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버스를 타고 바욘에서 생장까지
오래 전부터 꿈꿔온 여행이었지만 막상 출국일이 다가올 때까지 실감이 나진 않았던 것 같다. 프랑스 샤를드골 공항까지 14시간 동안의 비행을 마치고 6시간을 대기한 뒤 또 다시 12시간을 달려가야 하는 심야 버스에 몸을 실었다. 출국일날 밤을 꼬박 새우고 한 시간밖에 자지 못한 터라 비행기에 오르자 마자 잘 수 있었는데 덕분에 비행기에서부터 얼추 시차적응은 끝난 상태였다. 심야 버스에서 꽤나 깊은 수면을 취하고 눈을 뜬 목적지 바욘에서는 소나기가 내리는 중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거센 비바람을 뚫고 바욘 대성당으로 향했다.
바욘은 대부분의 순례객들이 프랑스길 순례를 시작하는 생장에 가기 전 앞서 잠시 거쳐가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바욘에 도착하고 별도의 관광 없이 버스나 기차를 타고 곧바로 생장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7시간 가량 머문 바욘은 잠시 거치는 도시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피부에 닿는 바람에 뒤섞인 바다 내음과 여유롭고 친절한 사람들. 특히나 바욘 성당에서의 종소리와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며 조용히 기도하던 사람들의 모습은 오래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성당에서 꽤나 긴 시간을 보내고 나오자 어느새 하늘도 맑게 개어 있었다.
바욘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비아리츠 해변에도 갔다. 생장에서의 본격적인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프랑스 아웃도어 브랜드인 데카트론을 구경할 예정이었는데 그곳이 비아리츠 해변과도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비아리츠 해변에서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퍼들이 파도를 타고 있었고 작은 돗자리 위에 누워 책을 읽는 여성과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아이들도 보였다. 돌이켜 보면 40시간 가까이 씻지도 못한 초췌한 상태였는데도 이곳에서의 기억은 순례길을 걷기 전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한국말로 먼저 말을 걸어준 프랑스 할아버지도 생각난다.
하지만 나도 바욘에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머물 계획은 아니었다. 나같은 여행 초보가 굳이 바욘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이들과 다른 선택을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여기엔 사실 부끄러운 이유가 있다. 설명하자면 나는 프랑스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의 5일 간의 교통편과 숙박을 모두 한국에서 미리 예약했(었)다. 그리고 나는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여덟 시간의 시차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예약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아니 25일에 출국했는데 왜 아직도 25일이지? ㅋㅋ”
심지어 유심 개통마저 하루 늦게 신청한 탓에 나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터미널 앞 스타벅스 와이파이를 이용해 일일이 모든 교통편과 알베르게 숙박 일정을 변경하는 메일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바욘에서 생장으로 이동하는 기차의 경우 일정을 변경하려고 보니 오후 12시에 출발하는 기차가 무슨 연유인지 취소된 상태였고 덕분에 바욘에서의 7시간이라는 강제적인 자유 시간이 생긴 것이다. 여행을 오기 전 나는 언제부터인가 조금만 일정이 틀어져도 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는데, 나는 왜 그런 사람이 된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겪는 모든 일들에서만큼은 이상하게도 내가 스스로에게 정말이지 관대해진다는 걸 깨달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멍청해서 다행이다 덕분에 바욘 관광도 하고”
그렇게 바욘에서의 행복한 시간을 마치고 나는 생장행 기차에 올라탔고 그곳에서 바로 내 앞좌석에 앉은 한국인 남성을 만난다. K와는 현재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 함께 묶으면서 서로 오래 수다를 떨 정도로 친해졌지만 당시에는 어색함에 서로 창 밖을 구경하기 바빴다. 기차에서는 몰랐지만 중간에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보르도도 지났다고 한다! K는 40대 후반의 결혼한 남성이었는데 왜 그리고 어떻게 순례길에 오르게 된 것인지는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앞으로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그에 대해서 조금은 더 알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K와 함께 도착한 생장. 걸음이 빠른 나는 먼저 생장의 사무실에서 순례자 여권과 가리비를 구매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다른 인연이 될 J를 만난다. J는 내가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자 곧바로 대뜸 내일 같이 순례길을 걷자고 말했다. 그때 당시에는 너무 좋다고 대답했는데 나도 모르게 다음날 말도 없이 혼자 걸어버렸다. 그래도 그날 저녁 J와는 카톡을 교환한 뒤에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나는 다음날 첫 순례길 여정의 기대에 부풀어 송아지 스테이크를 시켰고 주헌이는 홍합 같은 조개 요리를 먹었는데 주헌이의 메뉴가 압도적으로 맛있었다.
J와는 함께 식사를 하며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포커를 치기 위해 프랑스에 왔다가 순례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J는 맥주를 좋아하고 솔직하며 10kg가 넘는 배낭을 메고도 웃음을 잃지 않을 정도로 밝았다. 나와는 무척이나 달랐지만 그런 점 때문에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기도 했다. 앞으로의 여정에 계속 함께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함께 발걸음이 닿을 때까진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생장의 숙소에서는 쾌적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2인실을 예약했다. 나말고는 아무도 2인실을 예약하지 않았는지 혼자서 잠에 들었다. 침대에 누워 침낭을 펼친 그 순간부터였을까. 내가 순례길에 왔구나 드디어 실감이 난 것 같다. 그리고 그제야 스스로에게도 물을 수 있었다.
“나는 여기에 무얼 얻으러 왔지?“
이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다가 내린 나의 대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나는 이 길 위에서 아무것도 얻지 않아도 좋다. 나는 내가 들고 온 것들을 이곳에 내려두고 가고 싶다. 잊고 싶은 기억도 우울한 고민도 이 길 위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서 조금씩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흘리고 버릴 것이다.
안녕하세요.
산티아고에서 한 달 반 동안 걸은 이야기를 연재하는 '우리 각자의 산티아고'입니다.
제가 순례길을 여행하며 담은 사진들을 모은 산티아고 엽서북과 순례길 이후의 여행을 담은 포루투갈 엽서북을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산티아고 일기는 크라우드 펀딩이 끝나는 11/17까지 매일매일 연재되오니,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