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출석하는 교회(세종산성교회)에서는 일주일가 특별새벽예배가 진행 중이다. 이번 주제는 '꿈'이다.
아브라함이 거처를 옮기며 순종했던 믿음의 시작이었던 꿈과, 100세 때 얻은 이삭을 번제단에 바치는 순간 다시 같은 꿈을 꾸게하셨던, 그리고 이삭에게도 같은 꿈을 주셨던 순간, 그리고 야곱이 홀로 외로이 광야에서 꾸었던 꿈은 필자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지금도 꿀 수 있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새벽에는 꿈의 대명사 '요셉'의 설교를 들으며 문득 질문이 들었다. 요셉은 자신이 꾼 꿈을 형제들에게 나누며 질투와 시기를 샀다. 심지어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간다. 요셉은 그 꿈이 무엇인지 알았을까? 그는 오직 결말의 이미지뿐이었고 그 사이에 있을 고난은 몰랐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꿈은 이루어졌고, 지금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보고 듣는다.
요셉이 꾼 꿈과 우리가 생각하는 꿈은 무엇이 다를까?
당시 구약 시대에는 꿈과 환상 그리고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원해서 꾼 꿈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신이 설계한 미래가 아니라, 그에게 허락된 미래의 단편이었다.
반면, 우리가 꾸는 꿈은 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이다. 나의 의지와 소망 그리고 설계이다. 이것은 받은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피어오른 것이다.
이 두 꿈은 다를까?
지금 시대에는 계시는 없는 걸까? 아니면 하나님의 방식이 달라진 것일까?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다. 그 의미는 학업 성적이나 학벌이나 직업이 아닐것이다. 학업 성적, 학벌, 직업 등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그 사이에서 수없이 해야하는 선택의 과정이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 현재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냐에 달려있다. 그 선택은 옳고 그름의 문제와 자신에게 이로우냐 해로우냐의 문제 그리고 주변 상황의 문제등으로 결정을 한다.
지금 나의 모습이 바로 그 결정이다. 즉 후회나 시기, 질투 할 시간에 다시 선택을 해야한다. 지금이 끝이 아니기에.
요셉의 꿈의 결말은 그가 결국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아비와 형제들이 자신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아니다. 오히려 꿈과 반대로 가는 방향에서 요셉의 모습이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림 받아 구덩이에 던져지고, 노예로 팔려가며, 어느 장군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억울한 옥살이는 요셉이 꾼 꿈의 증거는 절대 아니었다. 아마 니체보다 더 먼저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했을 수도 있겠다. 받은 꿈에 대한 의심과 원망이 생겼을 것이다. 니체는 신의 침묵, 공백을 인간이 초인(위버멘쉬)이 되어 채워야 한다고 했지만 요셉은 그 침묵에 버텼다.
필자도 불안한 미래에 나의 미래는 더 멀어져 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셉의 버팀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게 했다. 버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수 많은 만남과 상황은 나의 스승이 되며 나의 미래에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그 안에 꿈을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꿈은 어떤 꿈일까? 자신을 위한 꿈일까? 아니면 모두를 이롭게하는 꿈일까?
하나님은 어떤 꿈을 나를 향해 꾸실까?
의심의 시간들을 통과하기까지 현실의 무게와 상황의 고통은 꿈으로 버틸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을 연구하는 인문학에서도 '인간은 꿈을 꾸는 존재'라고 말한다. 꿈을 잃으면 방향을 잃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꿈이든, 내가 꾸는 꿈이든 꾸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꾸는 꿈은 하나님이 주신 다른 방식의 계시가 아닐까?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