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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 마을 풍경

초저녁 달과 검푸른 하늘과 눈부시게 아련한 석양과

by 미 지

기관 디렉터와 스탭(켄, 켄의 동생), 목사님과 함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라는 안내장을 돌리러 보멧 산골마을을 돌았다. 차 안에 앉아있기만 해도 많은 아이들이 몰려와 멀찍이 둘러 서서 나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다. 잠깐 산책하기 위해 차에서 내렸을 때 순식간에 많은 아이들이 내 옆을 둘러쌌다. 아이들 틈에서 잘생긴 마사이 꼬맹이 하나가 건들거리며 다가와서는 다짜고짜 자기 번호를 불러주면서 내 전화기를 달라고, 번호를 따야겠다고 말했다. 국제전화라 통화료가 엄청 비싸다고 말해주었더니 잠시 눈빛이 흔들리다 불쑥 사랑한다고 말하곤 다가올 때랑 비슷하게 건들거리며 무리 속으로 사라져 갔다. 혼자서 눈물이 날 정도로 웃었다.





무척 젊고 생기 있는 목사님 '나단'.

한국에 돌아와서 찬찬히 그의 페이스북 프로필을 살펴보니 아들과 같은 나이였다.

생기 발랄한 모습으로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근황을 묻고 자기가 전화 통화하던 사람을 소개해준다며 불쑥 바꿔주기도 하고 그랬다.

돌아오기 며칠 전 마지막 인사차 들른 미션스쿨에서 만났을 때 아이들과 하고 있는 티셔츠 종이접기 활동을 신기해하며 여러 장을 따라서 접어보다가 또 지나가는 아이들을 붙잡아 세우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무튼 지간에 붙임성이 백 단은 되어 보였다.


이 날 오후 불쑥 집에 방문해서 나를 찾더니 자신은 나단 목사라고 통성명하기가 무섭게 자기 핸드폰에서 한국사람 이름을 찾아서는 자신이 잘 아는 한국사람인데 통화를 해 보라고 권했다. 내가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자 왜? 왜? 왜 같은 한국사람인데 모르는 거냐고 엄청나게 궁금해했다.

그러다가 또 갑자기 내 휴대폰에 왓썹 메신저를 깔라고 했다. 메신저를 깔고 나니 그 한국 사람 연락처를 추가하라고... 왓썹 사용법을 알려주면서 그 사람과 통화를 하라고 계속 권유하길래 마지못해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그쪽도 당연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우리나라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국외발신으로 걸려오는 모르는 사람의 전화를 아무 의심 없이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수 없이 '나단 목사님이 연락하라고 해서 연락드려본다'는 문자를 그 한국인에게 보냈지만... 당연히 답이 오지 않는 상황을 그는 진짜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커다랗게 뜬 눈으로 쳐다보는 것에 웃음이 나오려고 하는 걸 꾹 참아야 했다. 그렇지... 아마 나도 이다음에 아프리카 사람을 보면 그렇게 물을지도 모르지. 켄 몰라요? 아프리카 모고고식에 사는 켄. 그 왜 윌리랑 죠슈아 가족이랑 친한. 윌리도 죠슈아도 몰라요? 아프리카 사람인데 왜 몰라요? 나단목사님은요? 나단목사님도 모른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렇게... (하하하!)


(며칠 뒤에 그에게 한국 사람은 친해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일가친척의 개념이 이곳처럼 몇천 명 단위의 부족이 끈끈하게 얽혀있는 게 아니어서 서로를 잘 모른다고 더듬더듬 설명해 주었고, 그는 납득이 가지는 않지만 이해는 하겠다는 끄덕거림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갈 곳이 있다며 켄과 함께 자기 차를 타라고 하더니 보멧 카운티의 한적한 시골 마을로 향했다. 나를 차 안에 앉혀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이 모여지자 학교에 나오라는 안내장을 아이들과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나누어주러 다녔다. 차 안에 앉아만 있기에는 조금 긴 시간이었기에 잠깐 내렸을 때 순식간에 많은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연예인이 된 기분이 이런 걸 지도...


아이들을 내 옆에 모여 서게 한 후 목사가 내게 손을 흔들라고 포즈를 정해주며 셀카를 찍었다. 그러다가는 아이들과 활동할 것을 꺼내라고...(갑자기?.. 집에 있다가 갈 곳이 있다며 같이 가자고 해서 서둘러 나왔고, 자기가 운전하는 차를 탈 때 난 달랑 휴대폰 가방만 들고 있었잖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냥) 고개를 흔들며 없다고 표시를 하며 집에 있다고 했더니 아이들에게 다음번에 이 '무숭구'와 함께 또 여기 오겠다고, 그때는 이 '무숭구'께서 여러분에게 풍선 같은 선물을 주실 거라는 광고를 했다.



