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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시기즈 부족의 장례식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by 미 지

오전 일정을 마치기 무섭게 죠슈아가 함께갈 곳이 있다며 보멧으로 갔다. 한 식당에 들어가서 점심 메뉴를 고르라고 하는데 나이로비에 있는 윌리의 아내까지 모여있었다. 가족이 모두 모여있으니 나는 혼자 신나서 사진도 찍고 인사도 건네고 그랬는데 분위기가 영 심상치가 않더니, 식사를 마치고 이곳저곳에서 모인 차들이 향한 곳은 스물다섯 살 청년의 장례식장이었다.


건강하던 아프리카 청년이 갑자기 명을 달리하게 된 건 우리가 익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바로 그 험한 이유. 그는 한 밤 거리의 싸움에서 험한 이유로 명을 달리했다.


홈스테이 호스트 죠슈아의 큰며느리 동생이라기에 가까운 일가라서 오게 된 줄 알았는데
킵시기즈 족에서 올 수 있는 사람은 다 온 것 같았다. 이백 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천막 텐트 다섯 동. 천명? 그러나 다 채워진 천막 밖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중간에 돌아가는 차 한 대를 향해 모여있던 사람들이 ‘우—‘ 하는 야유를 보내는 건, 아마도 가해자 쪽 사람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청년의 이력 사항이 담긴 A4용지 인쇄물을 나누어 받고 (출생일, 00 고등학교 졸업, 00티팩토리에서 근무, 사망일, 생전 잘생긴 모습) 야외 천막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가 가까운 친지들이 모여있는 거실 공간으로 갔다. 상주에게 조문을 하는 사람들이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일 하는 사람들이 투박하고 커다란 주전자에 끓인 밀크티를 따른 컵과 우갈리와 콩, 케일 볶음이 담긴 음식 접시와 스푼을 나누어주었다. 사람들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접시를 받아 들고 음식을 먹다가 잘 손질된 흙바닥에 접시를 내려두고 역시 그 바닥에 놓아두었던 밀크티를 들어서 마시고 하면서 식사를 했다.

바깥 천막에서도 그런 식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빈 그릇이 모이면 한꺼번에 겹치게 모아서 들고 가는 사람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고 있었고 음식을 올리는 테이블이나 쟁반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내 아버지가 그 자리에 계셨다면, 손에 밥그릇을 들었다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는 이런 식사 장면에 필시 노발대발하셨을 것이었다. 여느 나라의 식사 격식과는 아주 다른 장면이었는데, 이런 모습이 일반 가정의 일상적이고, 테이블에서 포크와 스푼을 사용하는 식사는 아마도 식당에서나 하는 것 같았다.

서럽게 우는 가족에게 애도를 표하고 밖으로 나와서 천막에 줄지어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부족 중의 대표 몇 명이 추모의 말을 돌아가며 했고, 거기엔 죠슈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서 고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친구, 친척, 직장 동료들이 한 사람씩 나와서 고인을 기리는 이야기를 하고, 여러 명이 관을 메고 나와 장례식장을 한 바퀴 거니는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누군가 열심히 사진을 찍더니 나무 기둥 사이로 줄을 매어서 인쇄된 사진을 걸어두었다. 내 사진도 크게 확대되어 걸려있었다.

잠시 후 사진사가 다가와서 사진값을 내라고 했다.

난 사진 필요 없다고, 사지 않겠다고 깐깐하니 샐쭉하니 말했다.


켄이 당황하다가 자신이 사겠다며 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천 실링이었던가...

서류봉투에 켄과 죠슈아의 사진과 내 사진을 담아 들었다.

난, 싫다고 안 받았고, 빌려준 돈 역시 안 돌아왔다.

이후에도 몇 번인가 나에게 푼돈을 빌려갔는데 (글래디스와 켄) 그들이 그때 말하는 '보로우-빌려달라'는 의미는 처음부터 이해 가능한 단어였다.

'푼돈인데, 그리고 당연히 네가 내야 하는 건데 모르는 것 같으니 내가 대신 지불해 줄게, 이리 줘 봐'


왜 장례식장에서 묻지도 않은 사진을 찍고 돈을 달라 하는지 의아했는데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보니, 특별한 이벤트 장소도 없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모였으니, 우리 어릴 적 졸업식이나 입학식 행사장에서처럼 찍는 기념사진의 의미 아니었을까 싶다.

외국인 한 명 기분 좋게 사진 찍어줬는데 그 사진을 거절하니 당황스러웠겠다 싶고.

난 사진 버리라고 말했지만 그들의 관례 속에 섞여 들어가지 않는 내가 매정스럽고 이해 안 가기도 했겠다.

켄이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있을 때는, 사진을 찍지 말라는 표시를 하라고 알려주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식이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계속 모여들어 삼천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인원이 청년의 주검이 담긴 관 주변에 모여 서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한국에서는 사람이 죽었을 때 화장을 하는지 매장을 하는지 묻는 죠슈아에게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주로 화장을 했지만, 최근엔 화장이 많이 늘고 있다고 (자신 없게) 말했다.

그리고 한국은 땅이 좁아서 매장지가 그리 많지 않다고 더듬거리는 영어와 번역 어플을 돌리며 말했다.


한쪽에선 흥겨운 음악과 춤.

칼렌진 부족의 가스펠 송이라 했다.
한쪽에선 슬픔과 분노에 찬 울부짖음.
아프리카 하늘엔 커다란 까마귀 다섯 마리가 깍깍 소리 내며 허공을 날고
맑던 하늘엔 소나기 담긴 비구름이 모이더니
스산한 천둥소리를 먼저 내면서
가는 빗방울을 뿌리기 시작했다.


실수투성이

나의 장례식 참여기도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부족의 문화에 동화되지 못했던 나의 미숙함에 사과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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