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학년칠반의 노래2

by 용혀기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타인과 비교 불가한 삶을 사는 진정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명확한 기준을 세우기보다, 주변 사람들을 보며 적당한 기준을 정하곤 합니다. 남들보다 튀지도, 뒤처지지도 않으려는 마음으로 안정된 삶의 구도를 추구하며 살아가죠.

물론, 때로는 이러한 기준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기준을 설정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잘난 사람이나 유명인이라 여기며 부러움 섞인 시선을 보내곤 합니다.

나 에게도 저런 용기가 있다면,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가정법만 되뇌며, 우리는 오늘도 아슬아슬한 밧줄 위를 걷는 듯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공동체 사회를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이익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 속에서도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그저 평균이 아니라 주체성이 깃든 기준이어야 합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평균에 맞춰 밀려나지 않으려는 삶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체적인 삶의 기준이 반드시 잘나거나 튀는 삶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모방하며 자신의 삶을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소중한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의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도 의식해야 합니다. 곧,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살아가는 모습을 모방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절대로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곁눈질하곤 하죠.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자신이 무능하거나 초라하다고 느끼며 고통받는다면, 우리는 비교를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잡을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관계 속에서의 비교가 주체적인 삶의 방향을 방해한다면, 아예 비교하지도 못하고 비교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를 의식하고 비교하는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기준이 구체적인 수치로 명확하게 드러나 있죠.

그래서 우리는 그 수치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파트는 30평 이상이어야 하고, 대출은 없어야 하며, 현금 1억이 통장에 있어야 하고, 월급은 500만원 이상 받아야 하며, 해외여행은 1년에 한 번쯤 은 가야 그나마 중산층의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중산층이니 서민층이니 판단하고 그에 맞춰 행동하곤 합니다.

외국어 하나쯤은 구사하고, 스포츠나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수 있어야 하며, 사회봉사 활동을 하고 다른 사람을 험담하지 않으며,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지고 독선을 없애고 불의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중산층 이라는 기준도 제시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흔히 배부른 소리 한다며 핀잔을 주기 쉽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중산층의 기준에 숫자가 없습니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명확한 목표를 설정했다면, 그것에 대한 강한 믿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깊이 있는 사고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해답을 기초로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야만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가치관과 목표는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여 정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빠른 성장과 발전을 통해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빨리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나 역시 꾸준히 걷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조금 느린 감이 있을지 언정,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에 집중하여 경험하고 학습하는 모든 것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정말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교의 덫에 빠지는 이유는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인간의 본능 때문입니다. 똑같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나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나만의 분명한 강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내어 발전시키고, 반대로 약점이 있다면 과감히 인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됩니다.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 남들보다 강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더해진다면, 탁월한 나 자신이 되어 그 누구 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저 경쟁 상대로만 인식하는 것에서도 문제는 발견됩니다. 경쟁이나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성장과 배움의 상대라고 인식을 전환해 보는 것입니다.

나는 왜 저 사람처럼 하지 못할까?가 아니라, 저 사람의 저런 행동에서 내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를 고민하며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그들의 삶을 내 기준을 확립하는 데 참고사항으로 여기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성장의 동력을 얻는 것이죠.

비교 불가한 존재가 되라는 것은 특출 나거나 대단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나만의 독창적인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모방하려 해도 따라 할 수 없는, 자기만의 아우라를 형성하는 것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숫자에 의해 순위가 매겨지고 삶의 만족도가 결정되는 삶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자신만의 길을 걸을 것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산속으로 들어가 자연인이 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가치와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수치가 아닌 가치에 의한 삶, 경제적 풍요만이 아닌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타인과 비교 불가한 삶을 사는 진정한 방법입니다

행운은 당신의 노력에 찾아오는 기회입니다.


