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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세이코 시계를 사며 생각한 것들

by 행복재테크

일본 소도시로 가족여행을 떠나기 전 엄마가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거기서 꼭 사고 싶은 것을 하나씩만 골라둬라. 50만원 이내로."


그걸 사주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물건을 살 장소와 시간을 계획에 포함시키라'는 것이었다.


도쿄나 오사카는 쇼핑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생각이 복잡해지겠지만, 그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청주 정도 되는 도시라 뭘 딱 고르기가 애매해 보였다.


한참을 이것저것 뒤져보던 중 책상에 놓인 갤럭시워치가 눈에 들어왔다. 선물 받았다는 친구에게 반값에 샀지만, 두껍고 무겁고 매일 충전해야 하기에 대부분 집에 모셔두는.


생각해보니 군복무시절 PX에서 산 5만원짜리 지샥시계 외에 한번도 시계를 사본 적이 없었다. 글을 쓰는데 아무래도 불편하니까.


1 (5).jpg 군에서 쓰던 5만원짜리 시계


'나도 나이가 있는데 어디 차고 나갈 시계 하나는 있어야지?'


당장 뭐가 괜찮을지 찾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금액은 10만원에서 300만원까지 불어나 있었다. 심지어 그게 저렴해 보였다.


공항 면세점에 도착했을 때 나는 티쏘나 미도, 라도, 해밀턴 같은 며칠 전만 해도 듣도 보도 못했던 브랜드의 시계 가격을 줄줄이 읊고 있었다. 온라인 가격보다 저렴한 2~3개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가면 괜찮은 내수용 시계를 저렴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망설이다 '못 사면 다음에 사지 뭐' 하며 탑승구로 향했다.


20251013_170439.png 인터넷 면세점에서 검색한 시계들


여행이 다 그렇다. 계획은 널럴하게 세워도 다녀보면 시간이 없다. 쇼핑몰에 들어가 시계점을 찾으면 1분도 안돼 다들 '배고프다, 못 고르겠으면 가자'고 성화였다.


미리 눈여겨본 브랜드는 일본제인 세이코와 시티즌이었다. 백화점 진열장에 있는 시계들은 모두 100만원이 훌쩍 넘었다. "중저가 상품은 어디에 있냐"며 미리 캡처한 시계 사진을 보여주자 점원은 "모두 단종됐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쇼핑몰 매장들을 찾아보고는 종이에 주소를 적어줬다.


친절이 고맙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엄마와 동생을 가리키며 "다음에 혼자 여행 오면 비싼 시계를 사러 돌아오겠다"고 했더니 풋! 웃고는 우리가 에스컬레이터에 다다를 때까지 쳐다보면 손을 흔들어줬다.


그 유명한 돈키호테와 몇몇 쇼핑몰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좋아 보이면 비쌌고, 싸면 안 예뻤다. 대리점에서 안 팔린 물건과 저가형 물건만 들여오는 듯했다.


그만하면 됐다 싶었다. 있다고 기쁘지 않고, 없다고 아쉽지 않으니 그 시간에 구경이나 더 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일정이 모두 마무리되고 공항으로 가는 터미널(쇼핑몰)에 도착했다. 40분 정도 시간이 남아 엄마는 지하 슈퍼, 동생은 3층 신발가계를 다녀오기로 했다.


어슬렁대며 '하나만 걸려라, 나도 뭔가는 사야지' 하는데 위층에서 동생이 소리쳤다.


"형 여기 시계 파는 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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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안 보면 후회하겠다 싶어서 올라가 봤더니 상품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시계매장이 있었다. 주력 브랜드도 원하던 세이코였다.


시간이 없었다. 번역기부터 들이댔다.


"쿼츠(자동), 솔라(태양전지), 라디오컨트롤러(라디오 주파수로 시간 자동 맞춤), 티타늄(윗면 유리), 날짜와 요일 나오면 좋고."


점원은 진열장 하나를 가리켰다. 아쉽게도 원하던 종류가 아닌 레저용 시계들만 가득했다.


