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학년칠반의노래3

by 용혀기

나는 공장장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농경사회에서는 생산 활동의 전 과정을 한 사람이 모두 수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결과, 동일한 제품이라도 품질의 차이가 발생했고, 생산 과정을 오래 수행하여 숙련도와 완성도가 높은 사람은 더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숙련된 역량을 기술이라 불렀고, 사람들은 이 기술을 배우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사회는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고, 공장이라는 거대한 생산 시스템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포드의 컨베이어 시스템 발명은 자동화의 시대를 열었으며, 업무의 분업화는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는 한 사람이 생산의 전 공정을 책임지는 대신, 제품의 특정 과정만을 수행하는 시스템으로 변화하며 획일적이고 균등한 제품의 대량 생산을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기술 발달은 문명 발전을 견인했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을 부속품화 하여 존엄성과 자존감에 문제를 야기하는 부작용도 초래했습니다.

생산 라인의 한 지점에 갇혀 동일한 행동만을 반복하게 되면서 인간은 편향적 사고를 가지게 되었고, 급기야 기계나 로봇의 등장으로 산업 현장에서 밀려나 설 곳을 잃는 상황까지 발생했습니다.

전문가 수준까지는 아닐지라도 기술만 있다면 사회생활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나, 공장에서 단순한 행동만 반복하는 그것은 진정한 기술도, 전문성도 없는 기계의 부속품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여러 과정을 힘겹게 수행했던 것에 비하면 도시에서의 단순 반복 업무는 훨씬 쉽고, 인간 본연의 안정과 편안함을 만끽하게 해주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도시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농촌에는 공동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각자가 자신의 삶이라는 공장의 공장장입니다. 생산 라인이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각자의 위치에 역할자들이 배치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생산 라인이 막히거나 결손이 없도록 관리를 해야 합니다.

원활한 원료 공급부터 시작해 공장은 가동되는 것이지요. 이제 경영이라는 단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공장을 경영하듯, 자신의 삶 또한 효율적으로 운영되도록 경영해야 합니다. 공장의 직원으로 끌려 다니며 생산 라인 한편에서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경영의 원리를 배우고 벤치마킹하며 인생이라는 공장을 건실하게 운영해 나가는 것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지향해야 할 방향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으면서도 운영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못하는 공장이 누구나 하나씩 있습니다. 바로 뇌라는 공장입니다. 외부 환경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면서도, 자신의 뇌 공장이 제대로 운영되는지에 대한 관심은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뇌 공장에는 뉴런이라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뉴런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시냅스와 깊은 관계 속에서 협력합니다.

뉴런과 뉴런 사이에 존재하는 시냅스는 원료 공급과 자동화의 흐름을 원활하게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해, 뉴런이 건강해야 공장의 가동률이 높아진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뉴런은 시냅스의 도움이 있어야 원활하게 작동합니다.

우리 몸 안의 모든 정보와 명령을 전달하고 처리하여, 외부 자극에 반응하고 생각하며 기억하고 움직이는 등 모든 생명활동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외부의 자극이나 정보를 받아들여 뇌나 중추신경계로 전달하거나, 뇌나 중추신경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하부기관(근육이나 조직)으로 전달하여 우리 몸을 움직이게 해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뉴런의 역할은 시냅스의 도움 없이는 원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근로자의 복지 수준에 신경 쓰는 것 까지가 바로 공장장, 즉 우리의 역할입니다.

외부 자극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사유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뇌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기능은 단순할 때가 있습니다.

반어법이나 이중부정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안정과 편안함 만을 추구하며 게으르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공장장의 임무는 그런 근로자들이 해태 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독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계발의 과정을 통해 사고의 깊이를 더하고 창의적인 생산을 이룰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극해야 합니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기분이 나쁘다는 표현이나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의 뇌는 나쁘다는 것을 정보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정보는 중추신경계까지 전달되어 우리 몸은 폭력적이거나 통제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편안하지 않다는 것은 불편하거나 기분이 나쁘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편안하지 않다는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우리 뇌는 편안이라는 글자에만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진정한 의미는 탐구하려 하지 않고 그저 편안이라는 정보만 받아들여 전달합니다. 그래서 우리 몸의 반응 또한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는 쪽으로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삶의 목적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지만,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이 편안해야 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잘못된 삶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과거는 불안을 불러오고 미래는 두려움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공장이 건강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근로자들이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공장장의 역할이 그보다 더 중요합니다. 좋은 원료와 잘 정비된 생산라인, 그리고 건강한 근로자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의 공장주변을 돌아보고 허물어지거나 비뚤어진 곳은 없는지 살펴봄으로써 나의 공장은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를 예방하고 대비함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아무런 걱정 없이 나의 이상을 펼치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습니다. 어쩌면 아직도 그 염원을 안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인생에서 걱정이란 단어는 평생 동반자처럼 따라다니는 듯합니다.

하지만 걱정은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를 넘어, 예방과 대비라는 중요한 함의를 품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잘해보고자 하는 의지,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하는 과정이 바로 걱정이라는 단어 속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물론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이기에, 걱정한다고 해서 당장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오늘의 문제 해결에도 벅찬 와중에 내일을 걱정하곤 합니다.

혹자는 이를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라 말하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예방과 대비'는 분명 우리가 지향해야 할 중요한 덕목입니다.

물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고 대비하기보다는 지금 당장의 문제 해결에 집중하자는 주장에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이 지나야 내일이 오듯, 오늘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비로소 내일의 문제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문제가 내일 맞이할 문제와 연관될 수는 있지만,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순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주어집니다.

단지 지금의 고통과 방황이 과거의 미흡한 대비로 인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는 느낌을 줄 뿐, 세상의 순리는 때를 가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살면서 마주하는 문제들을 미루거나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내일의 문제까지 걱정하며 불안만 가중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는 의미로 내일은 내일 걱정하자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예방과 대비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옵니다.

다음 주 미팅에 대비해 예상 질문을 준비하고 프로젝트 자료를 챙기는 것이 원만한 계약 성사로 이어지듯 말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마무리해야 할 서류들입니다. 따라서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에 맞는 대비를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미래를 예방하고 대비함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미리 준비함으로써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더 잘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하나의 전략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도한 걱정은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로 이어져 현재의 문제 해결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실타래가 엉키면 내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충분히 대비하지 못해서 오는 불안감은 스트레스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철저함은 좋지만, 과도함은 해로울 수 있습니다.

자기 계발서에서 말하는 걱정과 불안에 대한 이야기는 다분히 이론적이거나 이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답은 적절한 조화와 균형에서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조언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일 것입니다.

우리가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내일은 지금의 현실과 연속선상에 있기에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것이 아직 다가오지 않은, 예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현실과의 괴리가 느껴집니다.

한가하게 삶의 목적을 찾거나 미래의 희망적인 부분만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 현실적인 걱정을 쉬이 내려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맞닥뜨리는 문제 해결에 과거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까지 더해진 상황에서 내일에 대한 걱정까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 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막상 지나고 나서도 걱정만 더해지는 듯한 기분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을 아예 안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걱정이 불안과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이는 다른 문제 해결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걱정은 하되, 긍정적인 희망을 담아 준비하고 대비하자는 것. 그것이 우리가 걱정을 대하는 현명한 자세일 것입니다.

계획한다는 것은 날마다 마주하는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매일 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행동합니다. 비록 완벽하게 일과표를 작성하고 철저히 시간을 조율하며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속에 저마다의 계획을 품고 살아가고 있지요.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어제 미처 마치지 못한 일은 없는지 떠올리며 나름의 계획을 세웁니다. 그 과정이 순차적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하루가 저물 즈음이면 다시금 내일 할 일들을 계획하고 있고요.

오늘이 유난히 바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내일의 중요한 일까지 미리 당겨 처리했기 때문일 겁니다. 내일만의 계획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긴급한 우선순위의 등장으로 인해 그 계획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 것이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오늘이 더 분주해졌고, 그렇게 우리의 오늘은 내일과 긴밀히 연결되어 살아갑니다.

