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학년 칠반의 노래

by 용혀기

- 목 차 -



전주 자기 발견 - 진정한 나를 찾아서

오늘은 내 마음속 깊이 숨어있던 나 자신을 찾아봅니다/7

지피(知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기(知己)입니다/12

눈을 감는 것은 곧 나의 세상을 보고자 하는 행위입니다/16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21

시험을 치르는 중입니다/27

수금지화목토전해명자(자기자신)/34



1절 내면의 힘 - 간절함과 의지

간절함, 그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가장 순수한 열망입니다/40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 데!/45

나는 오늘 희망을 샀습니다/50

내 안의 생각 공장을 보살피는 것부터 시작하자/56

더 해빙은 가지고 있음을 충만하게 느끼는 감정 이라고 해석 할 수 있습니다/61

마음의 건강검진을 받아보려는 것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67



2절 관계의 지혜 - 신뢰와 배려

믿음을 보여주고 신뢰를 얻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야 할 기본적인 삶의 도구입니다/71

우리 모두는 마치 한 편의 연극 공연을 기획하고 있는 연출가와 같습니다/76

자신을 먼저 돌본 후, 상황 판단에 따라 분별력을 잃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80

그때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었고 지금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 변치않는 진리를 일깨웁니다./86

오늘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입니다/92



3절 세상을 보는 눈 - 관점과 통찰

보이는 것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98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102

세상의 진실은 각자의 기준으로 정립해야 한다/108

봉이 김선달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113

은유는 감성의 언어라고도 합니다/118

세상을 살아갈 때도 있지만 그저 살아질 때도 있다./123



간주 성장과 도전 - 차별화와 우수성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남들과 달라야 한다/129

우수성은 곧 차별화를 의미합니다/133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타인과 비교 불가한 삶을 사는 진정한 방법입니다/136

행운은 당신의 노력에 찾아오는 기회입니다/142

오늘도 나는 즐거운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147



4절 변화와 적응 - 시대의 흐름

크루즈 기능을 맹신하지 마세요/152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피나는 노력을 한다 해도 그것은 현 상태를 유지하는 정도에 그친다/157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야 합니다. 그 열쇠는 바로 배움에 있습니다/163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지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면, 시대의 흐름을 역행해서는 안 됩니다/169

삶이라는 것은 완벽한 계획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흔들이고 다시 중심을 잡는 과정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175

나는 공장장이다/180



5절 현실과 균형 - 통제와 수용

미래를 예방하고 대비함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185

계획한다는 것은 날마다 마주하는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189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지혜 입니다./194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 사이에서 건강한 균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199

위기의 부재는 결국 남에게 끌려 다니는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194




6절 여정과 도착 - 삶의 방향

떠난다는 말은 필연적으로 도착한다는 말에 도착한다/209

나는 지금 제2의 삶이라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 인생의 기차역 대합실에 앉아 있습니다./214

인생의 넝쿨은 없는지 한번쯤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고/220

인간에게는 대비할 지혜를 주고 달에게는 삶의 역경을 경험하게 하는 구름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228

집행유예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삶을 기약해야 합니다/



후렴 성찰과 기록 - 일상의 장관

배움을 통한 깨달음의 장관(壯觀), 작지만 일궈낸 성취의 장관(壯觀)/237

나는 지금 매일의 기록을 쓰고 있습니다/242

그동안의 나에게 진심 어린 사과의 말을 전합니다/249


에필로그




그렇게 나의 노래는 시작되었다.








오늘은 내 마음속 깊이 숨어있던

나 자신을 찾아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성벽 망루에 올라 적들의 동태를 살피느라 아침부터 정신이 없습니다. 어제 보았던 적의 매복 그림자는 아직도 나의 경계를 늦추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 사는 인생을 전쟁에 비유하곤 합니다. 허물어져가는 성벽 위에서 시커멓게 몰려오는 적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전략을 수립하느라 정작 나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장 쳐들어오는 적들을 물리쳐야 하는 현실이, 우리 자신을 그렇게 내팽개치게 만듭니다. 간신히 어느 정도 물리쳤다고 생각되는 적들 사이로 또 다른 적들이 몰려오고,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칼과 방패를 잡아야 합니다.

오늘만 사는 것처럼 가진 에너지를 다 소비해도 물리쳐야 할 적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지만, 점령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내일은 평화가 찾아올 거라 생각하지만, 내일은 또 다른 적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에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고 부러진 창과 칼을 다시 정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날마다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성안에 갇혀 평화롭다고 느꼈던 것은, 내가 아직 성벽에 올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성벽에서 몰려오는 세상의 적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견고해 보이는 성벽과 믿음직한 병사들의 시선에 맞춰 타인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자신을 돌보기도 벅찬 세상 이라고들 말합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혹독해야 하고, 타인의 시선을 놓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래는 예측할 수 없기에 불안하고 두렵다며 도전을 멈추어 버립니다.

저 역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도전과 준비는 먼 훗날의 이야기로 치부하고, 안락의자의 편안함 속에서 망중한(忙中閑)을 즐겼던 것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성안에서의 평안함이 끝나고, 이제는 타인의 평안함을 위해 성벽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리고 밀려오는 적들의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며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휘몰아치는 공격에 지쳐, 평소보다 일찍 사무실을 나와 버렸습니다. 아직 이른 퇴근 시간이라 도로 위 차들은 여유롭게 달립니다. 집 근처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서, 공원 근처에 차를 세우고 눈을 감아봅니다. 큰길에서 벗어나 들어선 골목은 고요합니다.

가끔 지나는 차들이 있긴 하지만, 한적함을 느끼기엔 충분합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접어 두었던 부분부터 읽어 내려갑니다. 이런 것도 나름의 낭만입니다.

출퇴근길 신호등에 걸릴 때 몇 줄 씩 읽긴 하지만, 그때는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안정된 밑줄과 자간을 따라가는 시선이 온전히 책에 집중됩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 뒤에 차 한 대가 멈춰 섭니다. 그리고 운전자가 내리더니 트렁크를 열고 뭔가를 꺼냅니다. 꺼낸 것을 보닛 위에 올려놓고 어디론가 가더니, 그릇 하나를 가져와 그 안에 아까 꺼낸 것을 덜어 담아 다시 가져왔던 곳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그러고 보니 공원에는 나무가 무성했고, 학교 담장 밑에도 나무들이 있어 정확히 무엇인지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익숙한 듯 그 여인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근처 서너 곳을 돌아다니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나서 유유히 사라집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했습니다.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었던 것입니다.

차를 타고 올 정도면 어느정도 먼 거리에서 왔다는 것이고,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의심도 들지 않았습니다.

반려 고양이도 아니고,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길고양이들을 돌보는 행위에 대해 칭찬은 못 해줄지 언정 경멸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병원균을 옮길 수도 있다는 인간들의 의심 때문에 천대받는 생명들을 돌보는 것 또한 인간이 하고 있습니다.

길고양이를 돌보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고려한 행동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천대받는 동물을 돌본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칭찬과 성원을 보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이 평안해서 할 일 없다는 핀잔만 듣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저 또한 그런 타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문득 배려 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쳤습니다.

이것이 배려인가?

자신을 돌보기도 급급한 세상에 인간이 아닌 동물을 돌보는 것은 분명 그 사람의 마음속에 배려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 지만, 자신이 먼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려동물을 챙기는 행위는 자신에 대한 완벽한 믿음이나 돌봄의 결과 라기보다는, 완벽함에서 나오지 않는 배려심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더 부족한 상대방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마음.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간 에요.

길고양이들을 챙기는 것보다 불우이웃을 돌보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배려의 마음은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에, 이를 바꾸려 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평소에는 그저 그런가 보다 지나쳐버렸던 모습 속에서, 오늘은 내 마음속 깊이 숨어있던 나 자신을 찾아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며 평화로운 인생을 살고 싶지만, 성벽을 오르는 적들에게 베풀 배려보다 나 자신을 지켜야 하는 현실의 무게를 잠시나마 덜어보고자 한다면, 미완의 배려심 이라도 발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하루였습니다.




지피(知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기(知己)입니다.


지금 처해있는 상황을 보고 현실을 직시하라.그리고 그 현실에 맞게 자신의 행동을 취하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하지만 나는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외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방황하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어쭙잖은 자기 암시나 명상을 통해 스스로를 최면에 걸리게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자기 계발서나 경영 관련 서적에는 리더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기업을 경영하든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든, 같은 경영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경영의 기본은 바로 자신(혹은 기업)의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경영 또한 스스로를 냉정하게 돌아보는 지기(知己)에서 시작됩니다.

지피(知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기(知己)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잘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못나지도 않았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왜 힘든지 원인을 파악하지 않고, 힘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행동하지 않습니다.

질책을 받아도 반문하지 못하면서 나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죠. 이것은 자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부족한 탓이며, 또한 공동의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눈치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없는 사람들끼리 연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서로의 부족분을 상쇄시켜 주기 때문이죠.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공동의 힘을 빌리려 합니다.

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현실을 왜곡하려 드는 것은 모순입니다. 리더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 잘못된 길임을 알면서도 공동의 의견을 존중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리더의 역할은 중요하고 조직의 성장과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리더 혼자만의 몫은 아닙니다. 리더와 팔로어 간의 공통된 인식이 있어야만 진정한 리더십이 발휘되고,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도 리더(외면)와 팔로어(내면)가 존재합니다. 보여지는 모습과 내면의 모습이 일치하는 것이죠.

마음에서 내는 소리를 우리는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마음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내리는 명령을 우리는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이렇게 외면과 내면의 조화를 통해 비로소 성장하고 발전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과거의 답습에 젖어 변화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연공과 호봉이라는 감나무 아래에서 입만 벌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살아왔던 지난날을 반성한들 의미가 없습니다. 안락의자의 포근함이 현실의 딱딱한 감각을 잊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잭 웰치는 리더십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그가 조직이나 기업, 개인의 변화를 위한 조언 중 스웨터'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겹겹이 껴입은 스웨터 때문에 외부 온도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전형적인 관료주의라는 것이죠. 기업의 의사 결정 단계가 껴입은 스웨터만큼 겹겹이라면, 바깥의 온기가 최종 의사 결정자에게 닿기도 전에 눈이 녹아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 경영자들은 외부 환경 변화에 둔감해 진다고 경고합니다.

조직에 단계가 있고 절차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단계와 과정이 너무 층층이라면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가 위까지 들리지 않게 됩니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은 바로 시급히 바로잡고 보완하자는 의미입니다. 잘못된 경영에 대해 단계별 스웨터를 벗겨내다 보면, 이미 겨울은 지나가 버린다는 냉혹한 현실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급속하게 진행되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자신을 가두고 현실을 왜곡하려 든다면 안 됩니다.

선택은 순간적이지만 현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했더라도 환경은 변하기 마련이고, 순식간에 잘못된 선택으로 바뀌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 직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타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카멜레온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신대로 유연하게 변할 수 있는 지기(知己)가 갖추어져 있다면 세상과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때로는 슬픈 일입니다.

현실이 냉혹하니 허황된 꿈을 품지 말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좋을 때는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좋았던 현실이 과연 있었을까요?

오늘도 우리가 맞이한 현실이 고달플지 희망적일지는 오롯이 우리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눈을 감는 것은 곧 나의 세상을 보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경쟁하듯 달려왔던 각자의 자리에서, 이제는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또 다른 경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퇴근식이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이 회귀본능은 인간 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에 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분명 각자의 자리가 있었지만, 언제 부턴가 그 자리에서 벗어나 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군중속에 섞여, 진정한 나를 잊고 살았던 것이죠. 그렇게 돌고 돌아 뒤돌아보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되돌아가고 싶은 것이 우리네 인생인가 봅니다.

지금 나는, 오랫동안 떠돌았던 세상 어딘가에 있을 내 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회귀본능을 넘어, 이제부터라도 나의 삶을 살아보겠다는 더 큰 의지의 발현입니다.

한여름의 무더위가 꺾이는 듯, 비까지 내리는 퇴근길은 감수성마저 스멀스멀 끌어올립니다. 굵어진 빗방울이 차체에 부딪혀 내는 소리가 귓가를 타고 고막에 이르면, 거기에서 연결된 망치뼈가 달팽이관을 통해 청세포를 자극하고 뇌로 전달됩니다. 뇌의 명령에 따라 제 가슴속에서는 감성의 지수가 한껏 높아집니다.

번잡한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골목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고, 조용히 눈을 감아봅니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들어왔던 빗소리가 중년이 되고 세컨드 라이프를 살아가며 방황하는 지금의 나에게는, 단순히 빗소리가 아닌, 지금 가고 있는 길에 대한 점검의 소리로 들립니다.

눈을 감는 것은 곧 나의 세상을 보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눈을 감는 것은 너무나 쉽습니다. 하루에도 수만 번 눈을 감죠. 찰나의 순간이라 감지하지 못할 뿐, 우리는 살아가는 현실의 세상과 나만의 세상을 왕복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을 뜨면 현실, 눈을 감으면 나만의 세상. 그동안 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살아도 코를 베이는 세상이라는 말을 바이블처럼 여기며, 오직 현실의 세상만 고집하며 살아왔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페르소나를 원했고, 그 가면을 쓰고 서라도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한 대본을 연기하며 살아왔죠.

그 안에 셀프(self)는 없었습니다. 아니, 있었지만 철저하게 가려져 있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인식을 외적인 자아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페르소나의 억압 속에서 무의식적인 그림자(shadow)를 자처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진정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할 때입니다. 비록 가면을 내 의지로 벗은 것이 아니라 벗김을 당했다는 생각에 여전히 방황하고 있습니다. 가면은 벗었지만, 그동안 드리워진 그림자는 아직 지우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나에게 이토록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던가요?

