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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똥이애비 May 10. 2024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성우의 꿈

늦깎이 성우 도전기(17)

  또다시 낙방했다. 방송사 공채 시험 3번의 도전에서 모두 1차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정말로 5년, 6년 동안 준비한다고 말로만 들었지만 경쟁이 상당히 치열한 시장인 듯싶다. 공채 외에도 부수적으로 여러 다양한 활동들에 지원해 보았으나 번번이 탈락 메시지만 받을 뿐이었다. 최근 회사 일이 바쁘고 급성 위염에 걸리는 마당에 다니던 성우 학원을 잠시 중단했다. 게다가 운영하고 있던 유튜브 채널의 영상 업로드도 멈췄다. 즉, 성우지망생과 관련된 활동들을 내 삶에서 잠시 떨어뜨려놓았다. 회사 일과 육아와 같이 꼭 인생을 살며 해야 할 일에만 몰입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성우라는 꿈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었나?


1년 정도로 비교적 짧은 성우지망생 생활을 자처했지만, 이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근본적인 물음부터 다시 해결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난 이미 나이가 꽉 찼고, 돌봐야 할 가족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날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렸을 때 주변에서 이런 말을 종종 들었다.


"와, 너 목소리 좋다. 성우 한번 해봐."


이런 얘기를 몇 번 듣다 보면, 정말 세뇌당하듯 내 마음속 한편에 자그마한 씨앗이 자리 잡는다.


'정말 한번 도전해 볼까?'


성우지망생으로 학원을 다니던 시절에 고등학생부터 나보다 나이가 15살은 많아 보이는 어르신들도 보았다. 그들이 성우 학원을 다니게 된 동기는 거의 나와 유사했다. 친구들이, 부모님이, 주변 사람들이 목소리가 좋다고 추천해 줬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꿈을 위해 도전을 실행한 시간은 달랐다. 누구는 공채 시험을 응시하지 못하는 미성년이었고, 누구는 이미 본업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팀장이었고, 누구는 중학생 딸의 어머니였다. 본격적인 공채반에선 20대의 젊은이들이 주력이었고, 취미반에서는 40대 정도 되는 어른들이 주력이었다. 30대 후반인 나는 어디에 속해야 할까.



  무엇보다 이 성우라는 꿈이 남들이 등 떠밀어서 만들어진 꿈인지, 진정 내 안에서 원하는 꿈인지를 우선적으로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성우를 도전하기에는 굳은 의지와 열정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덤빌 수 없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직장인이 일주일에 한두 번 수업 듣고, 주말에 시간 날 때 연습하는 수준에선 절대로 공채 시험에 합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목소리가 좋다고 하더라도, 성우는 연기를 해야 하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축적된 자기만의 확고한 무언가를 표현해야 하는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어떻게 성우가 되었는지 얘기를 들어보면, 대학 연극영화과나 뮤지컬학과 출신들이 있었고, 최소한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그게 아니면 녹음실에서 근무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거나, 성우학원을 꾸준히 오랜 기간 다니며 갈고닦은 실력자들이었다. 게다가 한 가지 공통점을 찾아볼 수가 있었는데,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또는 영화와 같은 특정 영상 매체에 깊게 빠진 경험들이 있다는 것이다. 소위 한 분야에 심각할 정도로 열중하는 '오타쿠' 기질이 있었다.


  나는 어떠한가. 내가 성우가 되고자 했던 근본적인 의지는 나의 내면에서 도출된 것인가. 나는 정말 성우로 활동하는 걸 즐기고 행복해할 것인가. 유튜브 활동을 하면서 560명 정도 되는 구독자가 생겼고 내 목소리를 듣고 구독까지 눌러주신 구독자님들께 감사했지만, 목소리를 녹음하고 영상을 편집하는 그 수고스러움이 크게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숙제를 해나가는 느낌이었다. 분야를 바꿔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더빙도 몇 번 해보았지만,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실력에 좌절했고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학원을 다니면서 해본 더빙 녹음과 라디오 드라마 대본 녹음도 어렵기만 할 뿐 즐거움을 크게 얻지는 못했다. 사실 나는 영상을 즐겨보지도 않는다. 어릴 적 애니메이션보단 내 나름의 속도로 읽을 수 있는 만화책이 좋았고, 성인이 돼서는 시간이 있으면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보단 책을 읽었다. 이렇게 보니 나는 성우를 꿈꿀 자격조차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성우 학원을 전전하던 때에 성우가 하고 싶은 이유를 20살의 어린 친구에게서 듣고 머리가 띵했던 적이 있다.


"저는 애니에 한번 빠지면 똑같은 장면을 10번이고 20번이고 계속 돌려봐요. 그리고 목소리 연기를 한 성우를 찾아서 그분의 작품을 또 찾아봐요. 계속 보다 보면 대사가 외워져서 평소에 엄마나 친구들한테 장치면서 그 대사를 읊어요."


이 말을 하는 동안 그 젊은 친구는 웃고 있었고, 진정으로 행복해 보였다. 24살의 청년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제가 너무 좋아해서 매일 하는 게임이 있는데, 게임 주인공 목소리를 계속 듣다 보니까 저도 그냥 자연스럽게 따라 했어요. 얼추 비슷한 것 같아서 녹음도 해봤는데, 게임보다 녹음이 더 재밌더라고요."


이런 경험들이 그들 스스로가 일찍이 성우학원을 등록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즉, 진정으로 본인의 내면에서 온 재미와 흥미가 있어야 지속적으로 꾸준히 도전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아차 싶었다. 나는 누굴 위해 이 성우라는 꿈에 도전해 왔던 것일까. 너무나 가볍게 생각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 흥미로운 부분을 아직까지 못 찾은 걸지도 모르겠다. 성우 취미반에서 40대 후반의 어른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던 걸까. 목소리의 자신감, 남들 앞에서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스킬, 내 목소리로 만든 오디오북, 영상 제작을 위한 더빙 스킬, 감정적인 시 낭독 등 굳이 공채 성우에 도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다양한 활동들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좀 더 돋보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활동의 완성도를 채워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행복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의 나의 방향성도 이들을 따라가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공채 시험 도전내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듯하다. 내 목소리를 잘 살려 내가 즐겁게 활동할 수 있는 분야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 그 일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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