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 시간을 다시 묶는 날

by Polymath Ryan


* 국립민속박물관의 세시풍속사전에 따르면 '구정'이란 말은 일제 강점기 때 처음 나왔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음력을 버리고 양력을 쓰던 일본이 우리 고유의 음력설을 '옛날 설'이라 낮추고, 양력설을 '신정'이라 바꾸며 강요한다.

"고려사"에 근거하며, 조선시대에도 4대 명절로 설날, 한식, 단오, 한가위를 명시했다.


시간의 철학 — 순환과 직선 사이

한국인에게 설날은 단순한 명절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하나의 세계관이다. 근대 사회는 시간을 직선으로 이해한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는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얇은 선이다. 시간은 축적되기보다는 소모되고, 남기기보다는 밀려난다. 성장과 발전, 성과의 논리는 이 직선적 시간관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설날은 다른 시간을 호출한다. 음력의 순환은 해가 끝나는 동시에 다시 시작된다는 감각을 전제한다. 여기서 끝은 소멸이 아니라 귀환이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원에 가깝다. 원은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다시 돌아온다. 반복은 정체가 아니라 지속이다.


이 순환적 시간관 속에서 인간은 고립된 현재의 주체가 아니다. 그는 과거의 연장선이며, 미래의 전제다. 설날은 그 연결을 의식하게 만드는 장치다.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그 마무리 자체가 또 다른 시작임을 체험한다. 설날은 시간을 끊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을 겹치게 한다. 과거와 현재, 시작과 끝이 하나의 장면 안에서 공존한다.


이때 시간은 숫자가 아니라 의미의 밀도다. 우리는 몇 년을 살았는가가 아니라, 어떤 관계 속에서 시간을 통과했는가를 묻는다. 설날은 바로 그 질문이 제기되는 날이다.


존재의 위치 — 계보와 공동체

설날 아침의 차례는 단순한 제의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좌표를 확인하는 행위다. 현대 사회는 개인을 독립된 단위로 이해한다. 자율성과 선택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그러나 설날은 개인을 다시 계보 속에 위치시킨다.


차례상 앞에서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마주한다. 보이지 않는 조상은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를 가능하게 한 조건이다. 설날은 개인을 단절된 점이 아니라, 선 위의 한 지점으로 만든다. 나는 시작이 아니며, 동시에 끝도 아니다.


이 계보적 의식은 시간의 윤리를 동반한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앞선 세대와 이어지고 뒤의 세대에 영향을 미친다. 설날은 존재를 책임의 구조 안에 배치한다. 단순히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위치가 이동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 부담을 함께 짊어진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설날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다음 세대에 남길 것인가.



의례와 현대성 — 균열 속의 의미

그러나 오늘날 설날은 새로운 긴장 속에 있다. 이동의 피로, 명절 노동의 불균형, 결혼과 취업에 대한 질문, 세대 간 가치관의 충돌은 구정을 불편한 자리로 만들기도 한다. 의례는 때로 형식으로 남고, 의미는 흐려진다.

그럼에도 설날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완전히 개인화된 사회라면, 굳이 반복되는 의례를 유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설날을 기다리고, 이동하고, 모인다. 왜일까.


아마도 인간은 완전히 단절된 채로 시간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의례는 불필요한 형식이 아니라, 시간의 공백을 메우는 장치다. 설날은 흩어진 개인들을 다시 한 장면 안으로 모은다. 비록 그 장면이 완벽하지 않고, 갈등을 드러낸다 하더라도, 그 만남 자체는 관계의 실존을 확인시킨다.


설날은 공동체의 이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공동체의 현실을 드러낸다. 갈등과 피로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그 미묘한 긴장 속에서 한국 사회는 여전히 ‘함께’라는 감각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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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은 단순한 명절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직선이 아닌 순환으로 사유하게 하는 장이며, 개인을 고립된 존재가 아닌 계보 속의 한 지점으로 위치시키는 의례이며, 현대 사회의 균열 속에서도 관계를 다시 묶어내는 장치다.


설날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잠시나마 경험한 그 겹쳐진 시간 속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우리의 삶은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이어진 이야기라는 사실을.


어쩌면 구정의 가장 깊은 의미는 여기에 있다.

시간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이어가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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