가면을 써야만 했고, 그 가면의 두께를 늘리려 했던 지난 세월 속에 진정한 나는 있었던가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가면을 빼앗기고 무대에서 쫓겨나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세상의 모습 속에서, 나는 의연하게 일어서야 합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잡다한 생각들을 빗소리에 실어 날려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 세상을 맞이합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을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단 2~3분의 시간밖에 흐르지 않았습니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도 수많은 생각과 질문, 그리고 나만의 세상과의 조우가 가능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우리는 왜 그동안 이런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을까요?

원인을 규명하기보다, 이제라도 그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려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시간을 자주 가져보려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목표를 세우고 도전을 시도하며, 그 과정에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기도 하죠.

중요한 것은 자신이 겪은 경험에 대한 피드백을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몰랐던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단지 실패를 통해 알게 된 이후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중요할 뿐입니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와 성현들이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동안 내가 있었던 곳은 내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쓰고 있던 가면이 진짜 나인 양 연극했던 무대도 이제는 막을 내렸습니다.

타인의 삶에 이끌려 가면을 쓰고 살았던 것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나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을 질타하는 것입니다.

가면 속 무대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나의 무대를 올릴 때입니다. 이를 위한 변화의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대본을 써야 합니다.

현실이라는 그림자가 아직 드리워져 있지만,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너무나 바쁘고, 겁도 나며, 나이도 많고, 쉬고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아간다는 생각에 주저앉을 수도 있습니다. 걷어내야 할 장막들이 겹겹이라 혼돈의 수렁에 빠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듣고 있는 빗소리가, 그리고 눈을 감고 바라본 나의 세상이 나와 함께할 것입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바로 나 자신 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상황과 사건, 문제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에 따라 인생의 주제가 정해지고, 우리는 그 주제를 바탕으로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갑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 앞에 놓인 사건과 문제에 대한 주제는 타인이 아닌, 오직 나 자신이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제에 맞는 그림 또한 스스로 그려 나가야 하죠.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마주한 상황의 본질과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고없이 찾아온 사건에 대해서는 순간적인 판단력을 발휘하여 그에 따른 진행 방향과 주제를 명확히 설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을 이야기할 때 종종 연극이나 한 편의 영화에 비유하곤 합니다. 연극이나 영화에는 명확한 주제와 흥미로운 스토리, 그리고 예측 가능한 결말이 존재하죠.

하지만 우리가 쓰고있는 삶의 각본은 미리 정해지지 않았으며,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 채 불안함을 안고 살아갑니다. 극 속의 주인공은 작가가 정해준 대로 삶을 살아갈 뿐이지만, 우리의 드라마는 제목도, 주제도 없이 진행될 때가 많습니다.

막연하게 나마 꿈꾸는 스토리는 구상하지만, 정작 쓰여지는 이야기는 기대와 다를 때가 많죠. 화려한 수사와 은유로 우리 삶을 포장하고 싶어도, 손에 쥐고 있는 연필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아 고민하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결국 정해진 각본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선택하고 그려 나가는 즉흥 드라마가 바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대본인 것입니다.

해피엔딩을 향해 글을 써 내려가고 싶지만, 현실은 늘 우리를 시험합니다. 때로는 지우고 다시 쓰려 시도하지만, 그 마저도 쉽지 않아 빈 원고지만 긁적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건이나 문제는 늘 어렵습니다. 만약 쉽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건이나 문제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난관은 비단 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시험문제와도 같은 것이죠. 중요한 것은 왜 나에게만 이런 어려움이 닥치는가? 에 주제를 두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자체를 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에 맞춰 소제목과 단락을 구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시련은 왜 나에게만 닥치는 것일까?"라는 질문 대신, "나에게 닥친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핵심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련을 극복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각 소제목이 되어 나의 시련 극복 스토리는 이렇게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난관이나 시련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이해해야 비로소 효과적인 해결 방법을 모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산을 올라야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알려면, 우선 문제 자체를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무작정 이 산 저 산 오르다 보면 해가 저물고 에너지는 방전되기 마련이죠.

조금 늦더라도 올바른 방향을 잡는 것이 우선입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라는 말처럼 말입니다.

오르고자 하는 산이 정해졌다면, 이제 어떻게 산을 오를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합니다.

지름길을 확인하고, 능선의 높낮이를 파악하며, 어떤 코스로 공략할지, 휴게소는 어디에 있는지, 소요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필요한 물품은 무엇인지 등을 꼼꼼히 체크해야 합니다. 그리고 등산화 끈을 질끈 동여매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너무 급하게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꾸준함이 더욱 중요하게 요구되는 등산이니까요.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이 또한 해결 방법이 있을 것이고 나는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인지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웠던 목표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기꺼이 수정하며 새로운 방법을 찾는 용기를 불어넣는 관용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고정관념을 버린다면, 새로운 가능성의 문은 반드시 열릴 것입니다.

시련의 고통은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마음가짐 입니다.

자신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도록 자기암시와 긍정적인 최면을 걸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기적인 마음은 인간의 본능이며, 이성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자기 합리화는 용인될 수 있습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의 구조 속에서 모든 문제를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때로는 무모할 수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함께 이룰 수 있는 것들이 더 많고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려운 사건이나 문제를 만나면 우리는 먼저 회피하려고 부터 시도합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문제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고 해결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 범주안에 있는 사건이나 문제는 사실 사건이나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스스로의 능력을 측정하려 들기보다 아예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우리의 잠재된 능력을 향상시켜 줄 것입니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 이를 대하는 태도와 해결 방법을 찾는 자세에 정해진 규칙이나 방법은 없습니다.

이야기의 주체가 나 자신인 만큼, 그 이야기의 주제와 소제목을 정하는 등의 구성 역시 스스로 해야 합니다.

인생은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며, 예행연습이란 없습니다. 잘못 쓴 이야기라고 해서 줄을 그어 지워버릴 수도 없죠.

오늘 우리가 쓰고 있는 이야기가 단편이 될지, 장편이 될지는 내가 쥐고 있는 연필과 세상이라는 원고지 위에 내 마음을 얼마나 솔직하게 담아내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이야기는 꼭 해피엔딩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치르는 중입니다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나의 이름에 대해 깊이 성찰하지 못했습니다. 타인이 부여한 이름으로 살아왔고, 사회가 정해 놓은 성공의 계단을 오르기 위해 오직 그 길만 달려왔습니다. 이제는 그 과정에서 철저히 내팽개쳐졌던 진짜 나의 이름을 찾아야 겠다는 강한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까지 나는 상무라는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내 본래 이름이 아닌 그 호칭으로 세상에 나를 알리고, 전무나 이사장 같은 더 높은 자리를 향해 발버둥 치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마치 내 삶의 이유라도 되는 듯, 정작 나 자신을 위한 미래를 준비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의도치 않게 사회에서 밀려 나왔지만, 나는 여전히 상무로 불립니다. 비록 이전과는 다른 규모의 조직일지라도, 회사의 모습을 한 곳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또다시 내 진짜 이름은 가려져 버렸습니다.

계급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속에서, 관계 정립을 위해 만들어진 호칭이 나에게서 정체성을 빼앗아 가버린 것입니다.

계급은 수직적인 관계를 만들었고, 그 속에서 나는 창의적인 사고보다는 과거의 방식을 따르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왔습니다.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서류 양식을 대물림 하며, 그것이 정답인 양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려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고, 관계 맺는 사람들도 달라졌습니다. 계급이 깡패라는 속된말을 무기로 꼰대를 자처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흙수저라는 표현처럼, 주어진 환경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한창 시절에는 나의 한계를 초과하는 노력을 하지않아도 연공서열리 안락의자를 보장해 주었던 시기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전쟁세대, 베이비붐 세대, 밀레니엄 세대, X세대, MZ세대를 넘어 이제는 알파세대와 베타세대로까지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다양한 세대가 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며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며, 인간의 의식구조 또한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머물고 있는 X세대의 기준으로 MZ세대나 알파세대를 가르치려 들어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은 이미 틀린 말이 되었습니다. 시대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어,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뒤처지게 됩니다. 분명 가운데에 있었는데 어느새 맨 뒤로 밀려나 있음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경우가 많습니다.

중간이라도 차지하려면 시대의 흐름만큼 움직여야 합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이 시대의 흐름은 노력해도 따라잡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제는 젊은 세대와의 마찰을 줄이고, 그 들로부터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물론 과거의 살아온 경험은 그 배움의 길을 좀 더 쉽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지금 세대가 10을 투자해야 한다면, 기성세대는 8만 투자해도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더욱 농후한 지식과 지혜를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상무라는 호칭의 의미를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 의식에 깊이 박힌 계급 의식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을 젊은 세대들이 더 많이 알고 있음에도, 이를 의식하지 못한 꼰대는 여전히 그들을 가르치려 듭니다.

이제는 이 현실을 직시하고, 오래된 틀을 내려놓으려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짜 나를 찾아야 합니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회에 도움이 되지는 못할지 언정, 폐가 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공동체 속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습니다.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나를 빛내기 위해, 때로는 진짜 나를 잊어버리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최선을 다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밀려나지 않기 위해 주체적인 삶을 기꺼이 헌납했던 것인지에 대한 해답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수직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수없이 많은 현인들과 자기 계발서가 외치지만,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을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물론 나 또한 일부러 계급 사회 속에서 수직적 사고로 살아온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그러나 만약 주체적인 삶을 지향하고 다가올 미래를 계획했더라면, 내 가슴속 어딘가에 이미 뜨거운 열망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지금도 그 열망은 여전히 남아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저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온 삶에 대해 자신의 탓만 하거나, 세상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권력이나 권한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 협력을 통해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하자고 모두가 동의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이를 위한 첫걸음이 바로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지금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부족한 것은 기꺼이 채우며, 남는 것은 기쁘게 나누어 주면서 함께 나아가자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수평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협력을 통해 위대한 업적을 만들어내는 사회와 기업들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구글의 사례처럼 모든 계급을 없애고 애칭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상하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협력자로서 의 관계를 지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뛰어난 성과로 이미 그 효과가 검증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유교적 정서가 깊이 뿌리내린 문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특히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에는 상대방에 대한 호칭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언어는 더욱 제한적이죠.

"야", "너", "당신"과 같은 2인칭 단어는 사용에 많은 제약이 따릅니다. 친한 사이가 아니면 부르기 어렵고, 심지어 다툼이 일어날 때는 최악의 단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존댓말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수평적인 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제한적이라는 아이러니를 안고 있습니다.

영어의 'Hi', 'Hey' 같은 단어에는 나이 구분이 없습니다. 부르거나 불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죠. 어린아이가 할아버지에게도 사용할 수 있고, 이름도 쉽게 부릅니다. '제임스', '피터' 라고 불러도 그 누구도 예의 없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수평적 사고의 핵심은 상호 동등한 위치입니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존중과 배려가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사회적 호칭이라는 가면을 과감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거짓으로 포장된 가짜 자신 또한 내려놓고, 진정한 나 를 찾아야 합니다.

아직도 주변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면 깊은 자각에 빠지곤 합니다. 지금의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매번 다짐하지만, 늘 그때 뿐이고 또다시 숨을 곳을 찾고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그저 대단한 사람인 양 가식을 떨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후회와 반성은 더 나은 삶을 향한 중요한 발판입니다. 하지만 이 마저도 가식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이제는 단순한 자기비판이 아니라 자기성찰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의 '마중물'을 길어 올려야 합니다. 이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내일이 더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대비하기 위한 의지의 다짐인 것입니다.

신은 우리에게 행운을 주기위해 항상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우리가 그 행운을 가질 수 있는지, 혹독하게 시험할 뿐이죠.

나는 지금, 그 시험을 치르는 중입니다.

이제야 지문을 읽고 그 의미를 비로소 파악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정답은 문제 속에 있다는 말을 이제야 진심으로 믿어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 안에 있는 나를 찾아, 솔직한 해답을 찾고자 합니다.

나는 누구이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듣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수금지화목토전해명자(자기자신


자기 자신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정작 그 방법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작정 읽기 시작한 자기 계발서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했지만, 그 책들이 건네는 것은 위로와 격려일 뿐, 명확한 길을 안내해주지 않았습니다.

흔히 해답은 내 안에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은 그 순간의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었습니다.

의지를 다지고 열정을 불살라보겠다 다짐했지만, 매번 현실에 대한 걱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성현들의 이야기가 불변의 진리라고 여기지는 않지만, 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근거를 분석하고 이를 제 삶과 조합하기 위한 노력을 했어야 했습니다.

아직 결과를 기대하기는 이르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멈추지 않으려는 의지만 불태운 채, 오늘도 책이라는 숲 속에서 마음의 오두막을 짓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한 세대의 기간을 18년에서 20년으로 인식하고 블로그에도 그러한 내용을 피력했습니다. 그리고 인공지능(AI)의 한 세대는 6개월이라고도 했구요. 그래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었습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세대를 나누는 근거의 기반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까지 이해 했어야 했음에도 나는 단지 정보를 습득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지식도, 올바른 정보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저 말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논리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 나의 잘못입니다.

