 슬쩍 승마장에 차를 파킹하는 남편. 소원대로 사진도 찍고 조랑말을 탔다. 말이 통통 뛸 때는 엉덩이가 몹시 아팠지만 내 기분도 통통 뛰었다.
말타기를 뒤로하고 작은 오름에 올랐는데 이 오름은 화산활동에서 생겨난 기생 화산이다. 이런 오름이 제주에 380여 개나 있다고 한다. 제주 구좌읍 송당리에 있는 ‘아부오름’은 나무 테크길을 걸어 10분여 만에 정상에 도착한다. 어린아이들도 오르고 있었다. 분화구가 있는 둘레는 2 키로 미터로 삼나무 등으로 조성되어 있다. 날씨 좋은 날 쉬엄쉬엄 1시간 정도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정상 전망대에서 눈으로 먼저 오름을 한 바퀴 담고 사진 몇 장을 남기고 내려왔다. 제주 날씨는 도깨비 날씨라지만 바람 한 점 없이 따뜻하여 고요함 마저 느껴졌다.
다음날 숙소 근처 제주에만 있다는 돔베국수 한 그릇을 든든히 먹고 하루를 시작했다.
서귀포 시내를 지날 때마다 산지 직송 농장 귤 판매장을 수도 없이 보게 된다. 잠시 들러 요즘 나온다는 레드향을 한 봉지 샀다. 역시 제주는 귤이다 싶을 만큼 달콤했다. 여행마다 간단히 즐기는 귤 맛은 제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확행이다. 마님이 귤을 까서 운전하는 돌쇠 입에 딱 바치는 기분도 괜찮았다. 더 달라고 돌쇠는 눈치도 없이 계속 입을 벌려댄다. 먹다 보니 서귀포 안덕면에 있는 ‘군산오름’에 도착했다.
오름 시작부터 표지판이 진지동굴이 있다고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에는 10개의 진지동굴이 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1945년 일본군에 의해 우리 민간인들의 강제 동원으로 만들어졌다. 미국 폭격기에 대비한 일본군들은 진지동굴을 이용해 군수물자와 보급품을 숨기는 대피장소로 사용하였다 한다. 어제 갔던 성산일출봉 해변에도 진지동굴이 있었다.
가슴 아픈 역사는 곳곳에 있었고 하늘은 고요하기만 했다.
군산오름 정상에는 조랑말 모양으로 만들어진 올레길의 마스코트인 간세 의자가 있다. 이 의자에 앉으니 멀리 보이는 바다가 마치 산 위에 있는 것 같은 그림이다. 더 멀리엔 눈 덮인 한라산, 산방산, 서귀포 일대가 눈앞에 펼쳐졌다. 천천히 숨을 내쉬며 잠시 쉼표를 찍어본다.
군산오름에서
더 깊은숨 고르기를 위해 북카페에 도착했다. 나른한 오후 따뜻한 차 한잔과 책을 보니 졸음이 밀려왔다. 공간을 벗어나 루프탑으로 장소를 옮기니 눈앞에 산방산이 코앞에 있었다.
음료를 놓고 사진을 찍어댔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지울 사진을 우린 참 많이도 찍는다. 산방산 앞 유채꽃바람일까. 따스한 봄바람이 살랑대며 불어왔다.
숙소로 향하던 중 숙소 가까운 공원에 가보기로 했다.
정방폭포 옆엔 중국풍의 ‘서복공원’이 있다. 진시황제의 신하 서복이 제주까지 불로초를 구하려 왔다는 공원과 이중섭 미술관 관람으로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음 날 돌아오는 배에 올랐다.
삼천포항까지는 6시간 소요되는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잠자리도 불편했고, 돌아오는 시간의 지루함은 여객선의 단점으로 남는다.
다음엔 어떤 오름에 올라 볼까. 다음엔 어떤 역사를 만날까. 아직도 제주는 궁금하다. 갈 때마다 새로운 제주를 만나는 기쁨이 솔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