아무리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 해도, 현실에서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돌발 상황들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세부 계획을 미리 세우기도 불가능에 가깝죠. 그럼에도 우리는 이미 계획된 일들을 신속하게 처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일정 기간과 절차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하는 일들은 때로는 신속한 처리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수까지도 유연하게 감안한 계획을 세우고 민첩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무계획한 상황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일 서울에서 예정되었던 미팅을 앞두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미리 마무리하느라 정신 없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세상의 일은 결코 단 하나의 단계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순차적으로 진행하다 보면 오늘의 1단계 과정에서 어제의 3단계 과제가 불쑥 나타나기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0단계 문제와 마주하며 걱정 할 수도 있습니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과정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죠. 어제가 지났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과 내일로 끊임없이 이어지며 새로운 일들과 마주하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던 중, 서울 일정이 갑작스럽게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서울로 출발하려는 직전에 개인 사정을 이유로 취소 통보를 받았죠.

이 상황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만, 오늘은 계획에 집중하기로 하겠습니다. 사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인데,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 아니라면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습니다. 프로젝트 논의를 위해 자료를 철저히 준비했는데, 혹시 프로젝트 자체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염려가 스쳤습니다. 동시에 '그럼 오늘은 시간이 여유 있겠네?' 하는 생각도 들었죠. 실망감, 허탈함, 그리고 잠시 스치는 분노의 감정을 뒤로하고, 이내 현실을 받아들이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시작된 하루였지만, 여느 날과 다름없이 수많은 문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계획하지 않았다고 해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죠. 어제의 문제들이 단계를 거쳐 오늘로 넘어왔고, 며칠 전의 마지막 단계가 바로 오늘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계획했던 일과 예상치 못한 일들이 겹치며 오늘도 항상 바쁩니다. 심지어 오늘의 계획이 취소되었다 해도, 정리되지 않은 과거의 문제들과 불시에 등장하는 새로운 문제들 속에서 또 다른 의미의 무계획적인 하루를 보내게 되고요.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내일을 계획해야 합니다.

결국 계획한다는 것은 날마다 마주하는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계획을 세우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처리해야 할 일들은 매일매일 쏟아집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그 모든 것을 다 처리할 수는 없기에, 때로는 미루거나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계획이 필요한 것이죠.

현명한 지혜를 발휘하여 일의 중요도와 시급함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계획의 핵심입니다.

나의 경우,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과의 약속은 늘 최우선으로 계획합니다. 반대로 관계가 건강하지 못한 사람과의 약속은 미루거나 정중히 거절할 핑계를 찾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처럼 계획이라는 것은 단순히 해야 할 일들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 속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어떤 관계를 소중히 지켜 나가야 할지에 대한 현명한 우선순위의 지혜를 담아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일같이 예상치 못한 일들이 쏟아지고, 때로는 마음대로 되지 않아 좌절감을 느끼는 순간들도 찾아오겠지만, 우리가 설정한 이 지혜로운 계획은 혼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나침반이 되어줄 것입니다.

진정한 계획은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하며 우리가 추구하는 중요한 가치를 지켜 나가는 태도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무수한 계획 속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지혜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세상일을 헤쳐 나가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문제와 사건에 마주했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처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뜻일 것입니다. 단단히 마음먹고 포기하지 말라는 강력한 격려의 메시지가 담겨 있죠.

우리는 이 말이 진실이라 믿으며, 마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어 죽겠다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왜 일까요?

잘해보려 마음먹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결과와 예측 불가능한 미래는 우리에게 불안감을 안겨줍니다. 대학 입시를 앞둔 시절, 선생님께서 "삼 년만 죽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해라. 그러면 나머지 삼십 년 인생이 편안하다"고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합니다.

그 시절에는 그 말에 담긴 시대적 상황과 대학을 나와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설령 해결하지 못할 일이라 해도, 도전의 용기만큼은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상상합니다.

뜨거운 열망과 도전 의지는 높이 살만 하지만, 동시에 안 되는 것은 안 된다는 현실의 벽 또한 내면에 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드러내기를 꺼립니다. 실패로 간주될까 두려워 서입니다.

공동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법과 원칙, 그리고 관계 속의 계급 구조. 이 모든 것을 만든 것도 인간이고, 이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에 때로는 절망하는 것 또한 인간입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제도 속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지 못할 때 찾아오는 절망감은 자명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성공을 갈망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성공을 향한 삶을 그리며 노력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만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가능성과 희망이라는 감정에만 주의를 기울입니다.

열심히 하면 무조건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결과와 무관하게 도전을 감행하려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길이라 여기며, 때로는 위선을 들키지 않기 위한 편법까지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직장생활에서 성공은 곧 승진으로 여겨집니다. 승진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업무 능력을 키우고, 모든 일에 열정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자신의 의지로 조절하여 통제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승진을 바란다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승진을 결정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상사입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업무에 충실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성과를 올려 승진 결정권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일 뿐 상사의 마음까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공에 대한 열망만으로, 승진을 향한 방법을 달리 적용하려 합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들기도 합니다. 정공법이 아닌 이면 공격을 서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힘들고 괴로워하는 이유는 대부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 때문일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행동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임에도 불구하고,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통제권을 얻지 못할 때 오는 불안과 고통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우리는 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까지 넘보면서 삶을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통제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확장 시켜 줍니다.

무엇인가를 통제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고, 이러한 안정감은 곧 생존을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당장 필요 없어도 일단 소유하고 보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생존 본능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소유를 통해 느끼는 안정감은 물건이나 권력의 통제권에서 확보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 통제하려는 욕망이 지나칠수록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기 위한 시도는 결코 녹록지 않으며, 그런 시도의 실패는 깊은 자기 무력감으로 이어져 앞으로의 삶에 불안 요소로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또한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를 멈추지 않는 것은, 투자한 노력에 비해 더 큰 힘, 즉 통제권을 얻을 수 있고, 그 통제권이 더 많은 선택지와 더 많은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계발의 중요한 과정 중 하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함양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는 긍정의 사고가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맹목적인 낙관주의와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긍정은 결국 좌절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자기계발은 결국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명확한 구분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기르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아직도 주변에서 인간관계를 내세우며 자신의 통제권을 과시하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이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을 관계를 이용하여 간접적인 통제권을 얻으려 하는 시도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지혜입니다.

만약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생각과 행동에 집중하고,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내가 불안해하고 방황하는 이유 중에, 혹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붙들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만, 그 마음은 현명한 지혜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 사이에서

건강한 균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따금씩 밀려드는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들은 깊은 고뇌의 심장을 건드리곤 합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다"라는 말을 맹신하며 오직 앞만 보고 달려왔고, 마침내 부를 이루었지만 행복하지 않다는 드라마 속 대사는 저를 다시 혼돈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많은 부를 축적했음에도 행복하지 않다는 드라마 속 회장님의 독백을 들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지' 라고 말하는 그 회장님의 어머니에게 동의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합니다.

가난했던 시절을 겪으며 삶의 진리를 깨우쳤다는 경험자들의 말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경제적 자유에 대한 갈망에 목말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제적 자유를 누릴 만큼 성공했음에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결국 성공에 이르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음을 뒤늦게 후회하는 목소리입니다.

인생에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없기에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성공의 정상에서, 놓아버린 다른 한쪽(가족, 자존심, 심지어 양심까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죠.

돈을 위해 기꺼이 버렸던 이 모든 것들 앞에서, 결국 우리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의미와 가치였다는 뼈아픈 깨달음인 셈입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라는 말들은 의미론적으로는 옳다고 여겨왔습니다.

자기계발에 매진하면서도 나의 삶을 돈보다는 의미와 가치에 집중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결국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성공이며, 그 성공의 가장 확실한 증표는 돈이라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힙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을 소유해 본 적이 있었던가요?

엘리트 소리를 들으며 전교 1등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요?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닌 줄 알면서도 우리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합니다.

행복이 성적순이 아닌 걸 알면서도 1등 한 번 해보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이런 말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려는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에 우리가 그동안 동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런 말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맥락에서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아직 그만한 위치에 도달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속 회장님의 독백처럼,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아픔을 주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의 대가로 치렀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는 것이죠.

행복과 돈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공식은 성립됩니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그 자리에 가보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그의 저서 『용서』 에서 우리 삶의 최종 목적지는 행복이며, 그 행복은 자비심과 이타주의가 만들어준다고 말합니다.