그러던 중 한 세대의 구간은 30년으로 본다는 문구를 읽고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18년이든 30년이든, 주관적으로 세대를 나누는 그 기간 자체를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음을 인정하고 바로잡으면 그만이지만 내가 18~20년 이라는 세대 구간을 알고 있었던 것 또한 책을 통해서 였고,그 말을 한 저자의 의견에 근거 없이 동의했다는 사실이 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왜?라는 질문이 필요했고, 단순히 습득을 넘어 진정한 이해를 했어야 했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 부모에게 의지하며 살다가 독립하여 부모의 역할을 계승하는 기간을 30년으로 본다는 설명은, 지금 우리의 삶을 보더라도 매우 설득력 있는 말이었습니다. 이는 법으로 규정해 놓은 기간이 아니라, 부모에게 의지하는 삶에서 부양하는 삶으로 전환되는 기간을 세대라고 부르는 인류 보편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만약 단순하게 이러한 이유로 한 세대를 구분한다면, 과거와 지금의 자식 독립 기간이 달랐다는 점에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20살, 아니 그보다 더 어린 나이에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때는 한 세대의 기간이 20년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결혼 적령기를 30세라고 하고, 앞으로는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한 세대의 정의 구간도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수금지화목토전해명'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의 행성들을 나열한 것으로, 지구가 태양계에서 세 번째 행성임을 잊지 않기 위해 중얼거리며 외웠던 암기 단어입니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공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역시 조선 왕조의 시대순 왕들을 암기하는 문구이지요. 하지만 딱 거기까지 였습니다.

수성과 태양과의 거리가 얼마이고, 크기나 밀도, 구성 성분에 대해서는 우주학자가 아니기에 알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왕들과 그 시대의 흐름을 역사 시간에 배웠지만, 시험 대비용으로 외웠을 뿐 지금의 제 삶에 대한 관심만큼 깊지는 못했습니다.

토성은 태양계에서 여섯 번째 행성입니다. 크기는 지구의 9배 정도이며, 부피는 지구의 760배, 질량은 지구의 95배에 달합니다. 주로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진 가스 행성이어서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토성의 공전 주기는 29.5 지구년이며, 가장 많은 수의 위성을 가지고 있고 지구 탐사선이 아직도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정보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한 세대가 30년이라는 근거를 발견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것에 대한 근거가 맞는지 등을 확인하기 위해 잠깐의 시간을 할애했던 결과였지요.

부모에게 의지하던 삶을 살다가 독립을 앞둔 서른 살 무렵,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의 문을 두드리는 과정에서 겪었던 많은 방황과 고민을 기억할 것입니다.

지금 중년이 된 우리는 또다시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토성이 태양계를 한 바퀴 돌아서 다시 그 자리에 오기까지 30년이 걸리듯, 우리도 그 30년의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28~30살에 토성은 공전을 시작했고, 58~60살에 제자리에 돌아왔으며, 90살에는 또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토성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태양계 행성들이 쉬지 않고 공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삶도 끊임없이 자전해야 합니다.

움직여야 변화한다고 했던 성현들의 이야기가 결코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주의 원리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재시작점에 서 있습니다. 서른 살의 고민과 방황이 제 인생의 마지막 난관이라고 여겼던 방심 때문에, 지금의 나는 재도전의 자리에서 혹독한 시련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30년 후에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 말이지요. 하지만 그때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과, 지금의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토성이 다시 돌아오는 시점과 내 인생의 전환기가 원활하게 공전할 수 있도록 이제는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입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안에서 껍데기를 쪼을 때 어미 닭이 밖에서 함께 껍데기를 쪼아주어, 배가 되는 노력으로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우주의 에너지가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시련이라는 포장으로 다가오는 이 에너지를 자신의 의지와 결합함으로써, 자신의 행성을 태양계 안에 당당히 만들고 미래 세대들이 '수금지화목토전해명자(수금지화목토천해명+자기자신)'의 문구를 암기할 수 있도록 해보는 것, 그것이 제가 지금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간절함. 그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가장 순수한 열망입니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고 가치 있게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성공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오늘도 힘겨운 삶을 헤쳐가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성공을 향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노를 젓고 있지만 몰아치는 파도를 넘어서며 능력 부족을 한탄하고, 빠르게 지나가는 다른 배들을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보다 보면, 정작 나의 속도는 더 느려 지고 있음을 깨닫곤 합니다.

그동안은 허울에 가려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던 세상의 깊이를 비로소 인식하면서부터 성공에 대한 의지를 다잡아 보기도 하지만 지난날의 낡은 습관과 가식의 잔재는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달라붙어 있습니다.

성공하려면 인내와 노력이 필수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기 계발 과정을 수행하며 마음을 정화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설계도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나아지지 않고 자꾸만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입니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노력을 한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 노력이 진정한 노력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질서하고 정리되지 않은 노력은 그저 시간만 흘려 보낼 뿐입니다. 세상의 깊이를 알면 알수록 블랙홀은 자꾸만 새로이 나타나는 듯합니다.

성공적인 목표는 실천 가능하고 구체적이며 명확하게 설정하라는 수많은 조언이 있습니다.

SMART 원칙(구체적, 측정 가능, 실현 가능, 나의 삶과 관련, 시간 제한), MBO 원칙(상위 목표, 개별 목표, 목표 공유, 정기적 검토), WOOP 원칙(소망한 것, 결과 예측, 방해요소 파악, 장애물 제거 계획) 등, 다양한 원칙들이 성공적인 목표 수립을 돕는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자기 계발 서적이나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런 것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런 문구들을 수없이 되뇌 였지만 매번 그때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미래와 성공을 위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그렇게 떠들어댔지만, 정작 나 자신은 아직 명확한 목표조차 세우지 못했습니다.

단지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지금의 힘든 시간을 견디자는 마음이 전부입니다. 힘든 세상이지만, 우리 삶이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도 고민과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이 시간들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깊이 성찰하며 앞날을 위한 비상을 준비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지난 3년여의 시간은 그전에 살아온 수십 년보다 더 큰 의미와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가 없기에 인내의 에너지는 고갈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할 때임을 직감합니다.

간절함. 그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가장 순수한 열망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게 만들고, 꺼져가는 의지를 되살리며, 다시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행동이 달라지고, 관계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며, 삶의 명확한 방향성을 잡아줍니다.

마음속에서 절실하게 우러나오는 소망이 바로 간절함 입니다.

우리는 성공을 바라면서도, 여기에 간절함을 더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간절하지 않아도 세상은 제 게 큰 시련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성현들이나 자기 계발서 에서는 성공을 이야기하지만, 여기에 간절한 마음을 더하라는 이야기는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크게 강조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강조했더라도 내가 간절하지 않았기에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세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일 수도 있습니다.

성공이라는 목표를 세우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함 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토록 간절하게 성공 하고 픈 마음은 없었습니다. 아니 성공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그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현실의 고단함과 세상의 거친 파도를 온몸으로 겪어낸 후 에야 비로소 느끼게 되는 이 간절함이 때로는 너무 매정하기까지 합니다.

많은 경험을 통해 성공의 계단을 만들라고들 하지만, 나는 실패를 반복하기보다는 간절함을 통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전략을 선택 해야 했습니다.

간절함은 절대로 비굴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실하기에 자신을 속여서도 안 됩니다.

철저한 준비를 통한 실행력을 높이고, 그동안의 경험을 활용하며, 의지로 빛나는 눈빛을 발사하며, 흔들림 없는 비전을 펼쳐 보이는 것. 이것이 간절함을 통한 성공의 길입니다.

시간으로만 채워왔던 지난날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로 채워 나가야 할 앞으로의 삶은 불안합니다. 타인의 삶을 좇아가다 주체적인 삶으로 전환 하고 보니 세상은 너무도 냉정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내일 아침 눈을 뜰 것입니다. 오늘 저녁 헬스장에서 열심히 달린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간절한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안 끼던 반지도 다시 끼고, 아직 쓸 만한 지갑도 바꾸며, 뒷주머니에 손수건을 챙겨 넣고 간절한 기도와 함께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비 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오늘 입니다. 여느 날처럼 길가에 차를 세우고 빗소리를 들으며 명상에 잠겨봅니다. 마음속에 쌓여가는 걱정거리들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하지만, 해답은 여전히 저 멀리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차창 너머로, 오밀조밀 모여 있는 인간들의 삶의 터전인 집들이 보입니다. 문득, 어느 집 벽에 붙어있는 문구 하나가 제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처음 보는 문구는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뚜렷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지금 나 또한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일 것입니다. 기도만 하면 모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 다니, 만약 저 문구가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 봅니다.

나는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도라는 단어와 그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고, 때로는 내 방식대로 실천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종교인만의 소유물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감사와 희망, 그리고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염원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삶 속에 늘 동행하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기도를 자신의 힘으로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해결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부탁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기도 하죠.

물론 종교적 관점에서의 기도는 자신이 믿는 신과의 대화이자 교감일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응답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여정 속에서 신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삶의 지침을 찾아가는 고찰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신을 이용하는 주술적인 행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닙니다. 종교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현실을 왜곡하는 이단적인 행위 와도 명백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기대와 기도로 인해 어려운 현실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일까요? 기도는 놀랍게도 심리적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 줍니다. 당장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기도행위 자체를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 힘과 용기를 얻었다는 이들이 많습니다.

신앙인은 아니지만, 나 역시 가끔씩 기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질 때가 있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그만큼 해결해야 할 문제와 걱정거리가 많다는 반증일 겁니다.

기도가 심신의 안정과 평화를 주고, 자기치유를 통해 성장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해준다고 합니다. 삶의 고난 앞에서 기도를 통해 자신의 존재의미와 가치에 눈뜨고, 다시 살아갈 삶의 목적을 되새기게 해준다고도 합니다.

물론 기도가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도를 자기 성찰의 도구로 활용한다면, 그 효용성은 분명히 있습니다. 기도만 하면 모든 걱정이 사라진다는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존재에게 의지하려는 행위로 기도를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자신의 한계를 인식했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한계를 초월해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기도로 나타내는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철학적인 관점일지라도, 기도를 절망적인 순간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삶을 이어가는데 더욱 이로울 것입니다. 단지, 기도가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인지하고 있어야 할 뿐입니다.

"왜 걱정하십니까? 기도할 수 있는데!" 이 문구는 역설적으로 기도할 만큼이나 걱정거리가 많다는 제 상황을 직시하게 했습니다. 나는 기도 뿐만 아니라 걱정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걱정이 단순히 스트레스와 불안만 가중시키는 것은 아닐 것이라 믿습니다.

걱정은 종종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후회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나뉩니다.

흔히 자기 계발서나 현자들은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고,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미 일어난 과거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지금 당장의 문제 해결입니다. 이미 일어난 과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여유조차 없습니다.

나는 걱정을 해결을 위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무책임하게 이미 벌어진 사건이라 치부하고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면, 걱정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걱정한다는 것은 적어도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과도한 걱정은 부정적인 생각을 끊임없이 불러와 스트레스와 불안을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현실을 무너뜨리고 미래 설계조차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 자체를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걱정해야 할 것이 힘에 부친다면, 그 힘을 달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이러한 건강한 걱정은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강력한 에너지가 됩니다.

쓸데없는 걱정은 없지만,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걱정은 있을 수 있습니다.

걱정을 삶에서 떨쳐버리려 애쓰기보다는, 걱정이라는 그림자와 함께 삶을 동행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기도하며 얻은 평온함으로 걱정에 직면하고, 걱정을 통해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에 나서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걱정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과 함께 끊임없이 해답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나는 오늘 희망을 샀습니다


뚜렷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걱정만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지만, 우리 인간의 뇌는 기억 저장고에서 불안한 감정들을 쉽사리 지우지 못하고 불쑥불쑥 끄집어내곤 합니다. 이런 걱정은 현실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을 낳죠.

마음과 행동이 따로 논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물론 걱정은 언제나 우리 삶과 함께합니다. 다만 그것이 눈앞에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이죠.

셰익스피어가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라고 했지만, 사실 약한 자는 나 자신일 수 있습니다.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어봐야 능률이 오르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일찌감치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검색해 두었던 헌책방에 들러 볼 참이었죠. 이젠 과거의 유산처럼 사라져 가는 중고 서점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사실이 반가웠습니다.

새 책을 사서 읽으면 물론 더 좋겠지만, 책값도 아끼고 특히 자기 계발서의 경우 최신 트렌드 뿐 아니라 수천 년 전의 이야기도 담겨있으니, 그동안 중고 서점을 자주 이용해 왔습니다. 어찌 되었건, 헌책방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고, 되도록 많은 책을 고르리라 다짐하며 서점 안으로 들어섰지만,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책 무덤이 저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분야별로 정리되어 있지도 않고, 서점 주인은 알아서 골라보라는 식이더군요. 책장도 없이 바닥에서부터 쌓아 올린 책들 속에서 내가 찾고 싶은 책이 있을리 만무했고, 그저 구경하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집으려 했던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30여 분 동안 먼지 속에서 보물이라도 찾듯이 헤매다, 내가 이미 읽었던 책들을 발견했을 때는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온라인 중고 서점에서 주문하는 것이 훨씬 수고로움을 덜어주겠다는 생각이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죠. 결국 헌책방의 감성을 느껴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오래된 자기 계발서 두 권,'보랏빛 소가 온다'와 '기빙파워' 를 들고 나왔습니다.

아직 해가 넘어가려면 한참 남아서, 자주 애용하는 나만의 한적한 장소에서 책을 읽을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다른 퇴근길로 접어들었고, 익숙한 듯 낯선 풍경에 차를 멈춰 세웠습니다. 도로 한쪽이 차량들로 가득했다가 빠지고, 또 다른 차들이 채워 지기를 반복하는 어느 대박 로또 집 앞을 지나게 된 것입니다.

나의 걱정의 원인은 경제적인 문제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순간 스쳤습니다. 나도 비어 있는 자리에 차를 주차하고 복권 방 안으로 들어섰는데, 헉!