(내가 돌아오고 몇 달 후 나단 목사는 발랄하고 어여쁜 아가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신혼부부의 결혼식 프로필 사진은 화려한 옷 색깔만큼이나 화려하게 빛나는 행복감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이후로도 서너 번 점심을 먹고 난 후 마을을 돌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라는 안내를 하러 다녔다. 색종이와 풍선 같은 재료들을 가지고 다니며 아이들을 볼 때 나누어주었는데 나단목사와 같이 하지 않는 이후의 입학안내 활동은 조금 심심했다.




나이로비에서 서너 시간을 달려 보멧 카운티 중심 대로를 지나다 보면 모고고식 표지판이 보인다. 그곳에서 보이는 여러 갈래길 중 죠슈아가 운영하고 있는 슈퍼마켓 맞은편 골목길로 몇백 미터를 지나면 죠슈아의 집이 나왔다. 죠슈아나 윌리의 차를 타지 않고 활동지를 가기 위해서는 '보다보다'라 하는 골목길을 다니는 오토바이를 타고(2명 40실링 정도) 모고고식으로 나가서 그들 말로 '택시'라고 하는 5인승 SUV를 타고 목적지의 메인스트리트까지 간다. 르떼인, 보멧 같은 메인스트리트 교차로에서 내려서 다시 '보다보다'를 타고 골목길을 지나 활동지에 도착하고는 했다.


택시비는 무조건 1인 1달러(100실링 정도). 빈 택시에 탄 첫 손님이 가는 방향이 정해지면 같은 방향의 사람들이 타게 되는데, 5인승이지만 꽉꽉 채워서 (운전기사를 포함해) 10명까지 탈 때도 있었다. 켄은 '가끔 10명이 넘을 때도 있어요. 그때는 차 트렁크에 들어가면 되죠!' 하고 말하며 웃었다.


어느 날 운전기사를 포함해서 이미 9명이 타고 있는 택시를 잡았는데 운전기사는 어떻게든 우리 두 명을 태우고 싶어 했으므로 난 켄에게 트렁크로 들어가라고 장난스럽게 손짓을 했고 우리의 대화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들 키득키득 웃었다. 뒷자리를 다닥다닥 좁혀서 일곱 명이 앉고, 조수석에 두 명이 앉았고 운전기사는 자신의 자리 반을 뚝 잘라 나에게 앉게 했기에 나는 거의 그의 무릎에 앉다시피 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찻잎을 선별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티 공장.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학교 안내장을 나누어주며 통학 학비와 기숙 학비를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등록금과 통학비 또는 기숙 학비를 다 합한다면 한 달에 3천 실링 정도 (우리 돈 3만 원 내외) 였던 것 같다. 한 달 월급 10만 원 일자리도 구하기 힘든 마을에서는 제법 큰돈이 아닐 수 없다.


학교 통학을 위한 스쿨버스는 낡을 대로 낡아서 시동이 걸리지 않아 등하교를 못 시키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죠슈아와 운전기사가 하루종일 버스 이곳저곳을 손보며 시동을 걸어보려고 애를 쓰곤 했다. 다행히 시동이 걸리면 천천히 운행을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날엔 다른 기술자에게 연락을 하며 느릿느릿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마음이야 한없이 애가 타겠지만 그저 조금 많이 불편하게 지나가는 하루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다. 다음날이면 또 느릿느릿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스쿨버스가 아이들을 태우고 학교와 마을을 오고 갔다. 학교 운영자도 운전기사도 아이들도 아이들의 부모들도 그런 일상들을 별다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해 질 녘 케냐의 산골마을,

밀레니엄 카페에서 만난 수더분한 사람들.


아이들은 학교에 다녀야 하기에

9월 학기가 시작되기 전날까지 죠슈아의 팀은

학교에 다닐 아이들을 찾아 늦은 시간까지 산골 구석구석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안내장을 전달했다.


해가 지면 제법 쌀쌀해지기때문에 오리털 파카가 꼭 필요했다. 첫날 별생각 없이 얇은 옷으로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당황해서 차 안에 앉아 있는데 켄이 선뜻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나에게 걸쳐주었다. 고마운 마음으로 그 옷을 어깨에 두르고 아직 바깥에 있는 죠슈아의 일정이 마무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앉아있던 켄이 추워하고 있다는 것을 차 의자를 통해 전해지는 진동과, 내 오른쪽 어깨에 맞닿은 그의 왼쪽 어깨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케냐의 밤기온에 추워하고 있는 걸 보고는 선뜻 자신의 겉옷을 벗어 내게 건네준 그의 마른 몸은 그야말로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난 내 어깨를 두르고 있던 그의 겉옷을 다시 그에게 건네주었다.

'한국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추위에는 익숙해. 난 괜찮아.'

내 말에 그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옷을 받아 입었다.

마침 일을 마치고 돌아와 시동을 걸고 있던 죠슈아가 서둘러 집으로 출발했다.

랜턴이 없으면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밤길을 달려 몇 번씩이나 시동이 꺼지고 오르막차로를 못 올라가 밀려내려가기도 하던 낡고 오래된 그 차는 결국 우리를 집으로 돌려보내주기는 했다.


그 깜깜하던 밤, 초승달과 별빛은 아름다웠지만 내 스마트폰은 그 밤 풍경을 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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