성인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속세에서 현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일 따름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상호의존성의 원리가 작용하므로, 타인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결국 자신의 행복을 위하는 길이라는 가르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깨우침이 부족한 내가 이해는 한다지만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나는 성인이 아니다 라는 사실이 합리화되는 것이죠. 하지만 나는 행복한 삶을 간절히 바라고 있고, 그것을 위해 오늘도 늦은 시간까지 자판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많은 부를 이룬 사람들의 성찰에 마냥 부러움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공에 대한 열망 자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돈이나 성적이 우리 삶의 행복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물질적 성공 외의 다른 가치들 또한 추구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충분한 돈이 있다면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문제나 어려움을 해결하기 쉬운 것이 사실이고, 성적이 좋으면 더 많은 성공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자기 합리화 적인 말에 현혹 되지도,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필요한 요소들을 외면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나 더러 어쩌라고!"라는 외침은 이 모든 현실적 고민들이 응축된 질문이겠죠.

결론적으로, 조화로운 균형이 중요합니다. 돈이나 성적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한 수단으로서 돈은 분명 중요하며, 성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자선 사업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고, 성적이 좋은 사람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인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돈이나 성적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여 다른 모든 소중한 가치들을 희생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라는 말들은 어쩌면 우리 자신에게 주는 핑계일 수도 있지만, 다시 한번 힘을 내보자는 따뜻한 위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 말들에 담긴 진정성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 사이에서 건강한 균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을 핑계로 들을 지, 위로로 들을 지는 각자가 자신의 주파수를 어떻게 맞추느냐 에 달려 있습니다.

위기의 부재는 결국 남에게 끌려 다니는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독서 란 작가와의 대화이다. 이 말처럼, 책을 읽는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한 인격체와 깊은 소통을 하는 일입니다. 작가 또한 우리와 같은 사람이고 감정의 동물인지라, 때로는 저자의 생각에 깊이 공감하고 때로는 다른 관점에서 자신의 사고를 확장하게 됩니다.

막연했던 생각에 대한 경각심을 얻거나, 미처 깨닫지 못했던 통찰을 발견하는 경험은 독서가 주는 큰 기쁨일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주체적이지 못한 채, 공동체 사회의 평균적인 생각에 휩쓸려 넘어갔던 순간들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독서를 통해 그러한 생각들을 발견하고, 우리 내면의 나 다움을 찾아가는 노력 또한 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공동체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왔습니다. 자기만의 이익보다는 상호 존중과 의존의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을 배우고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인간 된 도리를 다하며,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겸손함을 미덕으로 삼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미덕이며, 순종을 넘어 복종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 내일의 희망을 가져다 준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지금의 현실이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세상의 많은 목소리는 그저 참고 기다리라고만 합니다.

그러는 사이, 나라는 존재는 타인의 시선만 바라보며 나를 구원해줄 시간만을 기다리는 돌부처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나 다움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목소리들 마저도 내 안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는지, 정작 나 자신은 나 다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때리는 사람은 불안해도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잔다"는 말에 하염없이 자신을 낮추고 참아내며, 스스로를 속박하는 경향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에게는 자기만의 고유한 모습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 다움 입니다. 단순히 외모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 안에 품고 있는 또 다른 나를 정립해 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주어진 역할과 평균적인 삶을 통해 안정된 그림을 그리는 것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다움의 모습은 늘 가슴속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중 속에 섞여 밀려나지 않는 중간자 적인 삶을 살면 당장의 위기를 피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한 안정된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지만, 그 골의 깊이는 아무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내리막길이 삶의 전부가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평탄한 길을 걷다가 언덕을 만나거나 개울을 만나는 것을 우리는 흔히 위기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나 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위기는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밀어닥친 현실의 난관만이 진정한 위기가 아닙니다. 진정한 위기는 나 다움을 찾으려 하지 않는 것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이렇듯 위기의 부재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목표나 가치, 신념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자문하며, 내면의 자아와 끊임없이 논쟁해야 합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속절없이 세월만 보내다 어느새 성장해 버린 몸에 어른이라는 포장을 씌운다고 해서 진정으로 어른다운 것이 아닙니다. 나 다움이 선행되지 않았고, 어른 다움에 대한 과정 마저도 생략된 삶은 아닐까요.

세상의 문화가 이러한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고, 우리는 세상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고 토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 다움은 이러한 사회문화를 거부할 수 있는 용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제는 선택의 순간입니다. 지금껏 선택된 삶의 과정을 수행하느라 수고했다는 위로보다는, 지금이라도 선택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건네고 싶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며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이러한 용기의 발현 이야말로 나 다운 삶의 진정한 시작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을 보이고,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잡고, 내가 세워야 할 가치관을 확립하기 위해 길을 걸어야 할 시간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니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할 것입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지속성입니다. 멈추지 않는 성장과 발전의 노력은 나 다움을 실현시켜 줄 것이며, 가치 있는 삶의 정점에서 진정한 행복을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

마음속에 응어리진 생각들이 글로 쏟아져 나올 때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지만, 멈추지 않음이 정답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마음에 동화되어 내 마음의 소리가 바뀌기도 하지만, 이 또한 나 다움을 찾기 위한 소중한 여정임을 믿습니다.

살면서 일부러 위기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지만, 위기는 언제든지 밀어닥칠 수 있다는 생각은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위기의 부재는 결국 남에게 끌려 다니는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내 삶이고 내 인생이니, 당연히 내가 주체적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오늘 바라본 하늘의 모습은 가을로 가는 차표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기차에 오르려는 여름을 굳이 붙잡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가을로 가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피어나는 나 다움을 내려놓지 않은 채 말입니다. 늦은 때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번 기차를 놓쳤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다음 기차가 오고 있습니다.

조금 늦었다고 하여 나 다움의 역에 내리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나 다움의 역에서 배웅 나온 또 다른 나와 조우하며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계속할 것입니다.

떠난다는 말은 필연적으로 도착한다는

말에 도착한다.

자기 계발의 과정에서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 내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성공에 대한 열망인지, 아니면 그동안의 삶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점검하고 앞으로의 삶을 구상하는 로드맵을 그리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지난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 추구 때문인지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심정은 성공에 대한 뚜렷한 열망이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선명하게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일단은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 싶은 마음만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서만 마음을 다잡는다고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든, 분명 나는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으며, 그러려고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의미 없이 필터링하며 살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의 움직임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 그 이상도 이하도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채, 그저 현실 타파의 언덕만 바라보며 지나왔습니다.

분명 나만의 관점이라는 언덕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의 능선에 맞추느라 나의 제방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 사고의 문을 열고 깊이를 더해보려고도 하지 않았지요.

지금 내가 성현들의 이야기나 책 속의 문구들을 낯설게 느끼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하여 삶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내 마음의 제방을 정비하고 사고의 깊이를 더하고자 하는 노력이 지금 저를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연휴 기간이라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주차장이 혼잡합니다. 장거리 이동의 피곤함보다 양손에 든 길거리 음식에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휴게소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여자 화장실 입구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고, 인간의 생리현상을 해결하고자 하는 대열에 저도 동참하고 있었지요. 그때 벽에 쓰인 문구를 보았습니다.

"떠난다'는 말은 필연적으로 도착한다는 말에 도착한다."

화장실마다 명언이나 귀감이 되는 문구들을 배치해 놓은 것을 오늘 처음 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저 스쳐 지나쳤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다른 삶을 살아보고자 사고의 문을 열어보니, 이제는 보이는 세상의 현상들이 깊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을 여행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마도 어느 여행가의 감정을 세상 사람들이 함께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공공장소에 이렇게 기록해 놓은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그저 읽어보고 지나쳐버렸 을지 모를 문구였겠 지만, 사고의 문이 열리자 이 문장은 강렬한 인사이트로 가슴에 박혔습니다. 순간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어 오늘의 생각거리로 저장했습니다. 나이 탓은 아니겠지만, 기록하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말이지요.

사람들은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여행을 떠나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여행은 떠날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의 설렘임 때문이지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을 실감하는 것이 여행의 본질이라 치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우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물론 여행을 다니는 것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더 나은 자신의 삶을 구상하기 위한 재료를 얻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고 이내 망각해 버리곤 했습니다.