유명 맛집이나 줄 서서 기다린다고 생각했는데, 가게 안에는 길게 줄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사장님이 하품하며 저를 맞아주리라 예상했던 저의 상상은 완전히 빗나갔지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나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죠. 한방을 노리는 마음보다는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클 것입니다.

언젠가 실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복권에 당첨되고 싶다면 우선 복권부터 사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누구에게서 들었거나 책에서 본 이야기였지만, 정작 나는 실제로 복권을 사지는 않았었죠. 복권을 빗대어 삶의 성공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한쪽 벽면에서는 누군가 열심히 분석하며 번호에 색칠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저 순간만큼은 최고의 집중과 몰입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내일 죽는다는 심정으로 오늘을 살라는 말이 있듯이, 그동안 몰입과 집중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지만, 정작 나는 그러지 못했음을 반성해 봅니다. 한 아주머니 뒤에서 줄을 서서 따라가면서 생각했습니다.

'이분은 무슨 이유로 복권을 사러 왔을까?

저 젊은 총각은 이 시간에 직장에 있지 않고 여기서 열심히 로또를 분석하고 있을까?'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철저하게 서민의 얼굴과 모습들이었습니다. 삶에 지쳐 희망을 사러 온 것이죠. 당첨을 바라기는 하지만, 당첨이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복권을 산다는 것은 희망을 산다는 것입니다. 경품 행사에 한 번도 당첨된 적이 없다고 하면서도 고개를 삐죽이 내미는 것은, 결국 희망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 희망을 샀습니다. 두 권의 헌 책을 샀고, 그로 인해 다른 길로 접어들어 복권이라는 또 다른 희망을 산 것입니다.

광활한 미대륙의 벌판을 달리면서 그 웅장함과 그 벌판에서 뛰노는 누런 소떼들을 보며 감탄사를 보내지만, 6시간 동안이나 이어지는 벌판은 감탄을 이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혹시 모를 누런 소들 사이에 보랏빛 소가 있다면, 다시 한번 감탄할 의지가 솟아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보아야 한다는 주제의 '보랏빛 소가 온다',

미국의 국새를 만드는 과정에서 시작되어 피라미드식 사고와 별자리 사고의 실천으로 리더가 혼자서 권력을 휘두르기보다 상호의존과 협력에 의해 더 큰 힘을 발휘하자는 수평적 리더십에 관한 '기빙파워',

그리고 중년의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라고 많은 조언을 담은 '오십의 기술' 등을 펼쳐 읽어가고 있습니다.

세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것은 나의 책 읽기 방법 중 하나입니다. 예전에도 다섯 권까지 읽어본 적이 있죠. 10페이지씩 번갈아 읽어가며 우리의 뇌에 긴장감을 주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헷갈려 하는 것이 우리의 뇌를 발달시키는 방법이라는 거죠. 다만, 그 혼란 속에서도 집중해야 합니다. 끝까지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책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대충 알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나면 뻔한 이야기,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다고 해서 그 안에서 직접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는 않지만, 그동안 나는 그 안에서 방법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는 계기로 삼아야 겠습니다.

오늘 읽었던 몇 줄의 명언들이 나의 희망을 찾아줄 것입니다. 오늘 샀던 복권이 다가오는 토요일까지 희망을 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소비해야 합니다.

소모하는 삶은 희망이 없지만, 소비하는 삶은 희망이 있습니다.

책과 복권으로 나의 에너지는 다시 충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생각 공장을 보살피는 것부터

시작하자.


온전히 혼자 보낸 1박 2일의 시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도 꼬박 열 일곱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날이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로 참 오랜만에 찾아온 온전한 혼자만의 시간이었죠.

물론 과거에도 홀로 있었던 날이 있었겠지만, 굳이 그 당시의 나태함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족들이 각자의 일정을 따라 집을 나서고, 나는 우연히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예전 같았다면 소외감을 느끼거나, 일부러 라도 의미 없는 약속을 잡아 시간을 채웠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혼자만의 시간을 활용해 그동안 미뤄왔던 독서 목록을 정리하고, 출판사에 보낼 원고를 퇴고하며 평소보다 독서 시간을 더 할애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이토록 간사할까요?

온전한 자유를 얻었다는 생각에, 당장 해야 할 일들을 실행하기보다 시간을 좀 더 넉넉하게 쓰고 싶어 졌습니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습관처럼 TV를 켜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죠.

환경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말이 비로소 와닿는 순간이었습니다. 인간은 직간접적인 외부 자극에 반응하고,이는 곧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는 조언이 무색하게도, 나는 아직 그 단계를 완전히 넘어서지 못했음을 인정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롭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때는 외로움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과 대화하고, 마음속에 널브러져 있는 생각들을 정리하는 도구로 외로움을 원했던 것이죠.

하지만 막상 익숙하지 않은 환경을 접하고 보니,그동안 보이지 않게 억눌렸던 것들을 해소하기에 바쁜 내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일상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나 자신을 시간 속에 내팽개치고 있었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해서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소홀했던 내면의 자신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곧 생각이라는 중요한 과업을 달성해야 할 시간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성적이라는 것이며, 그 이성은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것은 생각을 통해 나온 결과를 실천하는 모습이죠.

따라서 좋고 올바른 생각을 해야 바른 행동으로 이어지고, 그런 행동들이 우리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문명의 발달로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좋은 생각을 위해 양질의 정보를 수집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양질의 정보를 분별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넘쳐나는 정보 속에 묻혀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환경은 우리 더러 생각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아니,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게 만들고 있죠.

애써 정보를 수집하려 하지 않아도 이미 제공되는 정보는 차고 넘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이라는 것에 무뎌 지고 있습니다.

타인의 삶 속에서 허둥지둥 일상에 쫓겨 다니다 보면, 문득 나는 누구이며 여기는 어디인가를 찾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그 과정에서 내 안의 생각들이 비집고 나올 공간은 없습니다. 우리는 글자보다는 소리에 익숙해져 있고, 영상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오늘처럼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도 외롭지 않은 것은 소리와 영상이라는 세상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내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잠시 내려놓을 법도 하지만, 불안함에 우리는 문명에 대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애써 생각을 하려 해도, 내가 알고 싶지 않은 불편한 정보까지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각을 멈추게 합니다.

한마디로 너무 생각을 하다 보면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쓸데없는 생각이란 없습니다. 단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을 뿐입니다.

이런 생각들은 예전부터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적인 문제와 부딪히면서 뒤안길로 사라졌던, 어쩌면 내가 지향하고 있는 진정한 가치일지도 모르는 것들입니다.

내 생각이 언제나 독창적이고 생산적이라는 확신이 없어서 생각하기를 주저하기도 합니다.

검증되지 않은 나만의 생각이 현실과의 조화를 이루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생각하기를 피하고, 그저 다른 사람의 생각에 끌려가는 것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생각은 골치 아프다는 편견에 갇힌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생각 없이 즐길 거리가 너무나 많습니다. 즐기다 보면 피곤하고, 피곤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늦잠을 자고 행동반경을 최대한 줄이려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하죠. 당장의 즐거움이 미래의 나를 책임지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뇌의 가동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닫았던 공장을 재가동하기 위한 노력을 생각한다면, 애초에 공장 가동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적자 운영이라 할지라도 현상 유지만 가능하다면 가동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쁜 일상이라 할지라도, 오늘처럼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는 기회는 분명 있습니다. 그 시간이 바로 나의 생각 공장을 가동하는 시간입니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성립하려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많은 노력이 있었다는 전제가 깔려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만들려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삶입니다.

시간이 많아 보이는 우리의 삶이지만, 지나고 나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시간입니다. 후회하는 감정이 시간의 아쉬움을 부추기기 때문이죠. 그렇게 다시 돌아온 미래에서 나는 또 혼자만의 시간을 동경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오늘처럼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겠지만, 그러려면 지금부터 사고의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조금씩, 내 안의 생각 공장을 보살피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더 해빙은 가지고 있음을 충만하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공간적 범위는 어디까지 정의될 수 있을까? 이 근원적인 질문은 해빙(解氷)이라는 화두를 통해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중요한 출발점으로 하고자 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저자와의 대화를 의미하며, 그러기에 책의 제목이 내포하는 의미부터 깊이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목만으로도 내용의 큰 줄기는 짐작할 수 있지만, 전문적이거나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의 경우 잠시 멈춰 사고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거창한 제목에 비해 내용이 평범한 책도 있지만, 우리는 단순히 좋은 것만을 얻기 위해 책을 읽지는 않습니다. 무엇이 약이고 무엇이 독인지를 판단하는 재료로 삼기 위해서도 책은 필요한 존재입니다.

서두에 던졌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범위는 지리적, 수치적인 경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통찰의 영역을 말합니다.

과거부터 끊임없이 들어온 글로벌 시대라는 용어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로 시야를 넓히고, 성공적인 국가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대비라는 이야기는 익숙합니다.

나 역시 대학 진학을 앞두고 중국어과를 고민하기도 했고, 사범대학에 진학해서도 외국어 동아리 활동을 하며 미군 기지가 있는 도시에서 서투른 영어(콩글리시)를 사용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 시절에는 외국인을 만나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외국인을 구경한다는 표현 자체가 오늘날에는 다소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타문화권의 사람들을 접하고 그들의 언어를 듣는 것이 어려웠던 과거를 반영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심지어 그들이 우리말을 배우며 살아가는 시대에 와 있습니다. 그렇다고 외국어 공부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경계는 이미 허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서로 다른 인종과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불편함 없이 어우러져 살아갈 만큼 문화는 더욱 발전했습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중년 세대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이 어우러지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또한 혼합되고 있습니다.

한글과 영어가 혼용된 단어들 속에서 우리가 의미를 해석하고 취해야 할 명확한 기준이 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해빙(海氷)은 바다의 얼음이 녹는 현상을 뜻하며,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는 소식을 은유적으로 전합니다. 단지 바다와 얼음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봄의 기운을 상상하는 것이지요.

반면 영어 단어 having은 가지다 라는 의미에 현재진행형을 붙여, 과거부터 현재까지 무언가를 계속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한글의 가지다는 과거 소유에 대한 의미만 있을 뿐, 현재까지 이어지는 지속성을 명확히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 가지다 라는 용어는 단순히 물건의 소유 뿐만 아니라 경험이나 특정 활동에도 확장되어 사용됩니다.

언어와 해석의 차이에서 오는 문화적 간극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공감함으로써 이러한 차이는 해소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나의 시선이 다소 편향되어 있을 수도 있겠으나, 현재의 세상은 세계를 품어야 하는 세상이라는 본질적인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아직 과거에 머물러 과거의 풍습이 곧 정답이라는 인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수많은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버리지 못한 과거의 모습은 여전히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으니 당신은 그렇게 살지 않았으면 한다는 생각은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의 칠판 위에 우리의 인생을 새기며, 스스로의 삶과 타인을 위한 삶의 과정을 수행했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오늘 새롭게 내 사고의 지평에 들어선 책, 더 해빙(The Having)이 과연 나에게 어떤 새로운 깨달음을 줄지에 대한 의구심이 컸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의심은 종종 자신의 용기 부족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살아온 경험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안정과 평화 속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채워 나가야 할 삶의 마지막 문단입니다. 그 마지막 결론의 문단은 그 누구도 미리 써줄 수 없는 대본이며, 자기 자신이 직접 써야 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끊임없이 응원을 보냅니다.

오늘 내 삶에 새롭게 동승한 더 해빙은 가지고 있음을 충만하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물건이나 돈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기쁨, 감사함, 편안함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우러나온다는 것입니다.이러한 마음가짐이 우리를 부자로 이끈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돈이 많아서 마음이 편안한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해 편안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에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돈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지금 이것을 살 만한 돈을 가지고 있다는 편안한 마음가짐이 중요하며, 이것을 구매함으로써 돈이 부족해지거나 불안해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비록 특정 물건을 당장 구매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 물건을 살 수 있는 돈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행복과 기쁨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돈은 필요할 때 사용되어야 하지만, 낭비하거나 과시하는 데 쓰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돈보다 소중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짧은 인연일지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영원을 기약하기도 합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오랜 경험에서 비롯되며, 자기 계발의 과정에서 만나는 성현들의 가르침은 우리 모두의 삶의 지침서가 되어 끊임없이 우리를 훈계할 것입니다.

삶이 때로는 힘들다고 느껴질지라도, 오늘 만난 동료들의 모습 속에서 또 다른 내일을 꿈꿔봅니다.






마음의 건강검진을 받아보려는 것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아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흔히 몸이 재산이다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부품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수많은 신체 부위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감정들 또한 어우러져 위대한 삶을 이끌어갑니다.

세상의 만물이 제각기 생명력을 지니듯, 우리 인간의 몸 안에는 그 어떤 존재에게서 도 찾아볼 수 없는 마음과 생각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한 가지를 더 챙겨야 합니다. 바로 눈에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마음, 이 둘이 함께 건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충실하느라, 정작 녹슬고 닳아버린 마음을 돌보는 일에는 소홀하기 쉽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고혈압, 고지혈증, 영양제, 오메가, 간장약, 루테인 까지. 약으로 배를 채우고, 저녁이면 헬스장에서 근육 단련에 힘씁니다.