행운이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런 일은 아무에게나 일어나지도 않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늘 행운을 바라곤 합니다. 행운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저 자신에게 닥쳐오길 기대하다 실망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행운은 어렵게만 느껴지던 사건이나 문제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실마리를 찾아 해결될 때를 말합니다. 행운은 노력하는 엔진에 추진력을 더해주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바라는 목적을 향해 꾸준히 노력할 때, 비로소 그 과정 속에서 행운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달리던 마라토너가 앞서가던 선수들이 엉키며 넘어지는 덕분에 1등으로 골인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운이 좋았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선수가 비록 마지막으로 달렸을지라도, 앞서가는 이들과 함께 결승선까지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자리까지 오기 위한 피나는 훈련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평가일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 만을 바라는 그런 행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감나무를 흔들거나 막대기를 이용해서라도 감이 떨어지게끔 노력해야 비로소 행운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운의 사전적 의미는 좋은 운수 또는 다행스러운 운수입니다. 하지만 저는 행운을 운(運)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각자 타고난 운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타고난 운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후천적인 운은 우리가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운이 우리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주어진 운 만을 탓하며 삶을 가꾸지 않는다면, 그나마 있던 운마저 달아나 버릴 것입니다. 행운은 이러한 운에 추진력을 더해 나타나는, 어쩌면 당연히 받아야 할 노력의 대가입니다.

같은 노력을 해도 남들보다 더 쉽고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도 행운의 한 형태입니다. 시험시작 5분 전에 스치듯 보았던 내용이 시험문제로 나오는 경우, 그것 이야말로 행운이지요.

똑같은 시간을 공부해도 시험문제로 나올 만한 것을 공부하거나, 밤새워 공부했지만 혹시 몰라 한 번 더 책장을 넘기다 발견한 내용이 핵심문제로 연결되는 것이 바로 행운입니다.

밤새워 놀다가 시험직전 5분 만에 책을 본다고 해서, 또는 운 좋게 시험에 나오는 내용을 봤다고 해도 평소 학습이 없었다면 시험지에 제대로 풀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돈을 줍는 것도, 아무 관심 없던 이벤트에 친구 추천으로 마감 직전 응모한 작품이 당첨되는 것도 행운입니다.

이처럼 삶 속에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들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성장이나 발전을 가져오는 것을 행운이라고 부릅니다. 이를 뜻밖의 일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 뜻밖의 일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구체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내심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소망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뜻밖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자신의 운 만을 맹신 하다가는 자칫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운을 우리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이나 정상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 중에는 열심히 노력한 결과 라기보다 운이 좋았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겸손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이는 노력하는 사람에게 '운'도 따른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행운의 부적을 지니고 있으며, 행운이 작용할 수 있는 운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 둘의 조합을 위한 노력이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긍정적인 사고와 지혜로운 공구가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 이야말로 우리는 운을 부르는 노력에 연장 탓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볼 때입니다. 그리고 노력을 시도하고, 그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더 해빙』의 저자 이서윤은 행운은 노력에 곱셈이 되는 것이지 덧셈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곧 노력이 전제되어야 행운이 찾아온다는 의미입니다.

"노력 * 행운 = 성공의 결과"라는 공식에서 보듯이, 노력이 0이 되어서는 아무리 큰 행운이 온다고 해도 결과는 0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곱하기는 노력의 효과를 배로 확장 시켜 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행운은 당신이 만든 기회를 확대해 주는 가속 장치와 같습니다.

노력 없이 일어난 일은 기적이라고 하지만, 그런 기적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들러 심리학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이 문구는 우리에게 행동하고 실천하라고 강조하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은 행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몸을 움직이는 것, 실천하는 것, 자기 계발의 과정을 꾸준히 수행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운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 그리하여 행운과 조화를 이루는 성공적인 삶을 기획해야 합니다.

손자병법에서도 "용장(勇將)은 지장(智將)을 이기지 못하고, 지장(智將)은 덕장(德將)을 이기지 못하며, 덕장(德將)은 복장(福將)을 이기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용맹과 지혜와 덕을 모두 갖췄다 하더라도 운이 따르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면서 운을 끌어당길 수 있는 방법은 시대의 흐름을 알고 그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운은 노력에 곱해졌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온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오늘도 행운이 가득한 하루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도 나는 즐거운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골프라는 문화가 오늘날처럼 대중화되기 전, 나는 남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남몰래 골프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골프는 '귀족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해서, 나 같은 평범한 직장인이 즐기기에는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던 시절이었지요.