누가 어디로 여행을 간다고 하면, 나도 다녀왔음을 확인하는 증거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

지금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은 여행 그 자체가 아닙니다. 나는 떠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어짐이 있으면 만남이 있다는 말처럼, 떠난다는 것은 분명 어딘가에 도착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떠난다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 부정의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나는 것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일정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지금이야 자율여행이나 배낭여행을 계획하기도 하지만, 과거에는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여행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이 아니라 그저 일상을 벗어나는 것에 만족한 여행이었고, 그렇게 의미 없이 따라다니다 보니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을 증명해 보이곤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 여정이라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탄생으로부터떠나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한 목적지는 명확히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이드가 들고 있는 깃발만 따라다니며 혹여 길이라도 잃을까 봐, 새로운 세상을 제대로 담지 못하며 살아왔습니다. 주어진 목적지에서 주어진 시간 동안 주어진 행동을 하면서 여행을 했던 것입니다.

이제 나는 새로운 여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내가 주도하는 자율여행을 고려 중입니다. 아직 정해진 목적지는 없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내가 가야 할 목적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일정을 계획하며, 그곳에서 내가 얻어야 할 것들의 목록을 정하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나만의 여행을 위한 나 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내 의지대로 떠나고, 제 가슴이 닿는 곳으로 가서, 내 안의 나를 길동무 삼아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펼쳐지는 내 삶의 모습을 그리면서, 보이는 것을 다르게 보는 시야를 확보하려 합니다.

나는 지금, 제2의 삶이라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 인생의 기차역 대합실에

앉아 있습니다


서울에서 손님이 온다는 소식에 오랜만에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섰습니다.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을 때면 자주 타던 기차였건만, 마지막으로 기차를 탄 지가 언제 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합니다.

오랜만에 발 디딘 기차역 대합실은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어딘지 모르게 변해버린 모습에서 낯섦이라는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했습니다.

예전에는 작은 유리 구멍 너머로 기차표를 끊었고, 플랫폼에서는 철도원 아저씨가 표를 확인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기계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철도원 아저씨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대합실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풍경은 여전히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단지 TV나 신문, 잡지를 보던 모습에서 각자의 손에 든 휴대전화 속으로 시선이 옮겨갔을 뿐, 여전히 그 공간 특유의 분주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인생을 종종 기차역에 비유하곤 합니다. 기차가 간이역이나 종착역을 거쳐 달리듯,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각자의 역들을 지나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나는 지금, 제2의 삶이라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 인생의 기차역 대합실에 앉아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도착할 나만의 기차에 올라 어느 간이역에서 따뜻한 가락국수 한 그릇을 비우고, 종착역에 이르기 까지 몇 개의 기차역을 더 지나야 할지 행복한 계획을 세울 것입니다. 그리고 종착역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또 다른 나 자신과 만나, 진한 술 한 잔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물론 예상치 못한 기계적 결함으로 잠시 멈춰 설 수도 있습니다. 깜빡 졸음에 한두 개의 역을 무심코 지나쳐 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이 철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만의 의미와 가치라는 깃발을 향해 멈추지 않고 묵묵히 달릴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을 계획적으로, 의미와 가치를 담아 살아야 한다고 표현하는 것보다 기차가 달려가는 모습으로 인생을 이야기할 때 느껴지는 감정은 사뭇 다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인생을 기차에 비유했을까?

나는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땅 위를 달리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배나 비행기보다는 훨씬 오래전부터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이동 수단이었기 때문이겠죠.

물론 험한 파도를 헤쳐 나아가거나 방향을 잡는 과정을 항해에 빗대어 인생의 어려움과 극복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는 고통을 이겨내고 바른 방향으로 선회하는, 인생의 한 단면에 불과한 비유일 때가 많습니다.

기차는 우리에게 서민의 이동 수단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차 안에는 다양한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모습은 기차역 대합실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사람들과, 기차를 타고 올 누군가를 마중하려는 사람들이 서로의 정보를 나누는 공간, 그곳이 바로 대합실입니다.

그리고 그곳 에서는 어떤 거창한 상상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 생각합니다. 플랫폼에서 바리바리 봇짐을 메고 대합실로 들어와 마중 나온 딸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모습에서 내 안의 가장 순수한 나를 불러내고, 어깨에 맨 가방이 유학의 고달픈 무게인 양 비장하게 대합실을 나서는 학생의 뒷모습에서는 잊고 있던 고향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누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보이는 모습 그대로가 나의 가슴에 전해져 오는 곳, 그곳이 바로 기차역입니다.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나의 비용을 지불하며 해외여행을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몇 번의 해외여행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은 내가 직접 비용을 치르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기차역이든, 터미널이든, 공항이든, 이 모든 곳은 사람들이 이동하며 방향을 바꾸는 공간입니다. 해외로 가든, 서울로 가든, 고향으로 가든,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지요.

하지만 같은 목적의 공간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의 높이가 다르다는 것을 오늘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습을 우리 마음대로 해석하고는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 놓은 범주 안에 가두려고도 합니다.

대합실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냅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사는 것인지, 단순히 기차 여행을 가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길을 떠나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기차라는 운송 수단을 이용하고 서민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열심히 산다고 섣불리 평가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내가 생각한 범주를 그들이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확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던 날, 인천공항 대합실에서 바라본 세상의 모습은 또 달랐습니다. 기차역이나 터미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가는 모습을 보고 사뭇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해외로 간다는 것이고, 해외로 간다는 것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고, 해외여행을 간다는 것은 어느정도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이고,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어떤 부모를 만난 것일까?와 같은, 혼자만의 생각과 분석으로 논문까지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단지 눈에 보이는 모습만 가지고 그런 논문을 쓸 수 있는 나 자신이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나에 대한 자괴감을 느꼈던 그때를 반성해 봅니다.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으로 다른 이들의 삶을 재단하고, 나아가 스스로를 평가절하했던 지난날의 나는, 어쩌면 그 대합실의 수많은 풍경만큼이나 다채로운 각자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던 것입니다.

비록 서민의 발로 상징되는 기차이든, 부유함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비행기이든, 그 모든 이동 수단은 결국 누군가의 소중한 여정을 싣고 달리는 것이며, 그 여정 속에서 각자가 찾아가는 의미와 가치는 결코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이 나이에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지금 나는 제2의 삶이라는 기차에 올라, 어떤 기계적 결함이나 뜻밖의 간이역을 지나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달릴 채비를 마쳤습니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성장을 통해 나만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것, 그리고 마침내 종착역에서 모든 여정을 통해 단단해 진 또 다른 나 자신과 마주하며 진심으로 축배를 드는 것, 그것 이야말로 제가 앞으로의 삶에 그려 나가야 할 그림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철길은 오직 제가 나아갈 방향만을 보여줄 뿐, 다른 기차들의 속도나 행선지는 더 이상 나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의 넝쿨은 없는지 한번쯤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삶의 밭을 가꾸는

첫 삽질을…


우리가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외형적인 면모 또한 전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라고 외치며 주체적인 삶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그 주체성 역시 때로는 외면적인 것에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관계는 상호 이익을 기반으로 하는 계약이 아닙니다. 이 관계 안에서는 우리의 모든 원칙과 주관이 온전히 힘을 발휘하지 못하며, 우리는 이에 대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보여주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서로의 감정이라지만, 때로는 우리는 더 나은 외형을 보여주기 위한 페르소나를 장착하기도 합니다.

거리적 요소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 태생의 근원을 찾아 모이는 시기를 우리는 명절이라 부릅니다. 이는 한 뿌리에서 자라나 각자의 가지를 가꾸던 가족들이 가족이라는 나무의 울타리 안에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가지들은 매년 두세 번의 만남을 위해 부모님과 서로의 안부를 묻기 위한 장거리 이동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관계에 대한 명확한 해석이나 의미 부여보다는, 인간으로 서의 '당연한 도리' 정도로 여겼던 것이지요.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한다는 법이나 규칙은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생기는 이성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내 고향은 서해안의 작은 섬입니다. 명절마다 배를 타고 가야 하는 곳이어서 이동에 많은 시간이 소요됐고, 그래서 자주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다리가 연결된다면 자주 찾아 뵐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리가 연결되고 나서도 저는 자주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나중 에야 깨달은 것은, 그것이 제 의지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제 의지를 온전히 연결할 수 있는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모든 것이 핑계였음을 인정하면서, 이제는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문득 들기도 합니다. 고향과 조상에 대한 인식이 세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일까요.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는 농사일을 하시며 우리 가족을 부양하셨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산 중턱의 비탈진 땅까지 일궈 밭으로 개간하고, 그곳에 씨앗을 뿌려 고된 노동으로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평지에 농사를 짓는 것도 힘들지만,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산중턱을 쟁기와 지게로 일궈 척박한 땅을 기름진 밭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밭 한쪽에는 조상님 들을 모시는 선산도 마련하셨고, 지금은 아버지께서도 그곳에 잠들어 계십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농사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자, 그 밭은 방치되었습니다. 매년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할 때마다 잡풀을 제거 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번번이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우거진 수풀 사이로 길을 만들어 지나가야 할 정도였고, 이곳이 한때 기름진 밭이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습니다.