우리 모두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이는 신체의 건강에만 모든 신경을 쏟고 있는 듯합니다. 수많은 건강보조식품과 예방약은 온전히 신체 건강을 위한 것입니다. 마음의 건강을 위한 약도 필요할 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익숙해진 삶을 살고 있으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외적인 치장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건강은 그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홀로 무거운 짐을 지고 가식과 허영 속에서 버텨내며 그것이 옳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힘들다고 호소하는 마음에 오직 인내만을 강요하며,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쓴웃음 지으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중년이 되어 머리가 희끗해 지고 열정이 사그라 들면서, 마음에도 깊은 주름이 새겨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것을 후회해 보지만, 깊어진 마음의 주름은 쉽게 펴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건강이 허약해지니 신체의 건강마저 예전 같지 않습니다. 매일 꾸준히 노력하는 독서와 글쓰기의 효과는 더디기만 하고, 불안과 방황의 바이러스는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전문의를 찾아야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처방전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시간이라는 약과 인내라는 주사,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지나온 삶을 성찰하고, 더 나은 미래를 걱정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함 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해답을 찾고 기도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준비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서울에서 온 팀들과 미팅을 하며 희망을 보았던 순간에도 감사했습니다. 그 기운을 안고 저녁 운동으로 신체건강을 챙길 수 있었음에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평소처럼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보냈지만, 마음이 건강하지 못했던 지난날에는 그 감사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혹시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영양제가 이제야 효과를 발휘하는 것일까요? 마음이 한결 건강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반복되는 익숙함 속에 매몰되어 하루하루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잊고 살았습니다.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회한의 노래는 언제나 애처로울 뿐입니다.

오늘 하루도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지만, 어디에도 뚜렷한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흔적은 보이지 않는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고뇌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챙겨야 할 것은 바로 건강입니다. 외적인 건강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마음의 건강이야 말로 최우선 되어야 합니다.

이제 중년의 나이에 난생처음으로 마음의 건강검진을 받아보려는 것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챙겨 먹는 약들처럼, 마음건강을 위한 영양제 를 하나 더 추가해 보는 건 어떨까요? 밝고 빛나는 얼굴이 피부건강약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쇠약해 지려는 마음을 적극적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감사함 이야말로 당신의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최고의 영양제라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믿음을 보여주고 신뢰를 얻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야 할 기본적인 삶의 도구입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우리 모두는 주저 없이 신뢰라고 답할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상대방과의 관계는 그저 서로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철저히 계산적인 관계로 전락할 테니까요!.

관계 속에는 보이지 않지만, 믿음이라는 본질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 실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관계의 시작은 흔히 상대방에게서 믿음의 조건을 찾아보려는 의심으로 출발합니다.

믿음은 보여주어야 합니다. 믿음을 보여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국 관계의 지속을 통해 얻는 상호 경험에서 진정한 믿음이 나타납니다. 계약적인 관계에서 시작하여 점차 신뢰의 관계로 변모해 가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믿음이란 없습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기존의 믿음 있는 관계를 통해 새로운 관계에 대한 간접적인 검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맺어야 할 건강한 관계를 위해, 지금 관계 맺고 있는 이들과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사로운 약속이나 행동들이 곧 믿음의 단초가 됩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처럼,무의식적인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의 신뢰 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신뢰를 상대방에게 보여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비록 그것이 때로는 가식적일지라도, 필요하다면 그것마저 보여주는 것을 망설이지 않습니다.

믿음을 보여주고 신뢰를 얻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야 할 기본적인 삶의 도구입니다. 그 도구가 튼튼해야만 부서지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번 부서진 신뢰는 좀처럼 회복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자신의 신뢰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관계하고 있는 이들로 부터 신뢰를 얻고 있는지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경제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약속의 개념을 넘어,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믿음의 도구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상대에게 부여했던 믿음과 확신은 아직 변하지 않고 있는지 스스로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믿음에 대해 많은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상대방보다 많이 가지려 하고, 상대의 것을 빼앗으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속으로는 철저히 계산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는 그동안의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학습된 결과입니다.

이기심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조금 양보해 줄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넘치기에 베푸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더라도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지금 우리 사회에는 절실합니다. 하지만 그 선봉에 설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 계발의 과정을 수행하는 것에는 상대방의 보이지 않는 믿음을 발견하는 시야를 확보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외모에서는 믿음이 보이지 않지만, 그 내면의 진실을 볼 수 있는 시야는 자신의 마음의 안경을 닦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나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마치 다초점 안경을 착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상대방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는 다초점 렌즈는 다소 비싸더라도,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걸어갈 수 있게 해 줍니다. 그 비용은 자기 계발의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은 많지만, 타인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눈은 끊임없는 노력의 대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믿음의 돋보기는 스스로 닦아야 합니다.

그동안 관료주의에 길들여져 있던 우리는, 아니 나는 연공서열이나 호봉이 가치 척도라 여기고 보여주기 문화에 빠져 있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외면에 보이는 모습에 쉽게 믿음의 시선을 보내곤 했습니다. 물론 배신을 맛보기도 했지만, 아직도 막연한 자기 암시를 되뇌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음이 가는 사람, 그래서 함께하고 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전과는 다른 세상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신뢰에 대한 의심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는 듯합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저를 위협하고 있는 듯하여, 외로움을 넘어 고립의 느낌마저 받습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안경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안경에 맞는 다초점 렌즈를 고르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헤쳐 나가야 할 길은 아직은 거친 신작로이지만, 신뢰라는 방향을 잡고 곧바로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탄탄한 고속도로를 만날 것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안경의 먼지를 닦으며, 나는 변함없이 믿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마치 한 편의 연극 공연을

기획하고 있는 연출가와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을 흔히 각본 없는 연극이라고 표현합니다. 정해진 각본이 없는 상황 속에서 상대 배우와의 완벽한 호흡을 위해서는 상호 협력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상대에 대한 신뢰와 존경, 그리고 배려가 필수적입니다.

연극은 나 혼자만의 무대로 만들 수 없습니다. 물론 억지로 1인 다 역을 하며 만들 수는 있겠지만, 자신의 역할만으로도 벅찬 세상에 다 역을 해낸다는 것은 지나친 과욕에 불과합니다. 각자 맡은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낼 때, 비로소 마지막 장까지 도달할 수 있고, 연극을 무사히 마치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관계의 건강함을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이고 있습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에서 나 혼자 톱 날을 날카롭게 세운다고 해서 톱질이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의 톱날이 고르게 형성되고 동등한 힘으로 밀고 당길 때 그 효과는 배가 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 맞춰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당겨야 할 때 당기고, 밀어야 할 때 밀어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사회를 살아가는 기본 원칙입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당길 때 나 혼자 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며, 그 과정마다 역할을 수행할 상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구성원 이라 부르고, 이러한 구성원들의 집합을 조직이라 칭합니다. 우리는 그 안에 속해 있는 작은 나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과정의 단계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모두의 역할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어야 만 프로젝트가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그렇기에 구성원 간의 관계는 건강해야 합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한 목소리를 내는 것, 이것이 경영의 제1원칙 입니다. 모든 구성원이 조직의 목표에 부합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직 내 구성원 간의 관계 뿐만 아니라, 조직과 조직 간의 관계 역시 중요합니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단계별 조직 간의 긴밀한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성공이라는 목표 달성은 명확한 목표 설정 단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꾸준한 노력과 자기 계발의 과정을 수행하며 긍정적인 태도와 회복 탄력성을 길러야 합니다. 시간 관리의 효율성을 높이고 현명한 선택을 위한 지혜도 필요합니다.

나아가,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구체적(Specific)이고, 측정 가능(Measurable)하며, 달성 가능(Achievable)하고, 관련성이 있으며(Relevant), 시간 제한(Time-bound)이 있는 SMART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또한, 구체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왜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지, 누구를 위한 목표인지, 어디에서 언제까지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합니다.

이렇듯 성공을 위한 단계는 마치 트리 구조처럼 끝없이 많은 과정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조직이 필요하고, 조직은 구성원이 필요하며, 그 안에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치 한 편의 연극 공연을 기획하고 있는 연출가와 같습니다.

한 편의 연극을 공연하기 위해서는 무대 설치부터 배우 섭외 및 역할 분배, 조명 장치, 홍보 전략, 행정 업무 등 수많은 단계들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또 다른 세부 과정들이 생겨납니다.

트리 구조를 형성하며 끊임없이 생성되는 이 모든 과정들을 혼자서 감당할 수 없기에, 우리는 관계를 통한 상호 협력을 합니다.

배우들이 무대에서 화려한 춤을 추도록 돕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상대방을 빛내 줄 때 내가 빛난다 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죠.

프로젝트 완수를 위한 수많은 과정 중 하나이지만, 얼마전 계약 관계를 맺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들이 마음껏 춤출 수 있도록 화려한 무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다른 과정과의 불안정함 때문에 걱정이 동반되기도 했습니다.

어느 한 과정만 잘 수행했다고 해서 전체 프로젝트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한 과정이라도 멈춰서는 경우가 생긴다면, 이 프로젝트는 결코 완성될 수 없습니다.

삶의 무대를 만들어가고 있는 우리지만, 그 무대는 오직 나 혼자만을 위한 무대가 아닙니다.

관계하고 있는 모든 배우들의 화려한 연기와 조명, 그리고 관객과의 조화가 완벽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오늘의 수고는, 우리 삶의 의미와 가치를 노래하는 뮤지컬의 무대를 만드는 값진 시간입니다.





자신을 먼저 돌본 후, 상황 판단에 따라

분별력을 잃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아침은 늘 세상의 풍경을 분주하게 만듭니다.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도 시원하게 뚫린 도로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가 된 지 오래죠. 모두가 각자의 규칙에 얽매여 같은 시간, 같은 장소로 향하다 보니, 매일 아침은 의도치 않은 경쟁처럼 부산하게 하루의 문을 열게 됩니다.

저마다 먼저 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이 모인 도로 위에서, 혹 사고라도 나면 우리는 사고 상황 자체보다 교통체증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더 원망을 쏟아냅니다.

성현들은 자비와 이타심으로 남을 배려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위하는 길이라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오늘도 지각에 대한 불만만 늘어놓기 바쁩니다.

이 시간쯤 이면 길이 뚫렸으리라 예상하고 평소보다 늦게 집을 나선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고구조는 참 비슷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죠.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니!

어제보다 더 막히는 도로 위에서 "그럼 그렇지, 내 생각이 뭐 거기서 거기지!" 하고 체념하며 가방 속의 책을 꺼냅니다.

신호와 교통체증으로 도로 위에 갇힌 시간이 그저 짜증으로만 길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히려 신호가 길었으면 좋겠고, 교통체증이 있어도 더 좋습니다. 덕분에 책을 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막간을 이용한 지혜라고 해야 할까요?

앞차가 조금 진행해도 상관없습니다. 굳이 애써 따라붙어 신호를 넘어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단 한 줄이라도 더 읽을 수 있기 때문이죠.

다리 위에 서 있으면, 그 출렁거림이 느껴져 좋고, 옆 차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들려 더 좋습니다. 지각에 대한 염려 없이 회사에 나설 수 있는 작은 여유를 누리는 것이죠. 그렇게 조금씩 앞차의 꽁무니를 따라 다리에서 내려올 무렵, 도로 옆 인도에서 한 아저씨가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공사로 인해 인도 폭이 너무나 좁아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공간이었습니다.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사람은 마땅히 인도로 걸어야 하죠. 그 아저씨의 걸음은 제가 타고 있는 차보다도 빨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저씨가 허리를 숙여 길가에 늘어진 작은 나뭇가지를 잡았습니다. "저러면 안 되는데, 저 나무는 국유재산이라 함부로 꺾어서는 안 되는데!" 하는 걱정도 잠시, 나뭇가지를 꺾는 것이 아니라 젖히고 있었습니다.

좁은 인도까지 침범한 나뭇가지가 길을 막고 있어서, 그 나뭇가지를 길가 쪽으로 비틀어 치우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자신만 그 나무를 넘어 지나가면 그만인 것을, 뒤따라올 사람들을 위해 길을 만들고 있는 그 아저씨를 보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위한 행동임을 알기라도 한 듯, 손바닥을 탈탈 털며 유유히 걸어가는 아저씨의 모습이 나에게는 유독 빛나 보였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이와 같은 모습을 분명 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애초에 보려 하지 않았거나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고 말하겠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 말한 성현들의 말씀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고명환 작가이자 강사이자 메밀국수 사장님 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로운 음식을 연구하다가 메밀을 떠올렸고, 그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음식을 만들어 성공적인 CEO가 되었습니다.

인간관계든 사업이든, 삶을 경영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눈앞의 결과와 보상만을 좇는 오늘날의 우리들이 깊이 반성하고 성찰하며 수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체적이지 못하고 타인의 삶을 살아가곤 하죠. 이런 삶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마음을 챙기기란 너무나 벅차다고 토로합니다.

기존의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변화의 목적도, 방법도 모른 채 그저 핑계만 찾기 일쑤입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삶은 내가 지향하는 대로 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마땅하지만, 현실과 안일하게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날 현대인들은 너무나 바쁩니다.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죠. 무엇 때문에 바쁜지, 이 일이 꼭 내가 해야 하는 일인지 깊이 생각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바쁘니 나도 바쁜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다 평일 낮에 집에 머물기라도 하면, 왠지 모를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곤 합니다. 지금 세상은 그렇게 돌아갑니다. 한가해도 바쁜 척해야 하고, 갈 곳이 없어도 어디든 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돌아올 때 함께 합류해야 한다고 단정 짓죠. 그러니 자비나 이타심이 생겨나기란 만무합니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추락하는 비행기 안에서 산소마스크가 하나밖에 없다면, 부모가 먼저 써야 할까, 아니면 아들에게 씌워주어야 할까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아마 대부분은 아이에게 씌워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 또한 순간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챙기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작용한 것이죠. 하지만 정답 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책에서는 부모가 먼저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생각의 깊이를 한 걸음만 더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먼저 돌본 후, 상황 판단에 따라 분별력을 잃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자식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워준 것만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한 것은 아닙니다. 부모가 정신을 차리고 자식을 돌보아야 하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신의 상황이 바쁘고 정신없이 세상에 끌려 다니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며, 변화하고자 하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존재가 명확할 때 비로소 세상이 제대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며 안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많은 성현들이 말했습니다. 우리 삶의 최종 목적은 행복한 삶이라고요. 그리고 그 행복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옆에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항상 함께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도 열심히 살았지만, 그저 월급날을 하루 당겼다는 것 이외에 느낄 감정의 수도꼭지를 돌려야 합니다.

