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음악, 프랑스의 심장 되다

장 밥티스트 륄리

by Polymath Ryan


1653년 2월, 파리의 한 무대에서 열네 살의 어린 왕 루이 14세가 직접 춤을 추었다. 그가 연기한 역할은 '떠오르는 태양'. 그 무대를 위한 음악을 만든 사람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피렌체의 방앗간 집 아들이었다. 장 밥티스트 륄리, 본명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 이탈리아인이 만든 음악이 프랑스 왕을 '태양왕'으로 만든 순간이었다.


역사는 종종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프랑스 음악의 정체성을 확립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정작 이탈리아 이민자였다는 사실은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사례다. 더 흥미로운 것은, 륄리 본인이 그 어느 프랑스인보다 이탈리아 음악을 적극적으로 배격했다는 점이다. 출신을 버리고 새로운 음악 언어를 창조한 이 남자의 이야기는, 단순한 한 음악가의 성공담이 아니라 바로크 시대 유럽 음악의 충돌과 변용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이탈리아 바로크와 프랑스의 갈등


17세기 유럽의 음악 지형도에서 이탈리아는 단연 선두였다. 오페라라는 혁명적인 장르가 이탈리아에서 탄생했고,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화려한 아리아, 자유롭고 풍성한 장식음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탈리아 바로크의 핵심은 '감정의 해방'이었다. 슬픔은 더 크게 울었고, 기쁨은 더 화려하게 뛰어올랐다.


프랑스는 달랐다.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는 감정의 분출보다 형식의 완성을 추구했다. 이탈리아식의 자유분방함은 방종으로 여겨졌고, 음악은 마땅히 절제와 조화의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고 믿었다. 궁정 문화가 곧 국가의 품격이었던 시대, 음악은 왕의 권위를 드높이는 도구이자 의례였다. 프랑스가 바로크라는 이름조차 거부하며 자국의 음악을 '고전주의'라 부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륄리가 만든 답 — 서정 비극


이 두 세계 사이에서 륄리는 독특한 해법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서정 비극(Tragédie lyrique)'이다.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는 대화 파트인 레치타티보와 노래 파트인 아리아를 명확히 구분했다. 레치타티보는 이야기를 진행하고, 아리아는 감정을 폭발시키는 구조였다. 이탈리아 관객들은 아리아를 기다리며 레치타티보를 참았고, 그 둘의 간극은 극의 흐름을 자주 끊어놓았다.


륄리는 이 경계를 허물었다.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연속적으로 연결함으로써 드라마의 흐름이 끊기지 않게 만들었다. 여기에 프랑스어의 특성을 살린 독특한 낭독 창법을 고안했는데, 그는 당대 최고의 비극 배우인 샹멜레의 대사 처리 방식에서 힌트를 얻었다. 음악이 언어의 리듬과 억양을 따라 흐르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는 이탈리아 오페라보다 훨씬 극적이고 유기적인 음악극이었다.


서곡에서도 륄리는 자신만의 방식을 택했다. 이탈리아의 빠름-느림-빠름 구조와 반대로, 느리고 장중한 도입부로 시작해 빠른 푸가풍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프랑스풍 서곡'을 창안했다. 장중한 첫 음에서부터 왕의 입장을 선포하는 듯한 이 서곡 양식은 이후 바흐를 비롯한 후기 바로크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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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음악 사이


륄리의 음악적 업적은 그의 정치적 수완과 분리할 수 없다. 그는 루이 14세의 총애를 등에 업고 1672년 프랑스 전역의 오페라 상연 독점권을 획득했다. 경쟁자를 제도적으로 차단하고,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가들을 궁정에서 배척했다. 동시대 작곡가 마르크 앙투안 샤르팡티에 같은 재능 있는 음악가들이 륄리의 견제로 활동이 억눌렸다는 비판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음악적 유산은 부정하기 어렵다. 오케스트라를 훈련시키는 데 지휘봉을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이 바로 륄리였고, 현악을 중심으로 한 오케스트라 편성 방식은 이후 유럽 음악의 표준이 되었다. 그의 서정 비극은 라모, 글루크로 이어지고, 나아가 바그너의 악극에까지 그 영향의 흔적이 닿는다.


지휘봉이 발가락을 찌르다


1687년 1월, 륄리는 루이 14세의 병상 회복을 축하하는 〈테 데움〉을 지휘했다. 그는 당시 관례대로 긴 막대기를 바닥에 내리치며 박자를 맞추다가 그만 자신의 발가락을 찌르고 말았다. 괴저가 번졌고, 발가락 절단을 거부한 륄리는 그해 3월 숨을 거두었다. 향년 54세. 음악에 바친 삶을 음악적 도구가 거두어간 것이다.


그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역설이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 음악을 완성했고, 권력을 탐한 인물이 음악사의 혁신을 이끌었으며, 죽음마저 지휘봉에서 맞이했다. 어쩌면 '찌그러진 진주'라는 바로크의 어원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일지도 모른다. 완벽하지 않은 형태지만, 그렇기에 더 강렬하게 빛나는 진주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