예초 작업은 땅 위의 풀을 제거하는 기계이지만, 하늘을 보며 나무 위에 엉켜 있는 넝쿨들까지 제거해야 했기에 힘은 두 배로 들었습니다.

예초기 자체의 무게도 만만치 않은데, 칼날에 엉겨 잘려 나가지 않는 넝쿨들을 끊임없이 상대하고 하늘을 보며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작았던 잡초들이 이제는 나무가 되었고, 그 나무들이 자라 엄청난 크기의 거목으로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넝쿨을 제거하고 길을 만들며 나무 밑동을 톱으로 잘라 생명력을 끊는 작업을 병행하면서, 엄청난 양의 피를 모기에게 헌혈하기도 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눈에 띄는 진전은 미미했습니다. 온몸의 근육은 뻐근함을 넘어 아려 왔고, 지친 몸과 마음에 후회가 밀려들었습니다. 진작에 조금씩 이라도 관리했더라면 이렇게까지 고생할 일은 없었을 텐데….

‘나중에 해야지, 이번엔 시간이 없네’하며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당장의 급한 일에 치여 한 해 두 해 미루다 보니 이제는 도저히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형제도 있으니 괜찮겠지' 하는 마음도 여기까지 오게 된 한 가지 이유였지요. 겨우 큰 나무들을 제거하고 넝쿨을 걷어냈지만, 물리적인 시간과 내 체력의 한계로 인해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한 채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비록 완벽하게 깨끗해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숨통이 트인 선산을 보며 씁쓸함과 함께 작은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의 삶 또한 내 고향의 한때 기름졌던 밭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나 스스로 계획했던 목표들이 눈앞의 급한 일에 치이거나 잠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다음에 하지 뭐', '지금은 때가 아니야' 하는 마음에 한 해 두 해 미루게 되면, 어느 순간 손쓸 수 없는 지경이 되거나 아예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었던가?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자 학습과 사고의 깊이를 파고드는 작업을 꾸준히 수행하며 자기 계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두 번의 학습을 미루거나, 어려운 문제에 부딪혀 잠시 놓아버린다면, 그것이 점차 쌓여 나중에는 전체적인 학습 흐름을 끊어버리고 목표 달성을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의지를 필요로 하는 자기 계발 과정은 언제쯤 루틴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무엇을 위함 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는 과정에 가장 필요한 것은 미루지 않는 것임을 이번 경험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처럼 일상에서의 인사이트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면서,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혜안도 조금은 얻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연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날마다 들렀던 헬스장을 나도 모르게 소홀히 하고 있었습니다. 건강 관리를 위해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잠시 소홀히 하다 보면, 어느새 제 루틴은 과거의 나태했던 기억을 무섭도록 빠르게 불러오려 합니다.

알 수 없는 피곤함이 핑계를 만들어 주고, 의지박약의 감성이 힘을 펼치려 할 때, 나는 이런 생각에 지체 없이 헬스장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날마다 마주치던 사람들이 여전히 꾸준히 운동하고 있었습니다. '나만 빠졌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이 밖에도 사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만나게 되는 삶의 역경, 혹은 해결해야 할 가족과의 대화나 친구 관계의 오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를 덮어두다 보면 점차 깊은 골이 생겨나 되돌릴 수 없는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정 관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규모의 부채나 불필요한 지출 습관을 방치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감당할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나는 분명 그렇게 막 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이 보여주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잘못 살았을 수도 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객관적인 시선과 주체의식 사이의 괴리가 있을 수 있다고 스스로 위안하지만, 이를 바로잡으려는 의지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과정에서 이번 고향 방문과 벌초 경험은 정말이지 강력한 경고음처럼 다가왔습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작은 잡초일 때 뽑아내지 않으면 넝쿨이 되어 산 전체를 뒤덮듯, 우리의 마음과 삶 속 작은 숙제들도 미루지 않고 꾸준히 돌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넝쿨 제거작업과 보이지 않는 내면의 사고 확장작업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살피고 필요한 때에 적절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진리를 새삼스레 되새겼습니다.

그동안 일상에서 매번 만나고 경험했던 것들이지만, 사고의 깊이를 다르게 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깨우침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이는 자기 계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입증해 주는 하루였습니다.

그동안은 단순히 방문이었다면, 이번 연휴는 체험과 깨우침 이었습니다. 노력의 땀과 성찰은 과거에 머무르기보다, 오늘부터 라도 작은 행동들을 놓치지 않는 삶의 태도를 단단히 다져 나가겠다는 결심을 낳게 했습니다.

어쩌면 내 삶의 모든 밭이 무성한 넝쿨로 변하기 전에, 혹은 작은 문제들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기 전에,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현명한 길일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미루고 있는 인생의 넝쿨은 없는지 한번쯤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고, 삶의 밭을 가꾸는 첫 삽질을 지금 바로 시작해야겠습니다.

인간에게는 대비할 지혜를 주고 달에게는 삶의 역경을 경험하게 하는 구름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어느덧 낮의 길이가 짧아지고 어둠이 일찍 내려앉기 시작합니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이야기이자,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식구를 마중하기 위해 기차역 골목에 차를 주차한 8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주변은 이미 한밤중처럼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비가 오고 흐린 날씨가 이어졌지만, 밤이 되자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달이 떠올랐습니다. 보름달은 아니지만, 달빛은 여전히 우리에게 포근함과 넉넉함을 안겨줍니다. 얼굴이 달덩이 같다는 말이 상대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에게서 풍요와 건강함이 느껴진다는 칭찬으로 사용되듯, 달은 이처럼 인간에게 많은 위로와 의지처가 되어주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런 달을 보며 소원을 빌기도 하고, 달의 모양과 빛깔을 보며 세월의 흐름과 기후 변화를 예측하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달빛은 흐릿합니다. 아니, 정확히는 달무리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달무리가 생기면 비가 올 것을 예상했다고 합니다. 달무리는 달빛 주위에 생기는 동그란 빛의 띠를 말하는데, 이는 달빛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구름의 방해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과 태양은 공전과 자전을 하며 언제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그런 묵묵한 노력을 인정하고 빛 내주기보다는, 오히려 방해와 시련을 안겨주곤 합니다.

온 힘을 다해 빛을 발산하는 달은 자신을 가로막는 구름이라는 방해꾼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달무리 현상을 통해 인간은 비에 대비할 수 있지만, 달은 자신의 노력이 구름에 묻히면서 실망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인간에게는 대비할 지혜를 주고 달에게는 삶의 역경을 경험하게 하는 구름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

달무리의 모습은 언뜻 아름답게 보입니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지요. 하지만 세이렌의 신화처럼, 이는 곧 닥쳐올 변화나 시련을 예고하는 신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들을 유혹하여 파멸로 이끄는 세이렌의 이야기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구름을 안고 있는 달무리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오늘처럼 예상치 못하게 달무리를 보거나 무지개를 보면, 우리는 순간적인 아름다움에 매혹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어있는 시련이나 변화의 가능성을 읽고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작은 성취나 순간적인 성공의 기쁨에 도취되어 긴장감을 늦추거나 성장과 발전을 위한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달무리 현상이 생기는 것은 달의 잘못이 아닙니다. 달빛을 가리는 구름의 잘못도 아닙니다.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속에 보이지 않는 이면을 볼 수 있는 혜안이 부족할 뿐입니다.