샘솟는 기쁨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옆에서 바라봐 주길 원하는 소박한 행복들을 챙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때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었고,

지금도 사람이 사는 세상 이라는 변치 않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간만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속을 살아가는 인류 또한 세대교체를 거듭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흘러왔고, 우리는 선대의 지혜와 삶의 바통을 이어받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삶의 형태는 시대와 함께 변화하지만,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추구와 열망만큼은 시대를 초월하여 변치 않는 듯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삶의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고 행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그 실현을 위한 고뇌의 과정을 기꺼이 감수합니다.

지금, 우리는 각자의 오늘을 살아가며 이 삶을 더욱 가치 있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고뇌와 깊은 사색에 잠겨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위로를 얻고, 글을 쓰며 새로운 열망을 담아냅니다. 그리고 때로는 시대를 뛰어넘어 사고의 선구자들과 대화를 나눕니다.

특히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서는 진정한 자아를 찾아 깊은 사색의 우물을 파 내려가는 경험을 합니다.

현재를 살아갈 지혜로운 기술이 어디엔가 있으리라 기대하며 삶의 여러 갈래를 헤매기도 합니다.

때로는 나의 삶보다 앞서 경험한 이들이 전하는 자기 계발서 등의 가르침 속에서 올바른 길을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지금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금 시대에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그 방법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현재 내가 읽고 있는 책은 십여 년 전에 출간된 자기 계발서 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의 상당수는 세대의 구간을 넘어선 먼 과거에 쓰인 것들이며, 외국의 고전도 상당수를 차지합니다.

놀랍게도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수천 년 전의 생각들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 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삶과 행복, 그리고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통찰한 이야기들은 그때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었고, 지금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는 변치 않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삶의 정체성과 사고에 대한 이야기들은 필연적으로 철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시대처럼 외부 환경이 번잡하지 않아 사고의 깊이가 더욱 깊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어록과 사상들은 세대를 넘어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지표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들의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하려 애쓰는 듯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에게 가르침을 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를 배우며 그 정의를 새롭게 하거나 확장 시켰던 과정을 우리는 책을 통해 읽습니다.

그 시대 사고의 확장은 공리주의나 계몽주의와 같은 위대한 사상을 만들었고,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학파와 같은 학문적 결합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고뇌했고, 현재의 삶과 영생에 관한 사고의 문도 열었습니다.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수천 년 전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며 인용하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고전 인문학이나 철학이라는 이름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인 면에서 우리와 같은 인류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질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경험과 감정을 공유합니다. 희로애락애오욕 (喜怒哀樂愛惡欲)과 같은 기본적인 감정들은 수천 년 전의 사람들도 분명 느꼈던 감정들입니다.

우리 역사를 돌이켜보면, 모든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탐구하였고, 정의를 추구하며 행복을 염원했고,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본질적인 욕구와 내면의 질문들은 기술이 발전하고 세상이 변한다고 해서 그 본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수백 년 전의 젊은이들도 사랑 때문에 괴로워했을 것이고, 사랑 때문에 헌신했을 것입니다. 불의에 맞서 싸웠을 것이며, 삶의 무상함에 빠져 회심곡을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인생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본질적인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했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바로 지금 내가 자주 나에게 던지는 질문들입니다. 그때도 답을 찾을 수 없었지만, 저 또한 아직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인물들이 끊임없이 해답을 찾기 위한 연구와 가르침으로 본질적 존재를 탐구하는 근간을 이루었습니다.

동양에서는 공자, 맹자, 노자 등이 삶의 지표를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펼쳤던 사유의 과정과 깨달음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알게 되는 것은, 이러한 과정과 학습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과거가 되지만, 우리는 과거에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과거의 지혜와 경험이 담긴 책들은 단순히 시대가 지나간 옛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영원한 기록이자 과거와의 진정한 대화입니다.

이는 성장에 대한 지속성을 부여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중요한 방법이 됩니다.

오래된 이야기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거의 거울을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비춰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고의 샘물은 인간 정신의 위대한 유산으로서 다음 세대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인공지능(AI)이 인격을 갖추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고'만큼은 그 누구도 모방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자신의 사고영역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 자신에 대한 명확한 인지가 필요한 것이며, 나의 삶을 올곧게 걸어가기 위함 입니다. 오늘 나는 수천 년 전의 사람과 대화를 나눈 것입니다.





오늘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입니다


나의 오른 정강이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어린 시절, 낫으로 나무를 베다가 한 손으로 나무를 잡고 다른 손으로 낫질을 해야 하는데, 성급히 낫질을 한 탓에 나무가 굽어지면서 그대로 내 무릎으로 달려들었던 것이죠. 그때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어떻게 그 고통을 이겨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몸 이곳저곳에는 작은 상처의 흔적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물리적인 상처들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잊고 지냈고, 어느 날 문득 눈에 띄어도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야기하려는 상처는 비단 눈에 보이는 외적인 상처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가 마주해야 했던 마음의 상처들,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과정을 거쳐왔는지 되짚어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고, 앞으로의 삶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사유의 문을 열어보려 합니다.

의사는 우리의 신체적인 상처를 치료하여 건강한 생명을 지켜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상처에 대해 무감각 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도 존재하며, 이 상처는 아무리 훌륭한 의사라 할지라도 치료해 줄 수 없습니다.

나 또한 의사가 아니기에 다른 사람을 직접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의사 면허가 없기도 하거니와,나 자신의 상처를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버거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도록 노력하자.

그렇게 상처에 새살이 돋아날 수 있도록 잠시만 시간을 주자.”

우연히 유튜브를 통해 접한 어느 오래된 드라마의 대사 한 구절이 나의 사고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만, 조금만 여유를 갖고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살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비록 의사 면허는 없어서 외적인 질병을 진료할 수는 없지만,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면허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깨달음이었죠.

이 대사를 접하면서 저는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나 역시 내 상처로 아파하고 괴로워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상처까지 보듬을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결국 나의 상처는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스스로 고통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잘해보고자 노력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세상 앞에서 상처받고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 역시 세상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안고 절망에 빠진 이에게 지금 겪는 상처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어보라며 위로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수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면서도 그저 묵묵히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내라는 단어는 희망이 보일 때 비로소 그 힘을 발휘합니다. 보이지 않더라도 저 산만 넘으면 희망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 비로소 인내할 수 있고, 그 희망이 현실이 될 때 인내의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산을 넘으며 깨지고 긁힌 상처는 흉터로 남게 되고, 우리는 그 상처를 영광이나 소중한 경험으로 포장하며 마음속에서 지워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상처는 잊으려 한다고, 지우려 한다고 해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상처 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고, 더 큰 상처를 피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다른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는 귀한 처방전으로, 나아가 면허를 얻기 위한 소중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각박하다고 말하는 세상이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그런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상처에는 완치란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전염성 또한 없습니다. 그리고 그 치유를 위한 처방전에는 유효기간도 없습니다. 상처는 상처로 치료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학 서적에도 나오지 않는 최고의 명약은, 바로 같은 상처를 안고 있는 상대방입니다. 우리 서로가 서로에게 최고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함께 실험해 보면 어떨까요?

병은 널리 알려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병을 경험한 사람들이 서로의 경험을 나누어 더 좋은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는 말은 때로 매우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치료법을 찾을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나을 수 없음을 직감하고 포기해 버리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체면이라는 것을 목숨처럼 여기는 문화 속에서, 자신의 병들고 초라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려왔죠. 두렵고 힘들어도 상대방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망설입니다.

참을 인(忍)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상대방과의 불화를 더 크게 만들지 말자는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마저도 자신의 체면을 지키는 데 사용하곤 합니다.

화병(火病)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만 있다고 하는 것도, 참는 것이 미덕이라는 말을 진리로 여기고 살아온 결과물일 것입니다.

하지만 무조건이라는 단어는 현대사회에는 부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세상은 원인과 결과가 있고 과정을 거쳐야만 도출되는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세상도, 지금의 세상도, 앞으로의 세상도 그럴 것입니다.

자신의 상황과 환경에 따라 조건도 달라져야 합니다. 과정을 수행하는 방법은 결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이미 만들어진 길 위를 걸어가는 것은 안전하고 쉽지만, 때로는 그만큼 많은 것을 참아야 합니다. 이미 정해진 조건에 따라야 하므로 인내해야 하죠.

하지만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간다면, 불안함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굳이 참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상처를 입겠지만, 그 상처를 치유해 줄 관계들이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입니다. 상처를 안고 있지만, 나의 상처가 상대방을 치유해 주고, 그의 상처가 나의 처방전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상처에 새살이 돋아날 것이고, 그때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시간을 내어주면 됩니다.









보이는 것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루해가 넘어가고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 퇴근 시간, 나는 한쪽에 차를 세우고 조용히 눈을 감아 생각에 잠겨 봅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사무실을 나왔지만, 집에 들어가는 시간을 맞추고 싶어서 였습니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반복되는 패턴으로 살아가기에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도 그에 대한 해명을 해야 합니다.

순간적인 감정의 조율에 따라 움직였을 뿐인데 도, 이유가 존재해야 한다는 현실이 나를 이 자리에 세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적한 공간에서 바라본 하늘은 잿빛이었지만, 구름이 만들어낸 조화는 저의 마음을 안정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과연 얼마 만에 올려다보는 하늘인지, 우리는 자신을 잊고 살아가는 날이 참 많습니다.

자연스럽게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원하는 사진이 찍혔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는 작은 인사이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발견이란 이전에 없던 것을 새롭게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곳에 있었지만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에, 분명 그 자리에 있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저 하늘빛이 예뻐서 사진을 찍었고, 그 하늘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았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진을 확대해 보니,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점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비행기였습니다.

나는 비행기를 보려고 하늘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보며 그저 마음의 위안을 삼았을 뿐인데, 그런 하늘 위에서도 어디론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찾아 날아가고 있는 비행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그 구름을 움직이는 바람만 생각하고 그것만 바라봅니다. 그 구름 뒤에 숨겨진 수많은 별들과 구름 속을 나는 비행기의 모습은 보지 못합니다.

태양이 너무 밝기 때문에 별빛이 묻혀버렸고, 하늘이 너무 넓기 때문에 비행기가 작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고 현실에만 얽매여 살아갑니다. 낮에도 별을 찾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태양이 있기에 우리의 생명은 자랄 수 있고, 태양이 있기에 우주의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태양이 있기에 별빛을 볼 수 없고, 태양이 있기에 비를 맞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우주의 이치이며,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온전히 볼 수 있는 시야를 확보해야 합니다.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태양에 대한 일방적인 시선보다는, 때로는 과감히 태양의 밝음을 무시하고 새로운 별을 찾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특징만 부각하면 다른 것을 보지 못합니다. 내 안에서 무수히 빛나고 있는 별들이 태양이라는 현실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우치고, 사고의 깊이를 한 뼘만 더 깊이 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의 이로운 점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태양이 별빛을 가려버린다고 투정합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만일 태양이 없어진다고 상상해 봅시다. 아무리 밤에 빛나는 별빛이 아름답다고 해도, 춥고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생명체로서 상상도 하기 싫은 모습입니다.

어떤 것이 사라지기 전에는 그 가치를 모릅니다. 너무나 익숙해서 그 소중함을 망각하듯, 사라지고 나서야 후회하는 우리의 모습을 이제는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물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을 완전히 없애 버릴 수도 없습니다. 단지 양면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그 조화를 위한 지혜가 필요할 뿐입니다.

오늘도 저 떠오른 태양은, 별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산등성이 뒤로 서서히 물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싫어 비행기를 타고 태양을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내일 아침이 올 때까지 마음의 눈으로 내 안의 별을 찾아볼 것인지,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뇌 속의 기억 장치는 세월이 흐를수록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기억 저장고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곳에 저장된 정보를 적시에 꺼내 오는 운송 장치가 원활하지 않은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지만, 필요한 정보를 저장하고 적절한 순간에 다시 활용하는 능력은 분명 우리에게 있지요. 다만 그 활용 방식에 있어 각자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며, 그 노력의 방향성 또한 중요합니다. 이러한 통찰이 바로 우리가 자기 성찰과 계발의 과정을 쉼 없이 이어가는 이유가 아닐까 합니다.

오늘도 마음의 여유를 부릴 틈 없이 시간에 쫓기듯 바쁘게 보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헬스장에 다녀와 샤워를 끝내고, 하루를 마감하기 위해 노트북을 펼칩니다. 비록 루틴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여전히 깊은 의지를 필요로 하는 과정이지요.