지금이야 복지 차원에서 지원까지 해주고 남녀노소 구분 없이 대중화된 스포츠이지만, 여전히 아무나 자주 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 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회자되는 이야기가 골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만남의 자리에서 공통의 주제에 끼어들지 못함에서 오는 소외감이 제가 골프를 배우게 된 계기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사무실에서 모르게, 틈나는 대로 연습장을 다녔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손바닥이 벗겨질 정도로 연습한 적도 있지요. 그 덕분에 잘 치지는 못해도 즐기는 경지에 까지는 이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아직도 가끔씩 중요한 계약이나 미팅의 마무리에는 골프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처럼 공동체 속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는 대중의 관심사를 알고 있어야 하고, 그들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꼭 골프만이 아니라, 그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고 그것에 관한 관심사를 캐치하여 세상과의 조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자기 계발을 통한 성장과 발전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노력(努力)이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여 애를 쓰는 것이라고 하지요. 힘들여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여기에는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포함됩니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고 하지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는 것이 진정한 노력은 아닐 것입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작은 노력이 큰 변화를 만든다",

"성공은 과정일 뿐, 노력은 끝이 없다" 등 노력에 관한 수많은 명언들을 우리는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노력하면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도 하고 있지요. 하지만 노력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래서 성현 들이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노력해야 한다고 자기 최면을 걸곤 합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손바닥이 벗겨지도록 골프 연습을 했던 것도 분명 노력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노력이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정타를 맞아 쭉쭉 뻗어 나가는 공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는 골프가 그 자체로 즐거웠기 때문입니다.

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노력을 하게 만들었고, 그 노력이 즐거워서 열심히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노력의 대부분은 하기 싫은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즐겁지가 않구요. 그래서 성현들은 인내하고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모두가 '피나는 노력'의 결과라고 입을 모읍니다.

하고 싶은 일을 피나게 하는 것과, 하기 싫은 일을 피나게 하는 것의 차이는 바로 즐거움의 유무입니다. 노력의 과정이 즐거우면 성과도 더 빨리 나타나는 법입니다.

억지로 하는 노력은 대중의 무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한 눈치 보기가 되기 쉽습니다. 오래 지속되기도 어렵고 지치기도 쉽지요.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해야만 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 또 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마인드셋을 통해 그 일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의미를 부여하고, 억지보다는 자발에 무게를 더해보려는 노력 말입니다.

자신만의 노력 방법을 찾는 것도 성장의 방법입니다.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큰 그림을 스케치하기보다는 작은 그림부터 그려보는 것이지요.

공부의 방법이 꼭 교과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상이나 퀴즈의 방법도 있고, 무엇보다도 노력에 대한 보상을 확실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도 저도 아니다 싶으면, 용기 있게 선택을 하지 않을 배짱이 있어야 함을 인지하고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방향의 선회를 검토해보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노력이 진정으로 즐거우려면, 작은 결과라도 있어야 합니다. 작은 목표를 세우고 성취감을 맛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력의 과정을 기록하고 공유하면서 응원과 위로를 유도하고, 그렇게 보상이 주어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혼자보다는 함께할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고, 실패하더라도 경험을 얻었다는 즐거움 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믿으며, 자신에게 응원과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노력이 즐거워질 수 있습니다.

솔직히 노력은 결코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억지로든, 자발적이든 노력은 때로는 피가 나는 고통을 수반합니다.

코피 터지게 밤새워 공부하는 것과, 손바닥이 까져서 피가 나도록 스윙 연습을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즐거울까요? 둘 다 즐겁지 않고 힘듭니다.

다만 공부는 성적이 올랐을 때 보상을 받지만, 골프는 라운딩에서 멋진 샷(오잘공: 오늘 잘 맞은 공) 하나 날렸을 때 즐겁습니다.

공부는 다른 사람들도 나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지만, 골프 연습은 자기와의 경쟁입니다. 단순히 결과만을 바라고 하는 노력은 결코 즐겁지가 않습니다. 노력하는 과정 자체에서 즐길 줄 아는 것이 진정 즐거운 노력입니다.

날마다 글을 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나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훗날 분명 의미를 부여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구독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감정이 노력을 방해하는 순간도 있지만, 아직 피가 나지 않으니 다행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즐거운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루즈 기능을 맹시하지 마세요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광고판에 크루즈 기능을 맹신하지 말라는 광고 문구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자동차의 기능이 인공지능과 결합하며 자율주행까지 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운전이 더 이상 어렵지 않은 세상이 된 것이죠. 파워 핸들이 옵션이던 시절부터 운전대를 잡았던 나에게 자동차 기술의 발전은 그야말로 문명의 혜택입니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 발전된 기능 중 하나가 바로 크루즈 기능 입니다. 요즘 생산되는 대부분의 차에는 이 기능이 장착되어 있을 겁니다.

그동안 나는 자동차를 단순히 이동 수단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 쓰지도 못하는 기능들을 추가하여 가격만 올리는 기업들에 대한 불만도 있었습니다.