만약 달빛이 항상 똑같은 모습으로 달무리 같은 이상 현상 없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달빛에 대한 신비감이나 호기심을 발휘하지 않을 것입니다. 늘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중요성을 부각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변화를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항상 같은 길을 걷기보다는, 변화를 향한 새로운 도전과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얻는 새로운 깨달음 이야말로 우리의 성장을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지금 나는 새로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익숙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풍경을 마주하고 있지요. 내가 발산하는 빛은 달무리처럼 흐릿하고 불확실하지만, 미래를 향해 한 걸음 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길은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두렵지만, 그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됩니다. 달이 구름에 가려도 그 빛을 잃지 않듯, 저 역시 시련 속에서도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달무리는 단순한 자연 현상을 넘어, 우리 삶의 은유입니다.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시련, 평온함 뒤에 도사린 변화의 징후. 우리는 그 신호를 읽고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달이지만, 그 주변의 변화가 달의 의미를 더욱 깊게 만들어줍니다.

나 역시 변화와 시련을 통해 더 단단해 지고,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리라 믿습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언젠가 나를 더 깊은 이해와 성숙으로 이끌 것이라 확신합니다. 달무리를 지나 다시 맑은 달빛을 마주할 그날까지, 나는 묵묵히 걸어갈 것입니다. 이 길의 끝에서 나는 더 나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집행유예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삶을 기약해야 합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분명 맑았던 하늘이 이내 흐려집니다. 마치 빗방울을 내리기 위한 예행연습이라도 하듯, 하늘은 온통 잿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하루 종일 맑았다 흐렸다 를 반복하며 때때로 비를 뿌리는 변덕스러운 날씨는, 마치 누군가 하늘의 현상을 조정하는 듯 세상을 예측 불가능한 혼란 속에 빠뜨립니다. 이 혼란의 주범이 구름일까요, 아니면 바람일까요? 그 진정한 원인을 탐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이와 같은 자연 현상을 수없이 겪었지만, 그 근본 원인이나 주동자를 깊이 있게 찾아 나설 생각은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계발의 과정을 통해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자 합니다. 이는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한 렌즈를 닦는 과정이라 변호하고 싶네요.

태양은 언제나 제자리에서 변함없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 알리바이는 너무나 확실해 보입니다. 세상에 태양을 위협할 존재는 없다는 오랜 관념이 저를 확신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구름이 태양을 가렸다 비켰다 장난치며 그 빛을 방해하는 것일까요? 구름 또한 제자리에서 뭉게뭉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태양과의 조화로운 만남을 고대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굳이 구름이 나서서 태양의 일을 방해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바람일까요? 고요히 머물러 있던 구름을 이리저리 휘몰아쳐 이동하게 한 바람 때문에 오늘처럼 잿빛 세상이 된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구름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명확한 알리바이가 형성됩니다.

하지만 바람은 억울합니다. 스스로가 범인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지만, 선임할 변호사조차 없습니다. 금세 일었다가 사그라드는 바람은 비바람이나 회오리바람처럼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그저 세상의 흐름에 밀려 다니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해를 받게 된 바람은 지금 깊은 고민과 걱정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자기 성찰과 명상을 통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자기 계발의 과정을 수행하는 바람에게도 할 말은 있습니다.

태양은 온 세상에 빛을 비추어 이 땅의 모든 생명에게 에너지를 공급합니다.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는 이유로 그 빛이 대지 위에 골고루 전달되지는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공기 중에는 따뜻함과 차가움의 간극이 생겨났고, 이 공기들의 대립으로 인해 바람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근본적인 원인은 태양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위한다는 핑계로 자신에게 이로운 부분만 신경 쓰고,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들을 소홀히 했던 결과로 공기들의 반란과 바람의 생성, 그리고 구름의 이동이 일어나 태양 스스로가 잿빛 하늘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의 색깔은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색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그동안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색의 무지개 빛깔만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지금 자신이 어떤 색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칠하고 있는 색깔이 잿빛일지도 모릅니다.

맑다가도 흐려지고 비가 내리는 현상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색깔은 여전히 선명한 파란색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거센 비바람과 폭풍우를 겪고 잠깐 나타난 무지개가 바로 자기 색깔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희망과 목표는 다릅니다. 누구나 무지개 빛깔 같은 인생을 소망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색깔부터 바꿔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잿빛 속에도 빨강과 초록과 파랑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 색깔은 결정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선택되어 혼합된 결과입니다.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고 싶다면, 우리는 명확한 목표를 선택해야 합니다. 빨간색을 원한다면, 당신의 열정을 그 빨간색에 온전히 쏟아붓는 것입니다. 잿빛 위에 빨강의 열정을 덧대고 덧대어 마침내 선명한 붉은빛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파란색이나 초록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나씩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 나가며 마침내 무지개다리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무지개다리를 만들겠다는 소망은 간절하지만, 지금의 내 색깔에 어떤 색을 더해야 할지 몰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최소한 나는 그렇습니다.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고자 자기 계발의 과정을 통해 팔레트는 구했지만, 거기에 어떤 물감을 짜야 할지, 그리고 어떤 색깔들을 섞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붓을 쥔 손에는 걱정과 두려움이라는 작은 떨림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의 주체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오늘 같은 잿빛 하늘과 혼란스러움의 근본 원인은 결국 태양, 즉 자기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외부 환경이나 타인의 탓을 하며 세상을 원망한들, 그 판결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내려집니다.

집행유예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삶을 기약해야 합니다. 무죄를 고집하기보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외부의 변호사를 선임하기보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받도록 힘써야 합니다.

아무리 두꺼운 법전이라 할지라도 인내하고 배우며 노력한다면, 더 나은 내일은 태양빛이 가득한 맑은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상에서 뭉게구름과 산들바람, 그리고 이슬비를 맞으며 태양을 향해 행복한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배움을 통한 깨달음의 장관(觀),

작지만 일궈낸 성취의 장관(壯觀)

웅장하고 멋있는 광경을 보며 우리는 장관(壯觀)이라고 감탄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 캐년, 중국의 장가계 등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모습들, 수십만 명이 모인 축구장의 열기나 수천 마리의 철새 떼,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 같은 거대 건축물을 볼 때, 우리는 장관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하지요.

이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웅장하고 훌륭하다는 의미입니다. 상상하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고 하지만, 장관은 그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꾸고 있는 꿈들은 상상할 수 있는 한계의 범주 안에 있지 않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에,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아름답게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꿈을 실현 가능하게 꾸라고 조언하기도 하지요. 또 한편으로는 꿈은 크게 가지라고 합니다. 큰 꿈에 도전하다 보면 작은 꿈들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논리에서 입니다.

그리고 장관(壯觀)의 모습을 보기 위해 꼭 멀리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멋지고 웅장한 광경은 끊임없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생각의 깊이를 더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유연한 삶을 살라고 하지만, 현실은 한 치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듯합니다. 모두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세상에서 혼자만의 감성에 빠지는 것은 곧 낙오라는 공식으로 스스로를 옥죄고 있는 것이지요.

졸린 눈을 비비며 소파에 앉아 아침을 맞습니다. 아직 완전히 뜨지 못한 눈꺼풀 사이로, 가느다란 빛 한 줄기가 아스라이 비쳐 들어옵니다. 아파트 숲 사이를 비집고 태양이 떠오르는 의식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새빨갛게 물든 낮은 하늘빛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출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룹니다. 이 의식은 매일같이 진행되었지만, 저는 오늘 아침 에야 비로소 제대로 관람한 것입니다.

일출의 장관을 보기 위해 거실 커튼을 젖히는 대신 침대 속에 숨겨 놓은 꿀잠의 마지막 부스러기까지 챙기느라, 그동안 태양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오늘은 비가 오려나 봅니다.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더니, 다시 태양이 번뜩입니다. 태양과 구름이 다투는 사이 늦은 오후의 햇살은 강렬함을 잃어가고,치근덕거리는 구름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름들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태양은 온몸으로 자신의 빛을 발산하려 애쓰는 듯합니다. 그렇게 태양은 구름을 비집고 황홀한 빛 내림을 연출합니다. 마치 예수가 재림하는 그림에서나 볼 법한 이 현상에서는 신성함마저 느껴집니다.