분명 직전까지도 오늘 마감할 글의 주제를 떠올렸는데, 막상 책상에 앉으니 생각나지 않아 순간 당황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이처럼 불현듯 찾아오는 건망증 현상에 대해 글로 풀어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음번에는 이 건망증을 주제로 포스팅을 해보고 싶네요.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기에 건강한 관계 유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때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데 동의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관계 속에서, 내 삶에 진정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는 사람이나 요소들과는 친밀하게 지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적절히 멀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는 결국 우리 삶의 마찰을 줄이는 현명한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순간들은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때때로 오늘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쏟아 노력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인터넷과 가까워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유익한 현상입니다. 세상에는 관계해야 할 수많은 존재가 있지만, 휴대폰만큼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친밀하게 지내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휴대폰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것입니다. 휴대폰만 있다면 다른 사람이 없어도 될 정도로 우리는 깊이 몰두하고 있지요.

물론 휴대폰이 가져다 주는 이점은 분명 많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 또한 존재합니다. 사람들 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단절시키고 고립을 유도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사고 체계가 무너지는 데 휴대폰이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있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휴대폰에서 정보를 얻음으로써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막아줍니다.

무엇이 정답이고 무엇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휴대폰에 '구속'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삶을 빛내주는 유용한 도구로서 현명하게 활용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휴대폰을 통해 다양한 통찰을 얻곤 합니다.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몰카 영상이나 먹방, 코미디를 보며 시간을 허비하곤 했습니다. "이러지 말아야지, 조금만!"하고 다짐해도 어느새 두세 시간이 지나가 버리기 일쑤였지요. 공부하거나 책을 읽을 때는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 같더니, 유튜브 시청은 왜 이리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일까요?

그러다 오늘, 먹방 영상을 보던 중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맛집으로 소문나서 긴 줄을 서야 맛볼 수 있다는 식당이었습니다.

음식을 직접 먹어보지 않아서 맛은 모르겠지만, 영상 속 식당의 분위기는 오래된 건물에 주방은 다소 비위생적으로 비쳤습니다.

수십 년을 운영한 가게라는 것은 알겠지만, 현실적인 생각으로 본다면 분명 돈을 많이 벌었을 텐데, 왜 저런 모습으로 장사를 계속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현대적이고 위생적인 맛집들도 많지만 말입니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감히 나의 생각을 덧붙이자면, 그런 곳들은 고객들이 원하는 맛과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돈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에 역점을 두고, 단순히 장사라기 보다는 분위기를 파는 곳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시설 리모델링에 드는 비용과 운영상의 문제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야 현대식으로 바꾸고 싶지만, 가게를 늘리고 직원을 고용하면 그만큼 더 많은 비용 문제가 발생하니까요. 그러고는 감성과 분위기를 바꾸고 싶지 않다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고요.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장사가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남는 돈은 생각보다 적을 수 있습니다. 유명세에 걸맞은 맛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발생하는 비용이 많아 큰 이익을 남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겉으로 보는 사람의 시선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이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실제로 영상에서는 연 매출 20억, 30억이라며 마치 큰돈을 버는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하지만 매출 대비 지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사장님도 박리다매로 조금 남긴다고만 이야기하곤 하지요.

사실 많은 매출을 올리려면 그만큼 많은 지출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매출만 보면서 부러움의 시선을 보냅니다. 지출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항상 부족하고 현실에 허덕이고 있는 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은 마냥 행복하고 성공 가도를 걷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하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 또한 나를 보면서 나와 같은 토로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겉모습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세속에 찌들어버린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스스로를 속이기 위한 분장술만 익히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은 반성해야 합니다.

짙은 화장으로 만들어진 모습이 아니라, 쌩얼을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근깨를 가린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과거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자꾸만 뒤처지는 것 같아 세상에서 밀려나는 듯한 감정으로 스스로 움츠러들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젊은 시절의 화려함을 중년의 나이에도 그대로 유지하려 하는 것은 어쩌면 과한 욕심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성숙함으로 인생 후반을 맞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건버섯이 피어나고 주름이 깊어지는 겉모습은 결코 초라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삶의 소중한 훈장입니다.

굳이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그 가치를 알아봐 주는, 그런 우리가 되기 위한 걸음을 오늘부터 시작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세상의 진실은 각자의 기준으로 정립해야 한다.


2015년에 유엔(UN)이 인류의 평균수명과 건강상태 변화를 반영하여 새로운 연령 기준을 제안했다는 소식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0~17세는 미성년자, 18~65세는 청년, 66~79세는 중년, 80~89세는 노년, 100세 이상을 장수 노인으로 구분했다는 내용이었죠.

그러나 이 정보는 공식적인 자료가 아닌 것으로 밝혀 졌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수많은 매체와 강연에서 마치 사실인 양 광범위하게 확산되며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곤 합니다. 물론 인류의 생애주기를 구분하는 것은 나름의 의미를 지니지만, 그 기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점에 깊이 공감합니다.

다양한 학계에서는 특정 목적에 따라 인간의 나이를 분류합니다. 미성년자에 청소년 범위를 추가하거나, 생산가능인구, 고령인구 등으로 나누는 것 등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나 통계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읽었던 기억이 있는 이 내용을 책에서 다시 마주했을 때, 정확한 정보 확인의 필요성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동안 나는 유엔에서 발표한 자료가 공식자료인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정보 접근성이 매우 높다는 이점이 있지만, 동시에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필요한 것을 선별하고, 진위를 판별하는 능력이 필수가 된 시대입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접어들며, 우리 각자 AI 친구 하나쯤은 곁에 두고 있을 것입니다. 나 역시 책에서 언급된 UN의 생애주기 구분에 대해 여러 AI에게 물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AI는 친절한 부연 설명과 함께 그 내용을 전달했지만, 다른 AI는 사실이 아닌 가짜뉴스 라고 단호하게 답해 주더군요. 이처럼 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가 흔하며, 심지어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도 상반된 내용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생애주기 구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지만, 65세까지 청년이라는 부분에서 미묘한 혼란을 느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강력히 동의하며 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중년이라는 나이에 꼭 특정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삶의 패턴을 분석하여 학자들이 부여한 하나의 구간일 뿐이죠. 우리는 이를 맹신하기보다는 참고 자료로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심리학계에서는 40대부터 중년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평균 수명이 80세라고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40대는 스스로를 청년이라 여기고, 자신을 중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50대조차 자신을 중년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드물며, 50대 후반이나 60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년임을 인정하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나이에 따른 역할을 중시하며 살아온 우리나라의 문화, 특히 유교주의 속에서 자란 현 중년 세대는 젊은 세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때로는 스스로 꼰대임을 자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시선에 갇히기보다는, 중년의 시기를 어떻게 가치있게 채워 나갈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련된 서적을 읽고 명상의 시간을 가지며,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 타인들의 지혜를 통해 용기를 얻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 만. 주. 인. 공.'의 삶을 지향하라는 메시지를 만났습니다.

나가서 세상과 만나고, 늘 주인공이라는 생각으로 밝게 웃으며 먼저 인사하고, 배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삶.

어쩌면 식상하게 들릴 수 있는 입바른 소리일지라도, 이는 분명 틀리지 않은 가르침이며 충분히 실천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65세까지가 청년이라는 말에는 현실적인 공감과 동시에, 어딘가 모를 부정이 함께하는 복합적인 감정이었습니다.

이처럼 정보를 검증하는 과정은 내게 또 다른 인사이트를 안겨주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믿어왔던 많은 정보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 말입니다.

과거에는 책에 담긴 내용은 모두 진실이라 여겼지만, 오늘 마주한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저자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독자 스스로 정보에 대한 검증을 통해 진실을 확인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저자가 내용을 모르고 서술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표현의 원활한 흐름을 위한 구성적 요소일 수도 있겠죠.

결국 세상의 진실은 각자의 기준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세상이 옳다고 하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검증과 경험을 통한 확고한 입증 자료를 갖추는 것이 선행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글쓰기에서 서론, 본론, 결론의 원칙이 중요하지만, 꼭 그 원칙을 따라야 만 의미가 전달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중구난방인 듯 보여도 그 안에 담긴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만 명확하다면 충분합니다.

중년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과 정보 검증의 이야기가 교차된 오늘 글 속에서, 내가 전하고자 하는 깊은 뜻이 잘 전달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글이 또 다른 글을 낳듯이, 우리 삶 속에는 또 다른 삶이 끊임없이 피어나고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도 멋진 하루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봉이 김선달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책을 읽는 데 나이에 맞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문 서적이나 시, 소설, 자기 계발서, 경제 관련 서적 등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책들은 저마다 읽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유치하여 어린이나 읽어야 할 것 같아 쳐다 보지도 않는 책들도 있습니다. 글씨가 크고 그림이 많다고 해서 유익하지 않은 책은 아닙니다.

오래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전집으로 구입했던 세계 고전 명작을 십 수 년이 지난 지금 제가 직접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얻은 인사이트로 날마다 포스팅을 하고, 그 글을 모아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만약 원작 그대로 읽었다면 몇 권 읽지도 못했을 것이고, 깊은 감명도 받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가볍게 읽기 시작했지만, 거기에 나의 생각을 더하니 결코 가볍지 않았고,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아 전체적인 흐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엮어져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렇게 50여 권을 읽다가 자기 계발 서적으로 돌아와 열심히 밑줄을 긋고 있지만, 아직 더 많은 수련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딱딱하지는 않지만 결코 가볍지도 않아 진도가 늦게 나가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어느 책에서 닥친 현실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고 생각된다면, 한발 물러서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창의적인 생산을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구절을 보았습니다.

이에 가벼우면서도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책을 찾던 중, 어떤 작가가 읽었다는 『봉이 김선달』 을 주문했습니다.

집중까지는 아니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단숨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집중해서 읽었던 책보다 더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한 발 물러서서 마음을 내려놓으니, 이전에는 몰랐던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된 것입니다.

봉이 김선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이야기도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 였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의문을 갖지도 않았습니다.

우연히 읽게 된 이 책을 통해, 봉이 김선달 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그가 행했던 많은 지혜로운 행동들이 어떤 의미로 해석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을 알았다고 해서 곧바로 지식이 엄청나게 성장하고 삶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몰랐던 사실을 알았을 때의 희열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사실 이 책에 나오는 김선달이 허구인물인지 실존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해학과 풍자로 꾸며진 유머러스 한 내용이지만, 그 속에는 약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장사치, 그리고 부정을 일삼는 이들에게 지혜를 발휘하여 망신을 주고 버릇을 고쳐준다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유머도 해학도 아닌, 그 당시 서민들 사이에서 읽히며 고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 이야기 속에 저의 생각을 입혀봅니다.

과거 시험만 보면 매번 낙방하지만, 자신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험관이 사람을 몰라본다며 한가로이 세월을 보내던 김서방. 그는 벼슬을 공부가 아닌 재치로 따내는 기술을 부립니다.

전염성 열병에 걸린 듯한 모습으로 시험관 앞에 나타나니, 시험관은 자신에게 병이 옮을까 봐 일단 합격을 내립니다. 물론 이것은 김서방 이 꾀를 부린 것입니다.

그렇게 초시에 합격하고 돌아가는 길에, 관직을 돈 받고 파는 영감에게 산삼 먹은 꿩을 선물하고, 산삼을 찾으러 금강산에 가야 한다며 선달이라는 벼슬까지 얻게 됩니다.

여기서 초시는 벼슬을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의 1차 관문을 통과한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리고 '선달'이라는 말은 벼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아직 발령을 받지 못한 상태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비록 정식 관리는 아니지만 급제에 합격한 사람이라며, 명예로운 신분으로 자유롭게 생활하는 사람, 즉 한량 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렇게 김선달은 한량으로 살아가면서도 오지랖이 넓어 동네에서 일어난 일들에 앞장섭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장 구경을 하다가 다른 고장에서 온 닭장수가 싼값에 사 온 닭을 비싸게 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욕심 많은 닭장수를 골탕 먹일 심산으로 김선달 은 수탉을 가리키며 "저건 무슨 새냐?"고 묻습니다.

닭을 보고 새라고 하는 김선달을 어딘가 모자라다고 생각한 닭장수는 "그것은 아무나 살 수 없는 봉(鳳)"이라며 닭 값의 다섯 배나 비싸다고 핀잔을 줍니다. 이에 김선달은 "봉이라면 봉황이 있어야 하는 법, 다음 장날에 황도 같이 가져오라"면서 봉 이라는 닭을 비싼 값에 구입합니다. 닭장수는 '제대로 봉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선달은 시장에서 산 수탉을 가지고 고을 사또에게 "귀한 봉을 선물로 바치겠다"고 하자, 사또는 자신을 능멸한다며 김선달에게 곤장을 칩니다.

억울한 김선달은 "닭 장수 말만 믿고 봉인 줄 알았으며, 진심으로 귀한 봉을 사또에게 선물하려 했다"고 하소연합니다.

김선달의 진심을 알아준 사또는 '착한 사람을 속인 닭장수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자 닭장수는 김선달을 찾아와 잘못을 빌고, 닭 값에 곤장 값까지 톡톡히 더하여 돌려받게 됩니다.

이 소문은 온 동네에 삽시간에 번졌고, 이때부터 사람들은 김선달에게 봉 이라는 별명을 붙여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봉이 김선달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름이 된 것입니다.

이 밖에도 악덕 고리대금업자 봉사들을 골탕먹인 이야기, 화장실 사용료를 두 배로 돌려받은 이야기, 아들의 실수로 귀한 벼루를 깬 이야기, 오시오, 자시오, 가시오, 이야기 등 여러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봉이 김선달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꾀가 많다는 것이죠.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역이용할 줄 압니다.

상대방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이를 활용하며, 순간적인 재치를 발휘하고 위기의 순간에도 현명한 판단을 내립니다.

