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멈춘지 몇 달이 지나도록 돌지 않는 시계를 계속 차고 다녔다. 그동안 한번도 멈춘 적이 없었던 시계였다. 아침마다 시계를 차면서 직장 부근 기사식당 옆 길모퉁이의 시계방을 떠올리며 오늘은 반드시 시계방에 들르리라 되뇌곤 했지만 걸어서 십분이 채 안되는 그곳에 오늘에야 갔던 것이다.
시계방 주인은 약을 갈아끼워보더니 약이 떨어졌을 뿐 아니라 회로까지 망가졌다고 한다. 보아하니 회로를 고치자면 배보다 배꼽이 클 텐데, 새걸 하나 사는 게 어떻겠느냐고 한다. 고치는 데 얼마나 들겠느냐고 새삼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십여년 전 미국에서 잠시 지낼 당시 십 몇불, 환율이 천원이 안되었을 때니까 대략 만원 남짓에 산 싸구려였던 것이다. 물어보나마나 수리비라면 만원이 넘지 않을 리가 없다. 언젠가 자주 다니던 술집 마담에게서 제발 애들처럼 그 일이삼사 써진 시계 차고 다니지 말라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줄기차게 차고 다녔던 물건이었다. 듣고 보니 친절하게 숫자가 쓰여 있는 것이 좀 우습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더 좋은 시계를 차고 다닐 필요를 느끼지도 않았고 한 시기의 추억이라면 추억이랄 수 있는 기억들이 묻어있는 물건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늘상 살을 대고 살던, 이미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물건이었던 것이다.
유리전시대에 두 팔꿈치를 받치고 비스듬히 기대 서서 나는 여전히 돌지 않는 시계를 한참 동안 만지작거렸다. 엄지손가락으로 시계 유리에 지문을 찍고, 그것을 문질러 지우는 무의미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선택의 기로에 갑자기 서게 된 것 같았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뜸을 들인 뒤 주인에게 어떤 시계가 있는지 보자고 했다. 주인은 시계 두 개를 꺼내 놓고는 하나는 무슨 메이커 건데 십오만원, 또 하나는 십이만원인데 십만원에 가져가라고 한다. 뭐가 그리 비싸냐고 했더니 하긴 그런 시계를 차고 다니셨으면...하면서 맨 구석 쪽에 진열된 것들을 보여준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걸 꺼내더니 삼만 오천원이라고 했다. 것도 좀 비싸네요. 삼만원에 합시다.
거래는 쉽게 타결됐다. 새 시계의 쇠줄 대신 이전의 시계줄로 갈아달라 하고 나서 가게를 둘러보니 시계와 함께 담배도 팔고 있었다. 완 한보루도 주시죠. 시계값 삼만원에 담배값 이만오천원. 무어라 꼭 집어 얘기할 순 없지만, 왠지 발란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원 참, 시계가 싼 건지 담배가 비싼 건지... 지갑에서 돈을 꺼내며 뇌까리는 소리에 주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이 장사도 못해먹겠어요.
새 시계를 차고 담배가 든 검은 비닐봉지를 덜렁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넌 다음 몇 발짝을 더 떼고 나서야 이전 시계를 시계방에 그냥 두고 나온 것을 알았다. 다시 건너가서 가져와야 하나...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길 건너 저만치에 있는 시계방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되돌아섰다. 그래 난, 그저 깜박 잊고 나왔을 뿐이다, 깜박 잊었을 뿐이다.... 가지고 왔다 한들, 아무튼 널 더 이상 데리고 살 순 없지 않겠어. 그렇다고 내손으로 널... 널 쓰레기통에 던져 넣을 수야 없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