사실 이런 광경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신성함을 느끼고 장관이라고 여긴 것은, 내 마음속 에너지가 고갈되어 충전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연휴를 보내고 돌아오는 고속도로는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습니다. 어스름한 기운이 태양이 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자동적으로 들어오는 헤드라이트 불빛은 아직 도착하려면 한참 멀었다고 말해줍니다.

정체와 지체 속에서 엑셀과 브레이크는 연신 바쁘기만 합니다. 짜증을 낼 만도 하지만, 운전하는 아들 녀석이 룸 미러를 통해 뒷배경이 장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끝도없이 이어지는 자동차 불빛들이 황홀한 장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좀 늦으면 어떠랴! 그 덕분에 이렇게 멋진 장관을 만났지 않은가? 아들의 말에 순간 마음이 편안 해집니다.

우리 세상에는 이미 만들어진 웅장한 장관(壯觀)들도 많지만, 일상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장관(壯觀)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장관의 모습을 보기 위해 여행을 계획하기도 하지만, 무계획 속에서 우연하게 만날 수도 있지요.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밤하늘에서는 장관이 펼쳐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구름에 가려 우리 눈에는 까만 하늘만 보일지라도, 그 구름 위에서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불꽃놀이를 하고 있을 테니까요.

멀리 있는 곳으로 가야만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조금만 고개를 돌리고 마음의 빗장을 연다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일상의 장관들을 우리는 그동안 파랑새 처럼 찾아 헤매기만 했습니다.

장관(壯觀)이 반드시 눈으로 보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름 위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마음으로 볼 수 있는 혜안은 오직 내 가슴속에만 존재합니다. 고이 간직할 필요도 없는데, 우리는 마음을 마치 보물단지처럼 숨기고 살았습니다.

마음의 눈은 꺼내 쓸수록 더욱 선명 해진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성장을 위한 노력과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을 하나의 장관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은 나에게 자신을 구경하러 오라고 유혹하지만, 나는 나만의 장관을 만들고 있습니다.

배움을 통한 깨달음의 장관(壯觀), 작지만 일궈낸 성취의 장관(壯觀)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두드림의 망치질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매일의 기록을 쓰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전환기를 맞아 방황하던 시간 동안, 나는 가슴속 넋두리를 풀어내고자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꾸준히 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백 여건의 글을 남겼습니다. 이후 러닝메이트의 추천으로 다음 티스토리로 옮겨 현재 736건의 포스팅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 중 연속 651일째 글쓰기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기간으로 따지면 벌써 3년째, 이 활동들은 나의 생활 루틴이 되었고, 더 나은 삶을 위한 자기 계발의 과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읽은 내용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년여 동안 나의 도서목록에는 251번째 칸이 채워지고 있습니다. 비록 읽은 모든 내용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고의 깊이를 더해주는 독서 그 자체에 의미를 두며 꾸준히 정진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써 내려가면서, 그 글들을 한곳으로 모으고 싶은 마음이 커졌습니다. 인터넷 출판사를 통해 책으로 엮기 시작했고, 벌써 아홉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으며, 조만간 열 번째 책이 완성될 예정입니다.

11,689는 내가가 새롭게 도전하고 있는 걷기 운동 앱의 포인트 숫자입니다. 여기에 5,240포인트로 이미 마신 커피를 포함하면 총 17,000포인트가 넘는 기록입니다.

하루 100~140포인트를 얻기 위해 40분에서 1시간을 걸어야 하는데, 이것은 120일 이상 꾸준히 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날마다의 운동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5일 이상 헬스장을 찾았던 시간을 계산해보면 약 24주, 즉 거의 6개월이라는 시간을 운동이라는 새로운 루틴을 만드는 데 할애한 셈입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 정도는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지금껏 나는 이러한 지속적인 기록을 세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떤 일도 꾸준히 이어가본 적 없는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았을 거라는 생각에 저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 지기도 했습니다.

'책을 읽는다고 밥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글을 쓴다고 유명 작가가 되어 이름을 날리는 것도 아니다',

'그 정도 운동은 누구나 다 한다'는 자기 합리화에 매몰되어 무의미하게 방황했던 시간들은 이제 후회와 반성이라는 뒤안길 저편으로 멀어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을 통틀어 스스로도 놀랄 만한 기록을 세웠다는 사실에 저 자신도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 네 번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목표가 생겨났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대한 의미를 찾으면서, 새로움은 결국 과거로부터 온다는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새로운 도전은 바로 과거의 경험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첫 책은 2022년 10월에 나왔습니다. 그동안 포기하고 싶은 위기의 순간도 많았지만, 저를 붙잡아 준 것은 지난 시간들이 선사하는 소중한 의미들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멈춰버린다면, 이제껏 걸어온 길은 과거 속에서 무의미하게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 것입니다.

작심삼일을 굳은 신념처럼 받아들이던 때에는 삼 일이라는 기간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삼 일에 하루만 더 보태면 사 일이 되고, 또 하루가 더해지면 오 일이 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노력은 루틴이 되고, 어느 순간 자연스러운 습관이 됩니다.

만약 멈췄다가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그 처음은 또다시 일 일이 될 뿐, 과거에 걸었던 삼 일은 아무런 의미도 부여 받지 못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매일의 기록을 쓰고 있습니다. 언제까지가 될지는 모릅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을 우리는 신기록이라고 부릅니다. 여태껏 세워보지 못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깨는 데는 엄청난 노력과 용기 있는 도전이 필요합니다. 나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하여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서라도 가쁘게나 가보자는 시적인 문구도 좋지만, 러닝메이트와 함께 가는 길은 더 큰 힘이 됩니다. 서로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고, 때로는 바람막이가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900일 넘게 연속 포스팅을 이어가는 친구가 있는데, 어쩌면 저희는 서로 경쟁하듯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습관으로 자리 잡을 법도 하지만, 아직도 의지가 필요한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아침이면 여전히 피곤합니다. 땀 흘리며 운동하고 난 아침이 늘 개운하다는 말은 솔직히 거짓말 같습니다.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러닝머신 위를 걷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도 온몸이 뻑적지근함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140포인트를 얻었고, 내일쯤 에는 커피 쿠폰 두 잔을 교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잔은 나를 위해, 나머지 한 잔은 러닝메이트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 미소가 지어집니다.

어제도, 오늘도 택배 기사님은 제가 읽을 책을 가져다 줍니다. 읽던 책이 끝나갈 무렵이면 다음 책을 준비합니다.

세상에는 읽을 책이 너무나 많고, 도서관도 많습니다. 하지만 나는 내 책에 밑줄 긋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게 언젠가 다시 읽을지 모르는 책들을 쌓아가고 있으며, 이것이 저의 소중한 재산이 되고 있습니다.

블로그에 댓글이 달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 글들을 모아 나는 책 출판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쌓여가는 나의 글들은 또 다른 재산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하여 포인트를 모으고, 그 포인트로 커피를 마시며 선물하는 러닝포인트 역시 저의 귀한 재산이 됩니다.

과거에는 대출 없이 집을 장만하고, 땅을 사고, 주식을 모으고, 통장에 현금을 쌓는 것을 재산이라 여기며 살았습니다. 오로지 보이는 재산만을 위해 저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이라는 세상은 보이는 것에만 미소를 보내고, 보이지 않는 것에는 너무나 냉담합니다. 그래서 아파트 평수를 넓히려 했고, 고급 승용차를 고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내 안에 있는 진정한 보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마음 한구석에 먼지를 뒤집어쓴 보물상자를 열어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성찰 속에서 그 열쇠를 찾아야 합니다. 깊은 사고의 비밀번호로 보물상자를 열고 저의 진정한 재산을 챙겨야 합니다. 세상에 보이는 재산은 온전히 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잠시 보관 중인 것입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생각이라는 지폐와 행동이라는 카드를 지혜라는 저만의 지갑에 채워 넣어야 합니다.

오늘도 나는 이 지갑에 재산을 채웁니다. 생각이라는 지폐는 책을 통해서 얻고, 행동이라는 카드는 글쓰기를 통해 발행됩니다. 운동이라는 새로운 도전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든든한 보증수표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지갑은 두둑해질 것이고, 나는 세상 속에 긍정적인 영향을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 보이는 재산은 지키기 위한 경비가 많이 들지만, 걱정 없는 내 마음속 지갑은 언제나 안전합니다. 그리고 원금 보장이 아닌 복리로 자라납니다.

