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지를 찾아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켄의 집에 들러 그의 사무실 겸 방을 구경하고 함께 길을 나선 사람들과 밥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여기서는 '호텔'이라고 부르는 곳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를 의미한다. 집에서 먹는 식단과 다를 것이 없는 메뉴. 치킨을 시키면 커다랗고 질긴 닭다리 하나가, 쇠고기를 시켜도 질겨서 잘 안 씹히는 냄새나는 고기가 우갈리, 케일 볶음과 함께 플레이팅 되어서 나온다. 밥 먹기 전에 손을 씻고 우갈리를 손으로 꾹꾹 주물러서 야채볶음과 고기를 곁들여 먹는다. 숟가락과 포크가 별로 필요 없는 식사 방법이다.
내가 키모리 지역 학생들을 위해 준비했던 프로그램은 '예술가처럼 생각하고 만들기'였다. 핑거페인팅, 랜드 아트, 요술 풍선, 옵티컬 아트, 종이접기, 사진 찍어 감정표현 카드 만들기의 6가지 활동을 설명하는 제안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활동지를 찾아다녔는데, 첫 번째 방문한 고아원에서 완곡한 거절을 받은 다음날 두 번째 방문한 우모자 고아원에서 제안서를 받아주었다.
앞으로 4주 정도 봉사활동을 하게 될 우모자 고아원의 스터디룸. 곡식 마대에 빨간색실 스티치로 교구를 만들어 걸어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날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있자니 나 혼자만 신나고 빛나는 얼굴이어서 괜스레 미안해지고 부끄럽기도 하다. 2년의 시간이 지난 뒤늦은 후기가 부끄러움의 고백이 되는 지금이지만, 그래도 그 시간 그 추억들이 성장이 이미 끝난 줄로만 알았던 중년의 내 뿌리를 다독여 움직이게 해 준 신나고 행복했고 아름다웠던 경험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함께 해 준 친구들이 고맙고 고맙다.
내일부터 가지게 될 고아원 봉사 경험에 혼자 들떠있던 날.
어디를 가도 여전히 대지는 건강했고, 사람들은 친절했고, 나를 향한 시선은 환대 그 자체였다.
사진을 기가 막히게 찍는 친구와 여행을 함께 한 적이 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풍경을 똑같이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는데 친구의 사진은 척 보기에도 내 사진과 딴판으로 아주 멋있었다. 똑같은 사각의 틀 속에 구도와 초점과 카메라의 각도를 조금 달리 했을 뿐인데도 그의 사진은 얼마나 멋지던지...
'사진은 다 사기야!'라고 나는 우겼고 친구는 웃었다.
그처럼 멋진 사진이 따스한 시각으로 보이는 곳을 담는 일에 정성을 기울인 결과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나 자신의 일상, 또는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누군가의 일상에서 내가 집중해서 보는 장면은 어떤 것일까? 그것을 향하는 나의 시각이 따뜻하고, 정성을 기울여 담으려고 노력한다면 나의 기록도 그 친구의 사진만큼 멋진 것이 될 수 있을까?
이렇게 멋진 풍경을 누릴 수 있는 건강한 대지, 건강한 사람들의 틈 속에서 앞으로 내가 그려나갈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아름답고 따뜻한 시선을 늘 유지하기.
하나의 다짐을 더 추가해 본 날이었다.
아이들은 풍선놀이를 제일 좋아했다.
색연필과 색 사인펜으로 정교한 선을 그려 모양을 표현하는 옵티컬아트 활동은 조금 어려워했고 재미없어했지만 착실하게 끝까지 완성하려고 하나같이 애를 썼다.
마지막 날 휴대폰 어플로 사진을 찍어 편집을 해서 포토프린터로 출력을 하는 활동으로 이별 선물을 대신했다. 아이들은 아낌없이 최대한 자신들의 개성을 보여주기 위한 표정과 몸짓으로 생기 넘치는 장면을 담아주었다.
한 때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우물 파 주기, 집 안에 굴뚝 놓아주기와 같은 후원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식수가 문제인 지역의 사람들이 고여있는 물을 마실 때 유용하도록 오염물을 걸러주는 필터가 장착된 '구명빨대'라던가, 먼 곳까지 길을 떠나 물을 길어오는 아이들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되었다는 커다란 바퀴 닮은 모양의 'Q 드럼'물통에 대한 기사도 관심 있게 보았었다.
그 후의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구명빨대'를 빼앗기 위해 살인사건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는 건 비밀처럼 전해졌다.
아프리카의 산악지대와 거친 돌밭을 지나는 동안 담긴 물이 다 흘러나가 버리게 되는 'Q드럼'은 사통팔달 평평하고 안락하게 포장된 선진국의 아스팔트 숲에서 오직 '선의'만으로 디자인된 '빈곤층 타깃 구호 제품'들의 허세 또는 가리어진 폭력성에 대해 입을 다물게 된 비밀을 담고 있다고 했다.
우물을 파는 데는 막대한 돈이 들어가지만 그 우물을 관리하여 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는데도 역시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고 꾸준히 관리를 하지 않는다면 우물 주변은 쓰레기로 덮이고 녹슬어 결국 다시 버려지는 일도 비밀이 되었다.
집 안에 굴뚝을 놓아주는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잦은 안질환에 시달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봉사자가 원인을 분석해 보다가 집 안에서 불을 지피는 생활방식이 원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연기가 눈에 들어가 안질환이 생기고 있다는 다소 설득력 있는 결론이었으므로 집 안에 굴뚝을 놓아서 연기를 밖으로 빼내기만 한다면 안질환의 원인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호소해서 후원이 시작되었고 그 지역의 집집마다 집안에 굴뚝이 놓였다고 한다. 마침내 안질환은 자취를 감춘 듯했으나 그다음부터 주민들은 말라리아에 시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동안 집 안에서 피운 불이 모기를 막아주었는데 연기가 사라지고 난 뒤 집안에 모기가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아원 봉사 활동을 마칠 무렵 비공식적인 후원을 요청받았다. 형편이 닿는 범위에서 도와달라는 제안이었다. 단체가 아닌 개인자격이었으므로 후원을 해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난 비상금으로 보관해 왔던 얼마간의 돈을 전달했다. 기관의 사람들이 모두 기쁘게 받아서 내 후원금으로 시멘트를 여러 포대 사서 고아원에 전달할 때 나는 어쩐지 조금 서글퍼졌다. 기념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아이들을 모았고 아이들은 나와 수업할 때와는 조금 다르게 경직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이곳을 떠나면 다시 오지 않을 사람이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아마도 영원히 이 땅을 지키고 살아가게 될 이곳의 모든 어른들도 아이들도 누군가의 도움 같은 것 없이 행복하게 살게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