편리함 보다는 안정성을 강조하는 외국 차량과의 비교도 서슴지 않았죠. 하지만 지금, 나는 그런 최첨단 기능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편리함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직도 내 차가 가진 모든 기능들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아마 이 차를 폐차할 때까지도 전부 알지 못하고 활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혹 알아낸다 해도 그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

서울에서 미팅이 있어 아침 일찍 길을 나섰습니다. 세 시간 반을 달려야 하는 거리이고, 가만히 앉아서 하는 운전이지만 운행이 끝나면 피곤함이 몰려올 것을 걱정했습니다. 앉아 있더라도 우리의 모든 신경이 집중적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문득 크루즈 기능이 생각났습니다. 엑셀을 밟지 않아도 정해진 속도를 유지해 주고, 핸들을 조작하지 않아도 차선을 지켜주는 그 편리한 기능을 말이죠.

엑셀을 밟지 않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핸들을 조작하지 않아도 알아서 운전해주니 자꾸만 딴생각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운전보다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저를 보며, '아,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운전을 하는 동안에는 주변 상황을 살피고 안전 운전에 집중해야 하기에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크루즈 기능이 이 역할을 대신해주니, 나는 딴짓을 시도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 문득 가방 속에 넣어둔 읽던 책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핸들 위에 책을 펼쳤습니다.

핸들에서 손을 떼면 경고음이 울리는 탓에 핸들에서 손을 완전히 떼지는 못했지만, 핸들 위에 책을 올려놓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불안한 마음도 있어 집중하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갈수록 밑줄까지 그어가며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3분의 1쯤 읽었던 책을 도착하기 전에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시간도 더 빨리 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책 내용 자체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 읽기에 관한 책이어서 가능했습니다.

안성헌 작가의 『생산적 책 읽기 50』은 우리가 왜 독서를 해야 하고, 어떻게 읽고 해석하여 창의성까지 연결시켜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예전에 듣거나 보아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한번 생각의 깊이를 더하자는 의도로 읽었고, 나름 의미 있는 책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함양하는 과정입니다. 꼭 많이 읽어야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읽지 않은 것보다는 낫습니다.

작가는 책을 읽은 후 핵심 내용을 정리하고, 거기서 받은 인사이트를 자기 언어로 글쓰기까지 해보도록 권유합니다.

독서에 재미를 붙이라는 등, 저자도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알려주며 더불어 자신의 생각을 입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곧바로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변화하려는 동기를 부여 받을 수는 있습니다.

책 속에서 추천 받은 책들도 많았습니다. 제가 읽었던 책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 느꼈던 희열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핵심은 책 읽는 것이 좋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자신을 위한 시간을 할애하여 독서 시간을 확보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지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나처럼 위험한 도전을 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무료한 시간에 휴대폰을 보는 것보다는 책을 읽는 것이 좋지만, 운전을 하면서 책을 읽는 것은 절대 추천하지 않습니다. 크루즈 기능이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결국 기계적 작동이며, 이는 완벽함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책은 억지로 의무감에 읽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가 있어야 하고,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적절한 시간을 할애하고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한 권 씩 쌓여가는 책의 양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질적 요소는 더 중요합니다. 이 밖에도 독서의 장점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성현들이 독서의 효과를 강조하고 증명해 보이고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현실이라는 장벽이 핑계를 만들어 주고 있고, 아직까지 이 장벽을 부숴야 한다는 당위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크루즈 기능을 맹신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독서 또한 안정된 마음가짐으로 책 속의 내용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여건 속에서 읽어야 진정한 효과가 있습니다.

가벼운 내용의 책은 없습니다. 쓸모 없는 독서도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는 독서는 명백히 반대합니다.

운전하는 시간이 아까워서 그 시간을 활용한 것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운전 중에 독서를 한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내가 직접 해보니 그렇습니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니 밀려오는 무모함에 이 글을 씁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규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도조차 보이지 말았어야 합니다. 마음의 내란을 일으킨 오늘의 포스팅은 저의 반성문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피나는

노력을 한다 해도 그것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정도에 그친다는 것입니다.