나의 재산은 내가 기록하는 순간마다 늘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록은 백지수표로 나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내가 적어야 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의 금액은 성장과 발전의 노력에 비례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걷고, 읽고, 씁니다. 내 안의 지갑을 두둑하게 채워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베풀기 위해,

그리고 단단한 나의 보물들이 빛나는 그날을 향하여.

그동안의 나에게 진심 어린 사과의 말을

전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가 자본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삶을 기꺼이 희생하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곧 권력이며, 계급의 정도를 나타내는 명확한 징표입니다.

자신의 경제적 자유 획득을 위해 타인의 자유를 자본으로 매수하려 해도 우리는 쉽사리 거부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힘들다고 토로하고, 성공의 목표를 자본 획득과 연결하고 맙니다.

인간관계의 건강함을 위해 상호 존중과 배려심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조차 자본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치는 방어벽이라는 말로 해석될 수도 있는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이는 모습에 신경을 많이 쓰고, 때로는 삶의 허무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황새가 뱁새를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감싸며 굽히기를 거부합니다.

지금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하지만, 이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성인들에 게나 어울리는 말처럼 들립니다. 빈자의 모습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오해 받는 현실은 드라마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 한 가난한 농부가 있습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성실하고 정직하게 딸기 농사를 지어 유치원에 납품하고 있지요. 어린아이들이 먹을 딸기이기에 특히나 더 신경을 씁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갓 수확한 딸기를 가지고 유치원에 도착한 그는, 평소와 같이 주방 냉장고에 딸기를 넣고 원장님께 인사를 마친 후 나옵니다.

그래도 유치원 원장이라는 신분 때문인지, 원장님은 딸기 아저씨에게 늘 친절한 말투로 응대합니다. 하지만 원장님의 위치 때문에 입에 발린 소리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이 모든 것 자체가 자본주의가 낳은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사건은 발생합니다. 교실에 있던 현금 봉투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사이 교사들과 학부모, 교육청 관계자들이 다녀갔습니다. 그러나 예상대로 가난한 딸기 아저씨가 가장 강력한 용의선상에 오릅니다. 그들 중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물론, 예상하셨듯이 현금 봉투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사용한 것을 잊어버리면서 벌어진 해프닝이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은 이미 경찰서에 접수되었고, 모든 오해를 풀려는 사과에도 불구하고 이미 상처받은 딸기 아저씨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때, 한 선생님이 사과하는 의미로 트럭에 실려 있는 딸기를 몽땅 팔아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이에 딸기 아저씨는 더욱 화를 내며 "돈이면 다냐!"고 고개를 돌리지만, 트럭에 있는 딸기가 전부 얼마냐 고 묻는 사과자의 물음에 "제값은 얼마인데, 얼마는 받아야 한다"고 말끝을 흐리며 사건은 그렇게 종결됩니다.

드라마 같은 이야기이지만, 이는 우리 현실에서 흔히 벌어지는 상황들입니다. 경찰서에서 나오면서 동료 교사가 딸기를 팔아준 선생님에게 "어떻게 사과를 돈으로 할 수 있냐" 며 진심 어린 사과가 아님을 훈계합니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진심 어린 사과 말 한마디보다는 현실적인 문제 해결이 더 효과적인 사과가 될 수 있다"고 받아 칩니다. 맞는 말입니다.

자존심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있지만, 때로는 자존심보다 당장의 현실이 앞서는 법입니다. 진심이 어렸는지 형식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말 한마디를 듣는 것보다 오늘 수확한 딸기를 제시간에 납품하거나 팔지 못하면 버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 그것이 딸기 아저씨의 현실이었으니까요.

도둑으로 오해 받은 마음의 상처보다도, 트럭 위에서 말라가는 딸기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나는 '타인의 삶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걷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마음을 글로 표현하면서 내적인 성장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요.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자신의 운을 불러들이면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지금의 불행은 나중의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한 시험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면서 자기 계발의 과정을 지속하라고 합니다.

어쩌면 그동안 나는 세상으로부터 준비되지 않은 나, '타인의 삶 속에 안주하고 있는 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 나로 오해를 받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살았습니다. 인간관계의 범위도 넓히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고 여겼지요.

지금 나는 세상으로부터 오해를 받아 시련이라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제 나에게는 긍정적인 사고와 행동이라는 진심 어린 노력의 사과보다는, 현실에서 겪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생각과 행동이 현실에 억눌리지 않기 위한 강력한 에너지가 더 필요한 때입니다.

그동안의 나에게 진심 어린 사과의 말을 전합니다. 주어진 역할에 충실 한다는 핑계로 '나'에게 소홀했던 것, 타인의 삶 속에 안주하는 동안 내면의 나를 버려 두었던 것, 힘들다고 외쳐대는 감정을 그저 참아내야 한다고 했던 것, 관계 형성을 위한 노력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과의 관계는 형성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지 못해 지금 시련의 고통을 맛보게 한 것, 이 모든 것에 미안합니다.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지켜봐 주었던 내면의 '나' 를 보지 못하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했던 것에 미안합니다.

이제 진심 어린 사과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있다면 기꺼이 수용하려 합니다. 현실의 시련 극복이 그것이라면, 이제 우리는 화해를 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에필로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251권의 책을 읽고, 736건의 글을 썼습니다. 그중 651일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이어온 기록입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껏 어떤 일도 꾸준히 이어가본 적 없었던 제게, 이 기록은 기적과도 같습니다.

타인의 삶을 살며 주체성을 잃었던 시간들, 안락의자에 안주하며 진정한 나를 외면했던 날들. 그 시간이 끝나고 예고 없이 찾아온 인생의 전환기 앞에서 저는 방황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황 속에서 저는 책을 만났고, 글쓰기를 시작했으며, 제 안의 생각 공장을 가동시켰습니다. 손바닥이 벗겨지도록 운동하며 몸을 단련했고,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의 장관을 보며 새로운 하루를 맞이했습니다.

"창문 밑에 핀 장미는 예전의 장미나 더 좋은 장미를 언급하지 않는다."

과거의 영광에 머물지도, 미래의 불안에 떨지도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 창문 밑에 피어 있는 장미처럼. 저는 이제 비교하지 않고, 남의 삶을 살지 않으며, 오직 저만의 색깔로 피어나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토성이 태양계를 한 바퀴 도는 데 30년이 걸립니다. 서른 살에 시작된 공전이 환갑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저는 새로운 공전을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준비된 출발입니다.

11,689포인트의 걷기 기록, 9권의 출간된 책, 그리고 매일같이 채워지는 블로그. 이 모든 것이 제 진짜 재산입니다. 통장 잔고가 아닌, 마음속 지갑에 채워진 생각이라는 지폐와 행동이라는 카드. 이것이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저만의 보물입니다.

집행유예의 삶은 끝났습니다.

이제 저는 무죄가 아닌, 당당한 유죄를 선택합니다. 과거의 나를 유죄로 인정하고, 그 죄를 통해 배운 지혜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잿빛 하늘을 만든 것이 태양이었다면, 이제 그 태양은 구름을 걷어내고 다시 빛날 것입니다. 바람과 구름을 탓하지 않고, 스스로 빛을 발하는 태양이 되겠습니다.

"떠난다는 말은 필연적으로 도착한다는 말에 도착한다."

저는 지금 제2의 삶이라는 기차에 올라 새로운 여정을 떠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제가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가이드의 깃발을 따라가는 패키지여행이 아닙니다. 제가 직접 계획하고, 제가 선택하며, 제가 책임지는 자율여행입니다.

그 여정 속에서 저는 매일 기록합니다.

읽고, 쓰고, 걷습니다.

생각하고, 성찰하고, 성장합니다.

이 기록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652일째도, 700일째도, 그리고 언젠가 1000일째도 저는 여전히 이 자리에서 글을 쓰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제 알았습니다.

멈추는 순간, 과거의 모든 기록은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하지만 계속하는 순간, 매일이 새로운 기록이 된다는 것을.

651일의 기록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출발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저는 제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당당히, 그리고 즐겁게

이 여정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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