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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현 Aug 04. 2021

이 정도향수면 꽤 멋진휴학 생활아닌가요?

슬기로운 의사생활과하트 시그널만보면...

드라마, 음식, 옷, 음악 등 분야를 막론하고 내 향수를 소환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요즘 유난히 그때의 마음과 기분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같은 시기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과 예능 '하트 시그널 3'이 나를 한동안 생각에 잠기게 하는 장본인들이다.



프로그램 자체가 큰 의미가 있었다기보다는 이 두 프로가  방영된 시기가 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두 프로그램 모두 2020년 상반기에 방영되었는데, 그때는 내가 한 학기 동안 휴학을 했던 시기다. 

사실 분명한 목표가 있어서 휴학을 한 게 아니라 이전 학기가 너무 힘들고 몸이 아파서 좀 쉴 요량으로 홧김에 휴학 선언을 했고 날 잠시 보러 포항에 오셨던 부모님도 내 상태를 보고 휴학을 허락하셨다. 



그런데 학기가 끝나고 3주간 태국 선교를 다녀와서 남은 방학 동안 일이라곤 과외만 하면서 쉬다 보니, 생각보다 남은 2달은 실컷 쉬고  몸을 회복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생산성 없이 가만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나에게 고역이기도 하다. 나는 어떻게든 일을 하거나 의무가 있어야 남은 여가시간도 알차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길어지는 휴식시간이 나를 조금씩 압박해온 것도 맞다.

그래서 나는 2월 중순쯤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휴학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토익, 포토샵/일러스트 공부 등 여느 때와 같이 시작은 의욕에 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본가에는 내가 타지로 대학을 가면서 집에 없는 시간이 더 많다 보니 내 방이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 포항에서 집을 구하는 친한 대학 친구와 함께 자취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개강일에 맞춰 포항 갈 준비를 하던 우리에게 비상벨이 울렸다. 우리나라의 첫 코로나 집단감염이 발생해버렸다. 한 달 정도 입주를 미루다가 기다린다고 상태가 호전될 것 같지가 않아서 조심히 포항으로 갈 준비를 했다.



나의 첫 자취는 23살이었음에도 처음 하는 것 투성이었다. 나름 기숙사 생활을 3년간 했지만 '나의 집'에 들어선다는 것은 낯설고 설레었다.

처음으로 뭘 해먹을지 고민하면서 장을 봤고, 추위에 벌벌 떨면서 하루 밤을 자고 나서야 보일러가 고장 났다는 걸 알아채기도 했다. 

그리고 화장실이 깨끗하고 쓰레기는 휴지통에 버리면 없어지고 냉장고에는 음식이 있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서는 예전의 내 무관심에 부끄럽기도 했다.



이렇듯 실수 투성이인 자취 생활에 생긴 루틴이 바로 친한 친구를 불러 맥주 한 잔 하면서 일명 슬의 와 핱시를 보는 거였다.

대단하지 않아도 우리가 만든 다소 허접한 음식과 불편한 좌식 책상에 둘러앉아 '우리의 집'에서 노곤노곤 우리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내 얼마 안 되는 자취 생활의 작지만 가장 큰 행복이었다. 



나의 첫 자취집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또는 자취 생활이 길지도 않았지만 처음으로 하나하나 채워나가고 혼자(혹은 룸메와) 헤쳐나가는 그 경험들이 너무 특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사실 첫 포부처럼 굉장한 공부나 경력을 쌓지는 못했다. 그래도 굳이 굳이 포항으로 간 것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방보다 거실이 더 커서 거실을 침실로 쓰고 방에 책상 두 개와 행거 하나를 두고 모든 생활을 공유했고,

 늘 느지막이 일어나서 이미 수업 중인 룸메와 나눠먹을 점심을 준비했다. 

가끔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두 명 분의 간식을 사가기도, 만둣국을 만들어 지인에 집에 놀러 가기도 했다. 

어떤 날은 밤이 깊어갈 때까지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는 속내를 오픈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일상이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공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울렁울렁 간질간질하다. 



서툴지만 서로 열심히 최고의 첫 룸메이트가 되려 노력하고 애정을 가지고 생활하던 그 작은 자취방이 요즘 나에게 불쑥 떠오르는 향수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많은 공간과 대상에 그만의 기억과 느낌이 저장된다. 

이제는 모든 정보를 텍스트로 또는 이미지로 너무 쉽게 저장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는 담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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