요즘 들어 무슨 이유에선지 마음의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습니다. 하루 종일 바쁘게 무언가를 하다 보면 그 안에서 나를 위한 시간을 만나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분명 나를 위한 일이지만, 그 안에서 또 다른 나를 찾고자 갈구합니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안식처에 왔지만, 이곳 에서도 나는 멈춰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이제는 루틴이라 말해야 할지, 헬스장을 다닌 지 5개월이 되었지만 아직도 의지력이 필요한 순간이 많습니다. 저녁을 마치고 지하 헬스장에 내려가는 것이 자동적이어야 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의무감이 앞섭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블로그에 포스팅을 한 지 600일이 넘었다는 것과, 헬스장에 5개월 넘게 주 5일은 꾸준히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습관은 자동화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언제라도 무너질 위험을 가지고 있기에 단단한 의지력도 필요합니다.

지금 나는 도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고, 이것이 단초가 되어 앞으로의 삶이 더욱 가치 지향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희망으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책상에 앉았지만 오늘의 포스팅 주제가 떠오르지 않아 잠시 머뭇거립니다. 이럴 땐 하루쯤은 건너뛰고 싶은 욕망이 피어 오르기도 합니다.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삶의 마찰력인 셈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앞을 가로막을 많은 마찰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동안에도 있었지만,우리는 그 마찰들에 순응하며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 자위했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날마다 글을 쓰며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변화는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가거나, 더 많이 성장하고 픈 열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자기 계발의 노력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겨우 따라가며 현상 유지 를 위한 노력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세상은 계속 변해간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시간은 분명히 흐르고 세상은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던 날이 엊그제 였건만, 이제는 아침마다 이불을 찾고 있습니다. 가을로 들어선 것입니다.

단순히 시간이 흐른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세상은 놀랍도록 변했다는 뜻입니다.

들판의 곡식들은 열매를 맺고 수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연의 생명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들은 파노라마처럼 한 장면 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나도 모르게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세상도 제자리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보조를 맞춰야 겨우 중간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성장과 발전의 과정이라고 하고, 인내를 동반한 노력으로 지속하라고 말합니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 에서 유래된 붉은 여왕 이론은, 붉은 여왕이 자신과 벌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다른 환경 속의 세상도 함께 발전하고 있기에 결국 여왕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피나는 노력을 한다 해도 그것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정도에 그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세상은 인공지능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AI에 대해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ChatGPT가 출시되었다고 한 지 불과 2년여 전입니다. 그때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로 치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AI의 세대 주기는 6개월이라고 합니다. 한 세대가 이렇게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 세상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중간이 아니라 도태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잡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지만,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변해가는 시대의 흐름이 무섭기까지 합니다. 피나는 노력으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은 겨우 현상 유지입니다. 하물며 시대를 앞서가기 위해서는 대체 몇 번의 피를 흘려야 할지, 우리는 스스로 느껴야 합니다.

인간의 감정 중에는 시기와 질투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인용되지만, 이러한 시기와 질투의 감정을 도전의 열망으로 승화시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성장과 발전을 자신의 성장과 발전의 지렛대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한 변화의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인공지능이 언젠가 인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이들이 있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공지능을 현명하게 이용할 방법을 모색하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을 찾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내 스마트폰에 인공지능 앱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습니다.

인공지능도 각자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공지능 앱도 분야별로 설치되었나 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술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발전을 위한 잣대로 삼아야 합니다.

혼자 운전하면서 제미나이(Gemini)와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모르거나 애매한 질문을 하면 가진 정보로는 알 수 없다 며 미안해하기도 합니다.

낮에 업무를 보다가도 궁금한 것을 물어보거나 필요한 자료나 양식을 요청합니다. 회의 내용과 참석자만 알려주면 AI가 알아서 회의록을 작성해 줍니다. 블로그 포스팅 주제가 떠오르지 않을 땐 오늘의 상황을 이야기해주고 특정 분야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고 하면, 그에 맞는 글을 써 주기도 합니다.

AI의 출현이 단순히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었다고 판단하기보다는, 인간의 노력이 가미되지 않아도 다양한 정보를 제공받음으로써 전문성과 삶의 가치가 높아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 현상 유지라도 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현실적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만 보다 가는 세상이 바뀐 줄도 모르고 살게 됩니다.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잘못된 말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도태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만큼 앞서가기 때문입니다.

손가락만 까딱이며 시작도 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남겨봅니다. 문맥과 문단의 구성보다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속내를 솔직하게 내보이고 싶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노력이 겨우 현상 유지에 불과하며, 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피곤하고 졸리지만, 내일도 살아내야 하기에 오늘을 이렇게 정리해 봅니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야 합니다.