다소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이러한 봉이 김선달의 지혜와 꾀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괴로운 현실만 토로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봉이 김선달 처럼 한량으로 살아볼 상상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은유는 감성의 언어라고도 합니다


철학 서적은 역시 난이도가 높은 책입니다. 철학자들이 직설적인 언어 대신 은유와 비유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지 다른 이들과의 차별화를 위해서 라기보다는, 분명 심오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나 역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이러한 은유적 표현을 자주 사용하려 노력합니다. 특별한 당위성이 있어서 라기 보다는, 같은 말이라도 은유적인 표현이 좀 더 멋있게 느껴진다는 이유가 전부였지요.

"내 창문 밑에 핀 장미는 예전의 장미나 더 좋은 장미를 언급하지 않는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이 문구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장미를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창문 밑에 피어난 지금 이 순간의 장미는 오직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재할 뿐, 다른 무엇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거 씨앗을 깨고 나와 꽃을 피우던 시절의 영광에 도취되거나, 앞으로 더 예쁘고 화려한 꽃을 피우기 위한 술수나 몸부림치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늘진 창문 밑에 서 있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예전의 장미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말은 과거의 영광이나 후회에 얽매이지 않고, 지난날의 자신과 비교하며 현재의 가치를 폄하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더 좋은 장미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말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다른 곳에 피어 있는 더 아름다울지도 모르는 장미와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거나 불안해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장미는 자신이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외부의 기준이나 이상적인 장미의 모습에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장미는 각자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피어나는 독립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비교 의식 자체가 없기에 자신을 타인보다 낫다거나 못하다고 판단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 역시 남들의 삶, 남들의 성공,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애쓰다 보면, 정작 자신의 고유한 색깔과 가치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지금껏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타인과의 비교를 멈추고, 자신만의 길을 걸으면서 자신만의 꽃을 피워내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며, 다른 어떤 존재의 승인이나 인정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장미는 그저 장미로서 존재할 뿐, 다른 무엇이 되려 하거나 다른 무엇으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확인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외부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문구에서 장미가 가리키고 있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는 오직 현재의 자신 으로서 온전히 존재하고,그 자체로 완벽함을 인정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의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고, 지금의 자신에게 집중하여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자기신뢰』 중 한 문장을 통해 그 해석의 의미와 우리 삶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장미의 모습에서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자세와 방향을 제시하는 은유적 표현을 우리는 읽어내야 합니다.

작가들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독성 있게, 오히려 직설적인 경우를 선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철학 사상들은 왜 난이도가 있는 비교나 은유법을 사용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걸까요?

이는 철학자들이 은유와 비유적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깊은 사유와 통찰을 유도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장미와 자신의 차이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통해 스스로 통찰에 다다르게 돕기 위해서이지요.

비교하지 말라는 말은 지적으로는 이해되지만, 감성적으로는 잘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송이 장미가 고요히 자신을 피워내는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속 깊이 잔잔한 감동과 함께 메시지가 스며듭니다.

강력한 은유는 한 번 마음에 들어오면 잘 잊히지 않고,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자들이 왜 직설적인 언어 대신 은유를 선택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그 과정이 난이도가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은유는 단순히 멋을 부리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독자의 내면을 흔들고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장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철학은 정답을 주는 학문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사유의 여지를 남기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삶을 경쟁의 연속으로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비교하고 평가받는 구조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철학은 그 구조를 의심하고, 그 너머의 삶을 상상하게 합니다.

장미처럼, 비교하지 않고 존재하는 삶. 그것은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철학은 우리에게 은유를 통해 그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려 하는 것입니다.

은유는 감성의 언어라고도 합니다. 직설은 이해를 돕지만, 은유는 마음을 움직입니다. 마음이 움직일 때, 우리는 비로소 변화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은유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단지 개념의 전달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존재의 깊이를 일깨우기 위함입니다.

내가 이처럼 은유나 비유적인 철학적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은, 나의 삶과 은유된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하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고를 확장하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나의 글이 누군가의 마음속에 장미 씨앗이 되어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도 있지만,

그저 살아질 때도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자기 성찰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며, 나 역시 글을 쓸 때마다 이 단어를 여러 번 언급합니다. 그러나 문득 성찰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인지하며 사용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됩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성찰은 자신의 마음을 반성하고 깊이 살피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 안에 단순히 반성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과 발전을 다짐하는 미래지향적인 의지까지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성찰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의지를 다지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자기 성찰을 종종 자기반성에만 국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잘해보고자 마음을 다잡지만, 매번 글을 쓸 때마다 지나간 잘못에 대한 후회만을 반복하는 듯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현실의 고단함을 토로하며 그저 마음을 추스를 뿐, 어제의 다짐이 계획대로 실천되지 않았음을 반성하고 내일의 계획을 세우면서도 그 또한 장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삶이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계획한 대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은 기울여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려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도 있지만, 그저 살아질 때도 있다는 성현들의 이야기가 때로는 진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타인의 삶에 나의 삶을 맡겨버리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삶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삶 속에서 과연 얼마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요?

힘겹고 고달픈 삶이지만, 그럼에도 질긴 것이 사람 목숨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에 기대어 나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고 체념하기보다는, 적어도 살아지는 삶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노력은 해야 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이를 위해선 주체적인 삶을 위한 깊은 성찰이 필수적입니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온전히 우리 자신만의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주어진 삶 속에서 힘들다고 토로하는 모습이 당연하고 평균적인 삶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지는 않나요?

외부 환경과 주어진 역할 수행의 압박감에 우리의 감정은 종종 견뎌내지 못하고 흔들리곤 합니다.

물론 공동체 사회 속에서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감정만은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민감한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체면과 겸손을 미덕으로 포장하며, 세상이 정한 상자 안에 스스로를 맞춰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양보와 배려의 마음은 분명 미덕이지만, 자신의 감정까지 희생하면서 상대방을 위한 관계는 진실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의 진솔한 관계가 아닌, 가식과 허영의 가면을 쓴 관계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원칙과 계급 구조가 이러한 관계를 형성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세상의 현실을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적어도 우리의 감정 전부를 내어 주기 보다 조절의 방법을 사용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감정 조절의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타인의 삶에 구속되기보다, 우리 자신에게 정체성이라는 독립적인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깊은 성찰을 통해 그 공간을 채워 나가는 것입니다.

주어진 정체성의 공간을 채우는 것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핵심 가치나 신념, 경험들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가 만들어낼 정체성이라는 공간의 형태와 재료를 파악하고, 여기에 자기 성찰과 관찰을 통해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요소들로 채워야 합니다.

내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무엇이며, 이러한 것들이 과연 나의 가치를 높여줄 수 있는가?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분석하고, 나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해야 합니다.

또한 지금 내가 집중하고 있는 생각이나 활동 속에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과거의 힘들었던 순간들을 오늘을 살아가는 귀한 도구로 삼을 수 있도록 사고의 전환도 필요합니다.

정체성은 우리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체성의 공간 또한 우리 내면에 존재합니다. 타인의 기준이나 사회적 시선으로 채워지는 공간이 아닙니다. 오롯이 나만의 기준으로 채워 나가야 합니다. 그렇기에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명확하게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중심으로 공간을 채워 나가야 합니다.

주어진 역할 수행에 몰두하느라 나만의 고유한 역할의 존재를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 사람의 장점을 모방하되, 결코 그들을 복제해서는 안 됩니다. 이상적인 나를 만들어가기 위한 현명한 공식을 찾아야 합니다.

마치 철수의 끈기와 영희의 유머 감각, 희동이의 통찰력을 조합하여 나만의 공식으로 정체성의 공간을 채워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나의 핵심 가치가 열정이라면, 나는 열정적으로 세상을 만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나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언젠가는 쓸모 있을 것이라는 막연함으로 붙잡고 있는 것들이 정체성의 공간을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정체성이라는 건물은 한번 지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수정하고, 증축하며, 리모델링 되어야 합니다.

겉모습보다는 내구성에 중점을 두고 기초를 단단하게 설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성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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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남들과 달라야 한다


공동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쟁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자본주의 원리에 입각한 경쟁은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공통적인데, 이를 충족시켜 줄 공급은 한정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점 이라는 경쟁과 투쟁을 벌이며 최고의 방법을 강구합니다.

흔히들 인생은 경쟁의 연속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를 부정하거나 반론을 제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계발서는 경쟁하고 싶지 않다면 공통의 것을 추구하지 말고 창의적으로 생산하라고 조언합니다.

즉, 경쟁할 필요 없는 독자적인 가치를 공급하면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요? 만약 쉬웠다면 수많은 학자들이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에 대한 연구에 매달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는 인생을 기업처럼 경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경영이란 이윤을 남기는 것이고,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이클 포터는 경쟁의 의미와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마이클 포터가 말하는 경쟁 요인은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이미 같은 종류의 일을 하는 기존 경쟁자, 자신의 수익을 갉아먹는 대체 산업, 자신에게 물건을 사주는 수요자, 원료를 대주는 공급자, 그리고 새롭게 진출하려는 신규 경쟁자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잠재적 경쟁자들이죠. 기업은 이 모든 요소에 대해 경계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기업에서는 자신의 수익을 낮추려는 모든 요소를 분석하고, 개선과 전환의 노력을 통해 경쟁 우위를 확보해야 합니다. 이는 비단 기업에만 적용되는 원칙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도 나의 진로를 방해하며 삶을 힘들게 하는 경쟁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경쟁자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기업을 경영하든 나의 인생을 경영하든, 결국 수익을 남기거나 의미와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경쟁자를 찾아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방향을 연구하는 것은 기업 경영을 잘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힘들게 하고 방황하게 하는 요인들을 찾아 이를 극복하고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를 기르는 것이야 말로 내 삶의 우위 를 선점하는 것입니다.

'나는 안 될 거야' 라고 일찌감치 포기해 버리는 부정적인 생각은 나의 기업을 망치는 일입니다.

너무나 완벽 해지려는 태도는 또 다른 경쟁자를 불러오는 격입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정하는 것 또한 경영을 잘못하는 태도입니다. 나와 타인은 다르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같은 틀 안에서 재는 성장의 센티미터는 더 이상의 성장을 방해할 뿐입니다. 실패가 두려워 도전을 하지 않는 것도 경쟁 우위를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주체적이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에 따라 자신의 삶을 지향하지 못하는 것 역시 경쟁에서 지는 경우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인간관계나 스트레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삶을 경영하여 가치를 높이는 것은 기업 경영의 최우선 목표인 이익 창출과 같습니다. 하지만 물질적이지 않다는 이유로,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그리고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는 이유로 미루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내가 아니어도 나를 대체할 만한 사람은 많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는 기업처럼 될 것입니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석하는 것도 경영의 한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객이 아직 찾지 못하는, 고객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경쟁 우위를 차지하는 가장 훌륭한 전략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파악하고 그것을 향해 노력하는 것도 의미 있는 삶이 되겠지만,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한 나만의 가치 지향점을 찾아가는 노력이야 말로 삶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드는 전략이 될 것입니다.

경쟁자를 넘어서기 이전에, 경쟁을 하지 않는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자기 경영입니다.

특별한 생각으로 창의적인 인생을 만들어간다면, 우리의 삶이라는 기업은 반드시 성장할 것입니다.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우수성은 곧 차별화 를 의미합니다


우수하다는 것은 어떤 대상이 보통보다 뛰어나거나 훌륭하다는 의미입니다. 정해진 기준이나 기대치를 넘어설 때, 우리는 비로소 우수하다고 말합니다.

학창 시절 우수상 이라는 단어는 어린 나이에 부러움과 경쟁심을 동시에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어른들은 학업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특정 분야의 우수성을 인정하며 학생들을 격려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공동체 속에서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평균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고 이를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우수성은 곧 차별화를 의미합니다.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이죠. 무엇이 다른지는 스스로가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오늘도 우리는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SWOT 분석법을 통해 자신의 우수성을 찾아보라는 이야기는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강점이 무엇이고, 보완할 점이 무엇인지 분석하여 이를 강화하고 개선함으로써 자신을 우수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경영 분야에서도 우수성에 대한 수많은 이론이 존재합니다. 제품과 서비스의 차별화를 비롯하여 시장 창출, 기존 시장 관리 등을 통해 기업은 스스로의 우수성을 알리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우수성은 단순히 잘난 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새로운 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성장을 통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품위와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특별한 사고방식으로 창의적인 생산을 해야 한다고요.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동안 내 안에 단단히 자리 잡은 나를 완전하게 버릴 수도 없습니다.

기존의 틀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면,그 안에서의 활동 방식을 바꾸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면의 나를 성장시킴으로써 나의 우수성을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남들보다 다르다는 전제가 곧 우수성은 아닙니다. 남들과 다르기보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시도하고, 남들이 하는 것에 창의성을 더하려는 노력으로 평범한 사람들보다 평균 이상의 높은 성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존을 유지하면서 그 위에 새로움을 쌓아 올리는 것이 자기 계발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계발 노력은 곧 자신의 우수성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변화의 시도가 있어야 하고, 혁신을 통한 창조가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변화와 혁신을 위한 사고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아이디어가 있다고 한들, 그것을 실현시킬 행동력이 없다면 무용지물입니다. 자기 계발 과정을 수행하며 여러 사고 전환 방법들을 알아가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설사 행동하고 있다고 해도 지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우수성은 무엇이 있을까요?

남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잘하는 것이 우수성은 아닐 겁니다. 진정한 우수성은 현재의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며,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의 우수성은 한순간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의 노력, 그리고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사고가 함께해야 합니다.

그저 좋은 사람으로 살아왔던 지난날의 모습에서 이제는 잘난 사람으로 변모해야 합니다.

그 잘남 이 겉모습이 아닌 내면에서 나와야 함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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