아~ 씁~만 반복하고 있는데 동생이 다가왔다.


"형 저기 어제 형이 보던 거 있어."


그랬다. 동생은 내가 눈여겨보던 시계를 나보다 더 기억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원하던 것과는 반대로 오토매틱 시계였기 때문이었다. '태엽을 돌리거나 차고 다니지 않으면 멈추는 시계를 굳이…' 하는 생각과 '이정도면 썩 괜찮은데' 하는 생각이 불붙었다.


생각은 막 풍선처럼 불어났다. 이럴 거면 20만원 더 써서 원하던 종류를 살까, 차라리 큰맘 먹고 300만원짜리 그랜드세이코(고급)을 살까, 여기서 사면 충동구매니 다음을 기약할까.


시간은 없고, 머리는 복잡하고, 점원은 쓸데없이 다이버시계를 꺼내고 있고, 하필 다른 손님이 들어오고…


5분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30초만 생각하기로 하고, 동생이 말한 시계를 잡아들었다. 이것이 내거냐 아니냐 내거냐 아니냐…


스틸보다 가죽이 낫고, 정원이나 기와를 보는 듯한 얼굴, 오픈하트. 생각과는 정반대지만 이정도면 좋아하며 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인+면세 포함해 최종 판매가를 알려주세요"


"0만엔"


"콜"


결정은 가벼웠다. 순식간에 손에 잘 포장된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한국에서보다 훨씬 저렴하게 구입했다는 생각에 '됐다'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스에 올라탔다.


CK_tica1010017336_l.jpg


집에 돌아와 생각해봤다.


손목시계야말로 요즘 가장 필요 없는 물건 아닌가. 수천만원짜리 명품시계와 만원짜리 시계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럼 건전지를 갈 필요도, 시간을 맞출 필요도 없는, 내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던 10만원짜리 카시오 대신 이 시계를 고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 참 사람 욕심이 끝이 없구나 싶었다. 이왕이면 좋은 것, 화려한 것, 과시될만한 것을 원한다. 그것이 집이든, 차든, 옷이든, 신발이든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니 그 정점이 시계였다.


나는 바다 건너 온 시계를 책상에 놓고 '예쁘다,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몇 배나 비싼 그랜드 세이코를 살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랜드 세이코를 살 수도 있고, 사도 된다. 하지만 '적정선'이라는 선을 그어두자 시야는 딱 그만큼으로 고정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수준에 만족하면서 아쉬워했다.


사람이 그렇다. 자신의 한계를 정해두고 도달하면 아쉬워한다.


그래서 스스로 한계를 두지 말고, 계획은 크게 세울수록 좋다. 그럼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해볼만해진다.


아반떼를 보러 갔다 G80까지 타봐도, 성남 아파트를 보러 갔다가 판교를 임장하든 마찬가지다. 남들 말과 글에 주늑들어 올려다보지도 못하면 오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은, 송사무장님의 「그냥 이렇게 살면 돼」와 「EXIT」같은 책에서는 목표를 크게 잡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목표에 정조준하라 조언한다.


아니 강남에 가고 싶다면서 강남 임장한번 하지 않으면 무슨 수로 강남까지 갈 것인가. 친구 따라서는 이제 절대 강남 갈 수 없는 세상인데.


KakaoTalk_20251013_171033210.jpg


나는 새 시계를 책상에 올려두고 생각했다.


이것에서 만족하고 시계의 세계는 그만 정리할 것인가, 그랜드 세이코를 살 생각으로 뭔가 새로운 계획을 세워볼까.


한참이나 갈팡질팡하자, 스리슬쩍 이런 생각이 치고 들어왔다.


"지금 것은 이제 완전히 내꺼고, 다음엔 그랜드 세이코도 사면 될 것 아닌가. 뭐가 문젠데."




위 글은 책 「그냥 이렇게 살면 돼」의 서평으로 행복재테크 카페에 작성했습니다.


송희창(송사무장)님의 신간「그냥 이렇게 살면 돼」는 브런치북으로 미리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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