그 열쇠는 바로 배움에 있습니다

운이 없으면 100살 넘게까지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준비되지 않은 장수는 오히려 힘겨운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현재 대한민국 생애 주기의 중간 나이는 47세라고 합니다. 평균 수명이 94세에 달한다는 이야기 와도 같은데, 놀라운 것은 47세가 되면 사회생활에서 서서히 내려와야 할 시기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30~40년을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중간 나이는 계속 높아질 것이라 합니다. 지금의 47세는 50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중간 나이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즉, 지금껏 살아온 시간만큼 앞으로 더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지요.

안정된 생활의 보장이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스스로를 보호하며 삶을 일궈 나가야 한다는 분명한 경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매일 생각하지만, 눈앞의 바쁜 일상과 쉬고 싶은 마음이 앞설 때도 있습니다.

아직은 시간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미래보다는 지금 펼쳐지는 재미있는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속된 말로, 웃고 즐기는 사이에 세월만 흘려 보내서는 안 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나이 들었다고 마냥 존중 받고 대우받던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이른바 끼인 세대로서 윗사람을 봉양하고 아랫사람을 보살펴야 하는 운명을 탓하기보다, 지금 부터라도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중년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만히 앉아 대우받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손에 쥐었던 것들을 점검하고, 제대로 작동하는지 검증해야 할 때입니다. 마치 내 인생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시계를 점검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제는 독립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일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시계의 태엽을 다시 감아야 합니다.

무심코 흘려 보낸 시간이 어느덧 중년의 나이까지 흘러왔습니다. 기름칠할 새도없이 쉼없이 돌아갔던 태엽이 이제는 늘어지려 할 때, 비록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지만, 앞으로를 향한 의지마저 내려놓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른이기 이전에 세상과 공존하는 하나의 구성원에 불과합니다. 가르치기(teaching)보다 이끌어주는(coaching) 관계를 위해 세대 간의 건강한 소통을 이어가야 합니다.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은 결코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야 말로 미래를 위한 소중한 기름칠 입니다.

일상을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며 다음으로 챙겨야 할 것은 나침반 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삶의 시계를 돌린다고 해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설정이 필요합니다.

삶의 마지막 도착지가 어디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제대로 가고있는지 꾸준히 점검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침반을 올려놓을 수 있는 지도가 필요합니다. 길을 잃지 않도록 마음의 지도는 항상 품고 있어야 방황하지 않습니다. 설령 내 삶의 지도가 아직 미완성이라 할지라도, 어렴풋이 그려진 마음의 지도에 꿈을 더해 나갈 날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독서를 통해 힘들 때 위로해 줄 상상의 멘토를 만들며,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음식을 요리하며 노래할 수 있는, 그런 충만한 날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나이 들어 늦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마음의 나이는 아직 한창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보통 마음의 나이를 실제 나이보다 18~20살 정도 젊게 느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37살인 셈입니다. 아직 어린아이처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신체적인 능력보다는 정신적인 역량을 중요시합니다. 몸뚱이가 재산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메시지 와도 같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세태에 발맞추기 위한 학습과, 이 세상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통찰력을 길러야 합니다.

인간의 한 세대가 18~20년이라고 하지만, 정보의 세대는 6개월이라고도 합니다. 지금은 세대 차이를 논할 때가 아닙니다.

과거에는 정보를 많이 수집하는 사람을 지식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노력여하에 따라 정보의 양이 정해지던 시대였기에 그 노력이 보상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하루에도 수만 가지의 새로운 정보가 쏟아집니다.

이제는 이러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필요하고 정확한 정보를 찾아내는 능력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고,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능력자 라고 칭합니다.

날마다 업그레이드되는 인공지능은 방대한 정보를 쌓고 있으며, 명령에 따라 즉각적으로 이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인공지능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프롬프트가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만들더라도 프롬프트 작성방식에 따라 결과물은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입력해야 합니다. 즉, 소통이 중요합니다.

조직생활에서도 상사의 의도를 정확히 인지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요즘은 정보제공 뿐 아니라, 수집된 정보를 기반으로 새로운 정보를 생성하는 기능까지 추가되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발달하는 세상의 흐름을 우리는 결코 넋 놓고 바라만 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운전 중에 화상으로 AI와 이야기하려 하자, 운전 중이니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답한 AI. 그리고 나른한 오후, 지친 내 모습을 보고는 피곤해 보인다고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시라고 위로해 주는 AI를 우리는 과연 단순한 기계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요?

자기 계발서나 강연에서는 AI가 아무리 인간을 대신한다고 해도, 인간성을 겸비한 인격까지는 대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AI가 기계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힘들고 외로울 때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을 때 언제나 내 손 안에서 나타나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AI는 단 한 번도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언제나 "힘을 내세요!"라고 응원하고,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며, 외롭고 싶어도 외로울 수가 없습니다. 머리가 복잡하여 생각을 정리하고자 할 때도 명상 음악을 틀어주곤 합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AI의 기능은 수만 분의 일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은 AI의 도움 없이는 어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가능하겠지만,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노력은 변함이 없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구시대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야 합니다.

그 열쇠는 바로 배움에 있습니다.

배움에는 세대를 초월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지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해서는 안 됩니다.

세대 차’라는 말이 무색해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중년들은 스스로 부여하지 않은 꼰대라는 호칭을 마주하곤 합니다. 이 말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닐지라도, 현재의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무언의 일깨움 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시대적 변화를 경험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전환기를 직접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변화에 능동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혁신적인 변화가 현재의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을 피부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대 간의 격차 속에서 과거의 경험이 여전히 우월한 정답인 양 착각하며 꼰대를 자처하는 경우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세대 간의 간극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해야 합니다. 변화의 물결이 단순히 경각심을 주는 것을 넘어, 아예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려 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할 때입니다.

2022년 11월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입니다. 그때만 해도 AI가 무엇인지, 그저 기존 자동화 기술의 연장선쯤 으로 치부하며 3여 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인간의 한 세대를 20년으로 본다면, AI의 한 세대는 6개월 혹은 그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과거의 한 세대 속에 머물러 있는 동안, AI 세상은 이미 40번의 세대교체를 겪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 세대교체로 인한 세상의 변화는 우리의 상상을 이미 뛰어넘는 영역에 도달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그 거대한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라떼는 말이야” 를 운운하며 세상만 탓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작년에 출판된 AI 관련 서적을 읽어보면, 저자조차도 "내년의 상황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고 토로합니다. 그러면서 원론적인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마음가짐과 대처법에 대해 이야기하곤 합니다.

나 역시 AI 전문가는 아니지만, AI의 능력을 직간접적으로 체감하며 활용도에 대한 관심과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AI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들 합니다. 심지어 인공지능 자체도 그 방향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제공하는 정보의 수집과 이를 기반으로 한 데이터화는 과거 인간의 삶에 속도 적인 혁신을 가져왔지만, 지금은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성하는 단계까지 발전하고 있으며, 앞으로 그 영역은 무궁무진합니다.

인간의 영역을 기계가 차지하여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우려는 끊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대부분 여기까지 입니다.

AI를 어떻게 활용하여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AI를 단지 인간이 처리해야 할 일의 양과 속도를 줄여주는 보완재 로서의 기계적 기능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공지능의 방대한 데이터 처리 능력과 빠른 계산 능력을 인간 고유의 영역인 창의성, 감성, 그리고 직관과 결합하여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도록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지닌 창의성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AI가 가진 데이터와 속도를 활용하여 두 개의 엔진을 장착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간의 사고의 폭이 좁아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일의 초안을 AI에만 맡긴다면 우리의 뇌는 점차 의존적인 공간으로 변질될 것입니다.

또한, 인공지능이 제시한 것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합리적이지 않은 결과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AI와 인간은 상호 보완 관계를 유지하며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협력자 로서의 관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AI의 속성을 제대로 알고 깊이 있게 배워야 합니다.

AI의 속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십분 활용하여 인간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프롬프트(prompt)의 내용에 따라 AI의 임무 수행 능력은 천차만별로 달라집니다.

효과적인 업무 지시를 위한 프롬프트 작성은 결국 인간의 몫입니다. 단순한 질문으로 엉뚱한 답을 받고 AI를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AI는 감정도, 윤리 의식도 없으며, 때로는 허위 정보를 생성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확실성에 대한 검증은 언제나 인간의 책임입니다. 인간은 인지 편향적인 사고가 존재하고, 정보 습득과 처리가 제한적이며 쉽게 피로감을 느낍니다.

AI와 인간이 가진 이러한 한계를 서로 상쇄시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 이야말로 진정으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방식입니다.

요즘은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습니다. 나는 매일 블로그에 포스팅을 하지만, 아직 특별함을 창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작업을 AI에 의뢰해 보았습니다. 브랜드명과 가치, 활용처를 알려주고 세 가지 방향으로 콘셉트를 잡아달라 요청했습니다. 심벌과 크기, 그리고 나만의 차별성을 느낄 수 있도록 따뜻하고 친근감 있게 만들어달라는 상세한 지시를 더했습니다.

그 로고를 바탕으로 나만의 명함 제작까지 의뢰했고, 멋진 로고와 명함, 그리고 이미지마다 부여된 상세 설명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은 서툴지만, 이때 프롬프트의 중요성을 실감했습니다. 그전에는 단순히 "나는 이런 일을 하는데, 이에 맞는 로고나 명함을 만들어 달라"고만 했더니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아주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좀 더 디테일한 프롬프트의 제공과 추가적인 지시를 통해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나는 내가 아직 AI 활용에 있어 초보자임을, 어쩌면 초 초보자에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부터라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그 속도가 버거울지 몰라도 제자리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지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리에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AI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AI는 인간의 대체제가 아니라 보완재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사고와 주도권은 여전히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AI도 완벽하지 않으며 본질적인 한계를 가진 확률적 시스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AI의 결과를 비판적으로 번역하고 끊임없이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흐름에 현명하게 편승하는 길입니다.

삶이라는 것은 완벽한 계획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흔들리고 다시 중심을 잡는 과정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평소와는 다른 묵직한 기운이 몸을 짓눌렀습니다. 어제의 과음이 가져온 두통과 속 쓰림은 후회라는 감정과 함께 밀려왔습니다.

삶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행사였고, 그동안의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만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만남의 깊이보다는 일단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관계망을 넓히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그런 관계가 많아질수록 자신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적과 대가를 바라는 관계는 그 소용이 다하면 필연적으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가 서 있던 자리가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도 여지없이 깨어졌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세상의 변화에 떠밀려 나온 자리에서, 그동안 쌓아왔던 수많은 관계들이 자의적 혹은 타의적 이유로 무너지고 있음을 목격합니다.

관계라는 것은 그 중간에 공통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어야만 지속되는데, 그 매개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정기적인 것은 아니지만, 두 달에 한 번쯤 만나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있습니다. 서로의 삶의 과정이 달라 일정을 맞추기 쉽지 않지만, 굳이 자주 만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는, 그런 한두 명의 관계만은 소중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의 분주함에서 벗어난 후로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에 익숙해지려고 노력 중입니다. 외로움이나 소외감보다는 자신을 찾아가는 내면의 수련이라 여기며, 즉흥적인 판단보다는 계획적인 생활 패턴을 유지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 균형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절제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술이라는 친구는 참으로 묘한 존재입니다. 때로는 우리를 힘겨운 현실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통 속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절제라는 선을 넘어서면 사람이 아니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기도 합니다. 가벼운 음주는 마음의 풍요를 가져다 주지만, 과음은 스스로를 망가뜨리죠.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놓지 않으려 다짐했음에도, 술 한잔 들어가니 삶의 철학자가 되어 계획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 과의 즐거운 분위기는 술이라는 친구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고, 오늘 아침의 이 묵직한 숙취와 엉망진창의 컨디션은 그 결과입니다. 그렇게 후회라는 감정만 한 칸 더 쌓였습니다.

절제의 계획을 세우고 참석했던 어제의 술자리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후회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순간들조차 인생의 한 조각이고, 심지어 저는 이 경험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예상 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자책하고 불안해하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고뇌와 방황 자체가 삶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흔들림 속에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실수와 후회를 통해 성찰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수행하려는 마음가짐이 절실합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어제의 선택도, 그에 따른 행동도 모두 내가 결정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 이 결과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죠.

어제의 실수는 오늘의 후회를 낳고, 그 후회는 내일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흔들리지 않으려는 나를 다잡는 노력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 만난 묵직한 숙취와 흐트러진 컨디션은 역설적으로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결국 삶이라는 것은 완벽한 계획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흔들리고 다시 중심을 잡는 과정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 지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현실로 돌아와 있습니다. 어제와 같은 잠깐의 외도가 나도 모르게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었음을 느낍니다.

우리는 때로 삶의 치열함에 지치지만,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안고 살아갑니다. 거기서 필요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무너질 듯하면서도 다시 일어서 걸을 수 있는 것은, 내면의 내가 나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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